80. 불타오르는 과거
당연한 이야기겠지만 1천 척의 모든 배들이 이곳에 내린 것은 아니었다. 라소니 왕국에는 항구 도시가 많았고, 스무 명의 지휘관들은 각자 다른 곳에서 내려 전쟁을 계속하고 있었다. 그리고 승리의 소식이 계속해서 날아오고 있었다.
“수도에서 모두 집결하면 되겠군.”
“그렇겠네.”
“이제 일주일만 더 달리면 수도입니다.”
각개 전투를 통해 계속 수도로 진격하고 있던 제국의 부대들은 일주일 후면 모두 모이게 된다. 그리고 그곳으로 진격하면서 전투는 계속되었다. 언제나 승리로 마무리된 전투는 병사들의 사기를 한껏 끌어올렸다.
그러나 그녀는 얼굴을 찌푸렸다. 너무나도 일방적인 승리. 그것이 참으로 이상했다. 그녀는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이상해.”
“무엇이 이상하다는 거야?”
“아레마이가 이렇게 조용할 리가 없어.”
아레마이 조직원들은 개개인 모두가 전투력이 기본 이상이었다. 웬만한 기사들은 그냥 이기는 수준이었고, B+급 조직원들부터는 왕궁 기사단의 실력과 비슷했다(물론 그중에서 비전투 단원들도 많다).
그런 그들이 이번 전쟁에 참여했다면 싸움의 양상이 이렇게 일방적인 승리로 흘러갈 리가 없었다.
즉, 저들이 어떤 이유에서 전쟁에 참여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무슨 꿍꿍이야.”
“저들이 혹시 전쟁에 참여하지 않았다는 겁니까?”
루키에르가 놀라 물었다. 그녀는 자신의 예감이 거짓이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지만 싸움의 양상이 더욱 일방적으로 흘러갈수록 확신할 수 있었다. 저들이 라소니 왕국을 버리고 다른 곳으로 이동했다는 것을.
“지금 와서 전쟁을 멈출 수는 없어.”
이미 수도 가까이 진격한 상태였다. 여기서 멈추고 제국으로 돌아간다면 다른 왕국들로부터 엄청난 비난을 받을 수도 있었다. 이미 아레마이의 수중에 들어갔다고는 하지만 독립적인 나라인 ‘척’하는 상태니까.
“일단은 진격한다.”
라이넨은 병사들의 사기가 최고조에 다다랐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렇기에 여기서 멈출 수는 없었다. 일단은 계속 나아갈 수밖에 없었다.
“황제 폐하께 아레마이를 찾아 달라고 해야겠어.”
“부탁하면 바로 해 주실 거야.”
라이넨은 황제에게 아레마이가 라소니 왕국에서 빠졌으니 좀 찾아 달라는 서신을 적어 전서구로 날려 보냈다. 저들의 꿍꿍이가 궁금했지만 지금은 그것에 신경 쓰는 대신 라소니 왕국을 무너뜨리는 것이 먼저였다.
“전하, 승리하고 돌아왔습니다.”
“수도로 진격할 준비 다 되었습니다.”
“명을 내려 주십시오.”
모든 부대가 한자리에 모였다. 이제 수도로 진격할 때였다.
* * *
뮤일라는 어느 날 갑자기 사라져 버린 자신의 첫째 딸 때문에 발을 동동 굴렀다. 왕국의 중대사는 모두 란시엔이 결정해 왔다. 그런 란시엔이 곁에 없으니 뮤일라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하루가 멀다 하고 결재해야 하는 서류는 산처럼 쌓여 가고 있는데 뮤일라는 옥새가 어디에 있는지 몰랐다. 서류를 제대로 읽는 방법도 몰랐고, 왕국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도 몰랐다.
“전하, 큰일 났습니다.”
“무, 무슨 일인데?”
“루미니르 제국에서 저희 왕국으로 선전포고를 해 왔습니다!”
“왜, 왜?”
