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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1. 격전 (82/93)

81. 격전

라소니 왕국과의 전쟁은 끝이 났지만 아레마이와의 전쟁은 남아 있었다. 이곳을 어떻게 해야 할지에 대한 회의도 해야 하지만 지금은 그럴 시간이 없었다. 아레마이의 꿍꿍이가 무엇인지 모르는 한, 절대 멈출 수 없었다.

“저들이 있을 곳으로 예상되는 곳이 있어?”

“잘 모르겠어.”

아레마이의 본거지는 여기다. 그리고 그들은 이곳을 버리고 사라졌다. 카니벨라 또한 저들이 무슨 의도를 가지고 이런 짓을 하는지 알 수 없었다.

“그럼 일단 귀환할까?”

그녀의 말에 라이넨은 생각에 잠겼다. 이곳의 최고 지휘관은 그다. 그의 결정에 따라 수만의 병사들의 갈 곳이 정해진다.

‘어떻게 할까…….’

애초에 라소니 왕국에 선전포고를 한 것은 아레마이를 섬멸하기 위해서였다. 라소니 왕국을 무너뜨린 것은 분명히 그들의 목적 중 하나는 맞았지만 이것은 최종 목적을 위한 발판일 뿐이었다.

성과 없이 귀환할 수는 없었다. 그렇다면 일을 크게 벌인 보람이 없다. 저들을 이곳으로 끌어들여야 한다.

“란시엔을 끌어들이자.”

“응? 어떻게?”

그녀는 갑작스러운 말에 의아한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는 씩 웃었다. 순간 그녀의 머릿속에 스쳐 지나가는 생각이 있었다.

“설마……?”

“그래.”

그녀는 얼굴을 찌푸렸다. 아레마이는 대장을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할 수 있는 집단. 란시엔을 드러내는 순간 그들은 불나방처럼 달려들 것이다.

“너무 위험해. 그렇게 했다가 도리어 우리가 당할 수도 있어.”

그녀의 우려에 그는 씩 웃으며 음흉하게 말했다.

“진짜를 드러낸다면 그렇겠지.”

“잠깐! 설마 거짓을 말하겠다는 거야?”

“네 말마따나 저들이 대장을 위해서 무엇이든 한다면 그게 설사 거짓 정보라고 해도 뛰어들 거야. 그리고 이미 저들은 우리가 란시엔을 데리고 있다는 것도 알고 있어.”

“그렇다면……?”

“우리는 그저 저들이 움직일 명분을 주자는 거야.”

“…….”

그는 그녀에게 계획을 설명했다. 그녀는 조직의 간부들을 생각했다. 지금쯤 란시엔을 찾을 방법을 생각하며 눈이 잔뜩 뒤집혀 있을 것이었다.

“엿 먹일 생각을 하니 행복해서 미치겠는데.”

그녀는 이때까지 자신을 기만하고 뒤에서 비웃고 있던 그들을 생각하며 살짝 이지만 광기 어린 표정을 지었다. 그는 그런 그녀의 표정을 보며 안쓰러움이 올라왔다.

“넌 그래도 돼. 그럴 자격이 있어.”

그녀의 비극은 아레마이가 벌인 끔찍한 일로부터 시작된다. 그리고 그 비극은 그녀의 인생을 쥐고 흔들었다. 그때부터 지금까지 그것으로 인해 얼마나 고통받았는가. 그녀는 그 비극이 자신을 찌르고 있는 것을 느끼며 주먹을 꽉 쥐었다.

역시 난 이 왕국이 싫어.

“그럼 황제 폐하께 전서구를 보내서 발표하게 할까?”

“그러도록 하자.”

라이넨은 손을 까딱거렸다. 한 기사가 그에게 종이와 펜을 내밀었다. 간략하게 작전 사항에 대해 적은 그는 서신을 날려 보냈다.

“그럼 일단 수습하고 움직여 보자고.”

*   *   *

일단 그들은 며칠간 왕국에 머물렀다. 뮤일라를 비롯한 왕족들을 죽이긴 했지만 공식적인 항복 문서는 받아 내지 못했기 때문이다. 카니벨라는 라이넨에게 실질적으로 왕국을 지탱하고 있는 주요 귀족들의 명단을 적어 주었다.

그리고 라이넨의 군대는 그들이 있는 곳으로 쳐들어갔다.

“감히 여기가 어디라고!”

“우리 왕국을 침략한 대가를 받을 것이다!”

“으아악! 제발 살려 주게!”

대부분은 저항했다. 귀족들은 얼마 없는 사병을 운용해 그들에게 대적했지만 그것은 의미 없는 일이었다. 루미니르 제국의 군대는 일반 귀족의 사병 따위가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강대했다.