안 그래도 혼이 빠져나간 와중에 루미니르 제국이 뜬금없이 침략 의사를 밝혀 왔다. 황태자가 직접 나와서 이야기하는데 그녀는 입이 쩍 벌어졌다.
“내, 내 딸이 그런 대륙 흉악범이라고?”
란시엔이 야망을 보이는 것은 진즉에 알고 있었다. 잔인하고, 욕심이 많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그런데 황태자를 납치해 이 나라에 가뒀었다고? 그리고 이 대륙을 전부 정복하려 한다고? 그게 무슨 소리야!
뮤일라는 믿고 싶지 않았다. 란시엔은 그저 남들보다 조금 ‘더’ 똑똑한 딸일 뿐이었다. 절대 그런 일을 할 사람이 아니었다.
“이럴 때가 아니야.”
그래서 루미니르 제국 측에 서신을 보냈다. 라이넨 황태자가 납치를 당한 것은 정말 유감이다. 그렇지만 제발 선처를 좀 해 달라고. 제발, 우리를 침략하지 말라고. 그리고 우리 딸은 절대 그런 사람이 아니라고.
그러나 돌아오는 답장은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지 말고 현실을 직시하라는 것이었다. 그녀는 입술을 깨물었다. 이대로 루미니르 제국의 침입으로 인해 멸망당하는 걸 지켜만 보고 있으라고?
그때, 그녀의 머릿속에 딸의 작업을 도와주던 자들 중 특히 비상했던 젠카라는 아이가 떠올랐다. 그 아이는 딸과 친하니 무슨 대책이라도 줄 수 있지 않을까?
그러나 재빨리 달려간 란시엔의 집무실에서 그녀를 맞이한 것은 젠카의 필체로 된 사직서뿐이었다. 그녀는 머리를 쥐어뜯었다.
“으아악!”
그녀가 원하는 것은 그저 말년까지 편안한 삶을 사는 것이었다. 그러나 하늘은 그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생전 머리라는 걸 굴려본 적이 없는 그녀가 머리를 굴렸다. 그때 떠오르는 사람이 있었다. 단쿤 아스트로. 그는 라소니 왕국의 최고 기사였다. 그가 있다면 이 전쟁은 승리할 수 있을 것이다.
“아스트로 장군을 데리고 와!”
“없, 없어졌습니다!”
그녀는 당황했다. 이 시국에 지금 휴가라도 갔단 말인가? 만약 아스트로 장군이 없다면 다른 사람을 불러오면 된다. 그녀는 머리를 굴려 전쟁을 잘할 수 있는 자들의 이름을 줄줄이 불렀다. 그러나 결과는 언제나 같았다.
다들 어디론가 증발했다는 것이다.
“이번에도 없어?”
“없습니다!”
“제대로 좀 찾아봐!”
“죄송합니다!”
나라를 지킬 명장들이 없어지자 왕국은 제대로 된 반항도 하지 못한 채 밀려 나갔다. 병사들은 자꾸만 이탈하고, 기사들은 전쟁에 나갔다 하면 다 시체가 되어서 돌아왔다.
적들의 승리가 계속되니 상대의 사기는 올라갔고, 이쪽은 점점 떨어져만 갔다. 그녀는 어쩔 수 없이 모두를 궁 안으로 불러들여 자신을 보호하게 만들었다. 그녀는 궁을 감싸는 사람들이 많아지면 많아질수록 안심했다.
저들이 물러날 때까지만 버티면 다시 해피 라이프를 즐길 수 있을 거야!
그렇게 자신 나름의 준비를 한 뮤일라는 저들이 진격해 올 때까지 기다렸다. 버티는 것만 잘하면 된다. 란시엔이 나타날 때까지만 기다리면 된다. 그리고 원래 공성전이란 방어하는 쪽이 더 유리하잖아? 그러니까 우리는 이길 수 있어!
그러나 뮤일라가 간과한 것 두 가지가 있다면 제국의 병사들은 수준이 높다는 것이고 제국 측에 왕궁에 대한 것을 누구보다 잘 아는 한 공주가 있다는 점이었다.
“이제 성이네.”
카니벨라는 저 멀리서 흐릿하게 보이는 라소니 왕국의 성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녀의 아픈 과거가 남아 있는 곳이었다. 그녀는 입술을 깨물었다. 정말이지 그녀는 저곳에 갈 때마다 예전의 그 아이가 된 것 같았다.
‘지금 여기서 이러면 안 돼.’
그녀는 마음을 다잡았다. 왕궁에 대해서 누구보다 잘 아는 자는 루키에르와 그녀밖에 없었다. 그리고 루키에르가 앞문을 맡아 준다고 했으니 그녀는 뒷문으로 들어가 적들을 기습해야 했다.
그런데 이런 모습으로는 절대 이길 수가 없다. 숨을 깊게 들이마시자 한결 나아졌다. 그녀는 그나마 밝아진 표정으로 라이넨을 바라보았다.
“오늘 밤에 실행할 거야?”
“아니. 일단 오늘은 좀 쉬고.”
실제로 여러 곳에서 전투를 치르고 곧장 올라온 자들도 많았다. 그들의 체력을 위해 하루 쉬어가는 시간을 가졌다.
그렇게 하루 동안 꿀 같은 휴식을 취한 병사들은 밤이 되자 모였다. 루키에르가 이끄는 쪽이 성문을 열기로 했고, 카니벨라는 왕족들이 이용하는 비밀 통로를 이용해 침입하기로 했다.
“작전을 시작한다.”
라이넨의 말에 루키에르가 이끄는 쪽은 성문을 부수기 시작했다. 순식간에 횃불이 켜지고 아수라장이 되었다. 그런 그들의 모습을 물끄러미 보던 그녀는 자신의 뒤에 있는 병사들을 이끌었다.
‘비밀 통로가 지금까지 그대로이기를 바라야겠는데.’
그녀가 궁을 떠난 지 오래인 만큼 통로의 위치가 바뀌었을 가능성도 있었다. 그러나 다행히도 통로는 그대로였다. 그래서 그녀는 쉽게 성안으로 침입할 수 있었다. 그녀는 휘하 병사들에게 명했다.
“불화살을 쏘아.”
이곳저곳 날아간 불화살은 순식간에 궁들을 태우기 시작했다. 앞의 병사들을 막기 위해 안간힘을 쓰던 자들은 뒤에서 날아오는 갑작스러운 공격에 속절없이 죽어 가기 시작했다.
“으아악!”
“뜨, 뜨거워!”
불화살은 땅바닥, 건물, 병사들의 등이나 몸에 맞으며 활활 타올랐다. 순식간에 주위가 불바다가 되었다. 그녀는 병사들에게 모든 것을 맡기고 란시엔의 궁으로 향했다. 아레마이의 본거지가 란시엔의 궁 지하라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곳에 간부들이 있다면 나 혼자 이기기는 힘들겠지만 지금이라면…….’
그녀는 달려오는 적들을 암기를 던져 가며 쓰러트렸다. 그리고 재빠른 달리기로 회의장으로 추정되는 곳의 문을 열었다.
“젠장!”
그러나 그곳은 이미 깨끗했다. 아무것도 없었고, 인기척조차 없었다. 그녀는 한발 늦었음을 시인했다. 작전을 짠다고 시간을 허비한 사이, 아레마이는 흔적도 없이 증발했다.
그녀는 입술을 깨물며 지상으로 올라왔다. 기민한 움직임으로 적들을 베어 나가던 그녀는 자신의 앞에서 엎어진 한 시녀를 보았다. 그녀는 반사적으로 검을 들어 올렸다. 그때 그 시녀가 소리쳤다.
“살려 주세요!”