그렇게 한 달여의 시간 동안 라소니 왕국을 두루 돌며 귀족들의 항복을 받아 낸 그들은 수도로 모든 귀족들을 소환했다. 정식으로 항복 문서를 받아 내기 위해서였다.

그리고 그렇게 수도로 온 귀족들은 겨우 남은 성채에 당당히 걸려 있는 루미니르 제국의 깃발과 흰 깃발을 보며 원통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풀이 죽은 자도 있었고, 주저앉아 통곡하는 자도 있었다.

라이넨은 성이 다 타 버렸기에 만들어 놓은 임시 천막의 상석에 앉아 있었다. 그리고 그 옆에는 카니벨라가 당당히 서서 보조하고 있었다. 라소니 왕국의 귀족들은 그녀의 얼굴을 보며 경악했다.

“다, 당신은!”

“지금 저들에게 붙은 것입니까?”

“어째서 그런 짓을 하셨습니까!”

“신께서 마마를 용서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들은 그녀에게 원통함을 쏟아 냈다. 그녀는 그들을 비웃었다. 왕위 계승권을 잃자마자 그녀를 쓰레기통에 던져 버리듯 버려 버린 저들을 위한 의리 따위는 없었다.

“입 닥쳐.”

그녀는 사납게 일갈했다. 너희들이 뭐라고 감히 내게 그딴 소리를 지껄이는 것이냐. 그녀는 싸늘한 비웃음을 지었다.

“너희는 안 궁금한가 봐. 어린아이가 되어 버렸던 내가 갑옷을 입고 이러고 있다는 게.”

“그러고 보니 어째서 마마께서……? 어린아이가 되어 버리시지 않으셨습니까?”

“……!”

그때서야 귀족들은 사고의 충격으로 어린아이가 되어 버렸던 그녀의 모습을 떠올릴 수 있었다.

“그럼 본래부터……?”

“그래, 다 연기였다.”

그녀는 비웃음을 가득 지으며 비아냥거렸다. 저들의 놀라는 표정을 더 보고 싶었지만 지금은 그럴 겨를이 없었다. 빨리 저들에게서 항복 문서를 받아 내고 아레마이의 동선을 파악해야 했다.

“어서 문서에 사인이나 해.”

그녀는 더 말하지 않았다. 그 비극을 만들어 내는 것에 동참한 너희들에게 더 할 말은 없으니 빨리 꺼져 버려.

라이넨은 그녀의 말에 입을 열었다.

“빨리 사인하고 꺼지도록.”

그때서야 카니벨라의 등장 때문에 흥분했던 귀족들이 그를 쳐다보았다. 그들은 아무리 그래도 그의 존재를 순간 잊었다는 것에 덜덜 떨었다.

“……여기 있습니다.”

그들은 모두 항복 문서에 사인을 했다. 라이넨은 그것을 보며 흡족한 표정을 지었다. 이제 라소니 왕국은 진정한 멸망을 맞이했다.

“카니벨라를 봐서 너희들을 죽이지는 않겠다. 그러니 더 발악하지 말고 자택에서 대기하고 있도록. 허튼 마음을 먹을 시 진짜로 이 나라를 불바다로 만들어 버리겠다.”

그의 협박에 귀족들은 격렬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이제 꺼져.”

귀족들은 풀이 죽은 채 병사들의 눈길을 받으며 자신의 저택으로 돌아갔다. 그런 그들의 귀가를 무심한 눈길로 바라보고 있는 그녀에게 그가 말을 걸었다.

“괜찮아?”

“응, 괜찮아.”

“혹시라도 힘들면 이야기해. 들어줄 테니까.”

“진짜로 괜찮아.”

그녀는 진심으로 아무렇지도 않았다. 뮤일라 일가를 죽이며 어느 정도 해소가 되었기 때문일까?

“전하, 폐하께 답장이 왔습니다!”

한 병사가 달려와 그에게 서신을 건넸다. 내용은 간결했다. 그들이 덫에 걸렸다. 이제 드디어 아레마이와의 본격적인 전쟁이 시작된다.

“모두 루미니르 제국으로 귀환한다.”

저들을 섬멸할 시간이다.

*   *   *

황제는 란시엔의 신병을 확보했으니 아레마이의 항복을 받아 내는 것은 시간문제라고 선포했다. 아레마이라는 이름만 들어도 이를 갈던 백성들은 거기에 환호했다.

그리고 그 소식은 제국의 간자들에게서 슌카린에게 전해졌다. 그는 거칠게 서류를 구겼다.

“역시 대장은 너희들이 데리고 있었어.”

“슌카린, 이제 어쩔 것이냐?”

한 간부가 싸늘하게 물었다. 슌카린은 입술을 깨물었다. 이것은 분명히 함정이었다. 여기에 걸려들었다가는 어떻게 될지 그는 알 수 없었다.