낯익은 사람이었다. 그래서 그녀는 순간적으로 멈칫했다. 벌벌 떨던 시녀는 그녀의 모습을 보더니 눈을 크게 떴다. 그러고는 그녀의 왼손을 꽉 잡으며 말했다.
“고, 공주님, 저, 저예요!”
그녀는 그 시녀를 쳐다보았다. 아무리 생각해도 누구인지 기억이 나지 않았다. 그저 불쾌한 감각이 느껴질 뿐이었다.
“공주님의 전속 시녀!”
“…….”
“살려 주세요. 살려 주신다면 뭐든지 다 할게요.”
시녀는 주절거렸다. 그녀는 여전히 그 시녀가 누군지 잘 기억이 나지 않았다. 그렇지만 한마디는 할 수 있었다.
“해야 할 말을 안 했네.”
“네?”
그러나 그녀는 아무 말 하지 않고 시녀를 베었다. 죽어 가면서도 자신에게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끝까지 알아차리지 못하는 것을 그녀는 무심한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그리고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미안하다고 했어야지.”
내가 그때 얼마나 아팠는데. 폭력에, 방치에, 무시에 내가 얼마나 병들어 갔는데. 난 너희를 절대 용서할 수 없어. 내 시간이 얼마나 느리게 지나갔는지 너희는 모를 거야. 영원히 모를 거야.
싸움은 이미 끝나 있었다. 병사들은 승리를 자축했다. 그런데 그 와중에 앙칼진 목소리가 들렸다. 어렸던 그녀를 폭행했던 나쁜 사람.
“이것 놓으란 말이야! 난 이 나라의 여왕이란 말이다!”
“어, 어머니!”
뮤일라와 라카에리, 그리고 마이클슨이었다. 그들을 보자 그녀의 심장이 쿵쿵 뛰었다. 숨이 잘 쉬어지지 않았다. 그녀는 가슴을 움켜쥐고는 주저앉았다. 저번에 란시엔을 만났던 것처럼 그녀는 마치 그 어렸던 시절로 되돌아간 것 같았다.
지금은 충분히 저들을 이길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카니벨라?”
라이넨이 그녀의 창백한 표정을 보고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그러나 그녀는 말할 정신이 아니었다. 그저 무력하게 떨며 이 상황에서 벗어나기만을 바랐다. 제발 나를 살려 줘.
“나를 봐.”
라이넨은 헐떡이는 그녀를 꽉 안고 얼굴을 잡아 자신을 보게 했다. 그리고 서서히 진정되는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자신을 바라보는 강한 눈빛에 제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그녀는 비틀거리며 일어섰다.
“사, 살려 줘!”
“살려 주면 뭐든지 할게!”
“제발…….”
웃기는 일이었다. 저 말은 어릴 때, 무력했던 그녀가 했던 말이었다. 그런데 지금 저들이 하고 있었다. 그녀는 조용한 목소리로 말했다. 당신들은 내가 살려 달라고, 그만하라고 했을 때 그랬냐고.
“…….”
그들은 침묵했다. 그녀는 검을 들었다. 오늘따라 더 날카로운 검이 그들의 목을 차례로 베어 갔다. 그들의 날카로운 비명 소리가 들렸다.
어린 카니벨라가 마음속에서 그들을 바라보았다.
아팠어요. 아파요. 저를 왜 때려요? 저도 아팠어요. 저도 소리치고 싶었어요. 저도 살려 달라고 했었는데…….
그녀는 어렸던, 나약했던 자신을 붙잡고 울었다. 저들의 죽음이 이 어린아이에게 조금이라도 위로가 되기를 바랐다.
물론 이렇게 한다고 해서 완전히 그녀가 과거에서 자유로워지지는 못할 것이다. 여전히 그때에 매여서 살 수도 있을 것이다. 어쩌면 악몽은 끝나지 않을 수도 있지.
그렇지만 오늘만큼은 아니었다. 어린 그녀도 아마 그럴 것이다.
밤이 끝났다. 성 아래에서부터 뜨겁고 밝은 태양이 떠오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