“이건 함정이야, 알고 있지?”

칸나가 걱정스럽게 그에게 말했다. 그러나 슌카린은 그저 구겨진 서류를 바라보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알고 있어.”

어떻게 모를 수가 있을까. 이것은 저들의 도발이었고, 그들을 끌어내기 위한 계책이었다. 저들에게 휘말리면 속절없이 전멸할 것이다. 그렇지만 그는 생각해야 했다. 여기서 어떻게 해야 저들에게 패배하지 않음과 동시에 대장을 빼내 올 수 있을까.

제국의 군대는 어림잡아도 100만이 넘는다. 그에 비해 그들의 규모는 많아야 30만 명 수준. 그중에서도 전투가 불가능한 인원과 파견자를 빼면 25만 정도였다.

계란으로 바위 치기. 지금 저들의 수준이 딱 그러했다.

“……그래도 일단 대장을 구하러 간다.”

“네가 그렇게 바보였다니 실망이군.”

“함정인 건 나도 알아!”

“그런데도 나서겠다는 것인가?”

“대장이 있어야 우리는 결속이라는 것을 할 수가 있다고. 이 조직을 이끌 수 있는 건 오직 대장뿐이시다.”

“…….”

다른 간부들 모두가 침묵했다. 확실히 지금의 조직은 아주, 아주 미세하지만 삐걱거리고 있었다. 빨리 대장을 빼 올 필요가 있었다.

“내부의 인원들을 이용할 셈인가?”

“그럴 리가. 그들은 언제까지나 최후의 수단일 뿐이야.”

적들은 내부에 침투한 단원들이 누구인지는 정확하게 알지 못한다. 그런 상황에서 그들을 이용하는 건 그들의 패를 드러내는 것과 같다. 최소한의 인원은 정보 파악을 위해 남겨 놓아야 했다.

“그럼 어떻게 할 생각인가?”

“직접 확인하고 대장이 맞는다면 빼내야지.”

그리고 어떻게 해서든지 저들을 멸망시킨다.

그들에게는 레미우스 왕국과 시스티아 왕국의 군대가 있었다. 그렇지만 아직 공식적으로는 왕국들이 그들의 수중에 떨어졌다는 것이 밝혀지지 않았기에 함부로 개입시킬 수 없을 뿐.

“나쁘지 않다, 저들 대기시켜 놓는 거.”

수이카의 말에 슌카린은 손가락을 튕겼다. 그의 부하가 재빨리 레미우스 왕국과 시스티아 왕국에 보낼 문서를 작성하기 시작했다.

“제가 하겠습니다. 그리고 저들이 대장을 어디에 두고 있는지도 알아볼게요.”

시카온이 굳은 표정으로 말했다. 슌카린은 그의 어깨를 두드렸다.

“믿는다.”

황제는 저들의 서신을 보고 비웃음을 지었다.

“직접 보고 싶다…….”

그런 황제의 중얼거림에 옆에서 차를 마시고 있던 카일라가 말했다.

“제가 가겠습니다.”

“뭐라고?”

“처음부터 가짜를 보내실 생각이 아니셨습니까? 그러니 제가 가겠습니다. 허락해 주세요.”

“안 된다.”

“폐하, 저 또한 폐하의 백성이자 이 제국을 지킬 의무가 있는 자입니다.”

“그래도 널 보낼 수는 없다.”

“허락하여 주십시오. 지금 전하와 공주, 그리고 제 아버지께서도 싸우고 있습니다. 저도 뭐라도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심지어 카니벨라는 루미니르 제국 출신이 아니기에 제국에 대한 충성심이 없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제국과 하나 되어 저들과 싸우고 있다. 카일라의 눈동자를 바라보며 황제는 입술을 깨물었다.

카일라는 아들의 약혼녀이자 라이문타 가문의 하나밖에 없는 직계 자손이었다. 그리고 그녀가 죽으면 라이문타 가문은 사라진다.

그러나 그녀의 눈빛은 곧았다. 허락해 주기 전에는 절대 이곳에서 나가지 않겠다는 결의가 보였다. 황제는 한숨을 쉬었다.

“그래, 허락하마. 그 대신 절대 위험한 행동을 해서는 안 된다.”

“괜찮습니다. 전 제 일선의 안전이 우선입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어차피 이번 작전은 저들을 멸망시키기 위한 디딤돌이었다. 그녀를 보여 주는 척하며 저들을 쓸어 버릴 것이다. 그러니 이곳에 남아 있는 군대로 보호받는 것이 충분히 가능하다.

“……맡기마.”

“네, 걱정 마세요.”

그녀는 웃었다. 어차피 그들은 승리할 것이다. 루미니르 제국은 언제나 승리의 길만을 걸어왔으니까.

“그럼 다녀오겠습니다, 폐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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