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2. 희생
아레마이와 황실은 란시엔 교환을 놔두고 날짜를 정했다. 참으로 아슬아슬한 날짜였다. 황제는 과연 라이넨이 제시간에 도착할 수 있을까 걱정이 앞섰다.
그러나 황제는 자신의 아들을 믿었다. 그리고 루미니르 제국이 가지고 있는 승리의 역사를 믿었다.
그때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리며 카일라가 들어왔다. 그녀는 반지의 힘으로 인해 란시엔의 모습으로 변해 있었다.
“……다녀오거라.”
“네, 다녀오겠습니다.”
그리고 그녀를 호위하고, 또한 적들을 섬멸하기 위해 남은 군대가 출발했다. 그 수는 대략 30만으로 아레마이를 상대하기에는 괜찮은 숫자였다.
‘우리 제국에 승리의 역사를.’
황제는 그렇게 생각했다. 이때까지 그 누구도 넘보지 못했던 제국을 넘보는 자들에게 패배를 안겨 주고 부디 이 제국에 무한한 발전과 영광이 있기를.
그리고 그런 전쟁의 신호탄을 쏘게 된 카일라는 혹시 모를 병사들의 동요를 피하기 위해 검은 베일이 달린 모자를 쓰고 마차에 타고 있었다.
“불편한 점은 없으십니까?”
그녀를 호위하기로 한 지휘관 기사가 물었다. 그는 이번 작전의 실체를 알고 있는 유일한 자였다. 그녀는 걱정 말라는 듯 고개를 흔들었다. 어두운 베일 때문에 앞이 잘 보이지 않았으나 괜찮았다.
창문을 통해 들어오는 공기는 맑고 숲은 새들의 지저귐으로 가득해 전쟁을 하러 오는 것이 아니라 마치 놀러 온 것 같은 착각을 불러일으켰다. 그러나 그녀는 알고 있었다.
이번 전쟁은 제국의 명운을 좌우한다는 것을.
그녀는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이 크지 않다는 것을 안다. 이런 싸움에서 카니벨라처럼 검을 들고 직접 싸울 수 없다는 걸 알고 있다. 그렇다면 제국을 위해 적어도 이런 일이라도 해야 했다.
혹시나 죽게 될까 두려웠다. 이번 난전에서 혹여나 눈먼 칼에 찔려 저승에 가기는 싫었다. 그렇지만 이런 일을 하는 것이 큰 권력을 가지고 있는 본인의 의무라고 생각했다. 그녀는 각오를 다졌다.
그리고 군대는 국경을 넘어 카이셔스 산맥 초입에 들어왔다. 멀리서 잔뜩 무장한 무리가 보였다. 아레마이인 것으로 추정되었다.
“어서 대장을 우리에게 보여라!”
모노클을 낀 사내. 저자가 바로 카니벨라가 말했던 부대장 슌카린이라는 자였다. 그의 날카로워 보이는 기세에 그녀는 침을 삼켰다.
‘성공할 수 있겠지?’
그들의 군대는 저들의 숫자를 압도했지만 그녀는 무서웠다.
“대장을 보이라니까!”
저들이 악을 썼다. 그러자 지휘관은 마차의 문을 열었다. 그녀는 사뿐히 내렸다. 편안한 활동복 드레스가 그녀의 다리를 휘감았다. 그녀는 모자를 벗고 얼굴을 보였다. 그들의 얼굴에서 환희가 느껴졌다.
그녀는 그들의 얼굴이 곧 절망감으로 흐려질 것이라는 생각을 하니 통쾌했다.
‘이쯤 되니 불쌍해질 지경이네.’
양옆에서 기사들이 그녀의 팔을 잡은 채 나아갔다. 그녀는 반항하는 척하며 착실하게 나아갔다. 그리고 그들과의 거리가 열 걸음도 채 되지 않았을 때 그녀는 반지를 뺐다.
“……!”
은발 머리가 사라지고 그녀의 파란 머리카락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들이 경악함과 동시에 지휘관이 소리쳤다.
“쏴라!”
병사들이 재빨리 활을 쏘았다. 그녀를 양옆에서 끌고 가던 기사들은 재빨리 그녀를 마차에 태웠다.
“카일라 님을 안전한 곳으로 모셔라!”
“네!”
일단 국경선 안으로 들어가면 그 어떤 공격이라도 무효화된다. 결계의 효과 때문이었다. 화살은 궤적에서 벗어나고 다른 공격은 결계에 막혀 취소된다. 애초에 이럴 목적으로 국경선 근처에서 만나자고 한 것이다.
“저년을 당장 죽여라!”
슌카린의 옆에 있는 중년의 남자가 소리쳤다. 그 명에 따라 조직원들이 그녀를 추격하기 시작했다. 그녀는 자신을 쫒아오는 암살자들을 두려운 마음으로 바라보았다. 마차가 조금이라도 빨리 국경선 안으로 들어가기를 바랐다.
“이제 곧 국경선입니다!”
그녀를 호위하기 위한 1천여 명의 기사들이 마차를 에워쌌다. 그리고 계속해서 날아오는 화살과 암기를 쳐 냈다. 저들은 대장을 미끼로 자신들을 기만한 그녀를 죽이기 위해 눈에 불을 켜고 있었다.
국경선은 가까웠다. 그렇지만 그녀는 조급해졌다. 자신이 빨리 저 안으로 들어가야 기사들이 안심하고 싸울 수가 있었다.
“조금만 더 빨리!”
조직원들이 무서운 속도로 그녀를 추격했지만 그녀는 한 끗 차이로 무사히 그 안에 들어갈 수 있었다.
“젠장!”
남자는 그들이 검문소 안으로 사라지는 것을 보고 이를 갈았다. 그러나 지금은 감히 자신들을 속인 저들에게 본때를 보여야 했다.
“방패를 들어라!”
앞에서 화살을 맞아 쓰러지는 조직원들의 모습을 본 그는 슌카린에게서 지휘권을 전달받았다. 이미 초반의 화살 세례로 인해 슌카린은 여러 군데에 화살을 맞은 상태였다. 지금 당장 죽어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였다.
“쯧쯧쯧, 저놈을 옮겨라.”
“네 알겠습니다!”
‘다른 간부들이 없어서 다행이로군.’
다른 간부들은 전투에 알맞은 자들이 아니었다. 그랬기에 이번 전투에 참여하지 않았다. 모두 레미우스 왕국과 시스티아 왕국으로 흩어져 작전을 짜고 있었다. 슌카린은 자신이 직접 대장의 얼굴을 보지 않으면 안 된다며 악을 써서 온 것이었다.
그것마저도 화살을 수없이 맞아 거의 죽기 직전이었지만.
‘레신카 그놈이 아쉬워질 줄이야…….’
간부들 대부분이 전투에는 능하지 못했지만 레신카는 행동 대장이었던 탓에 나름 전투에 능했다. 그러나 그는 카니벨라를 추적하는 와중에 죽었다. 그 당시 그 소식을 들었던 남자는 혀를 찼다.
어떻게 적에게 그리 허무하게 죽을 수가.
그러나 지금은 그 한 손이 그렇게 아쉬울 수가 없었다. 만약 슌카린 대신 레신카가 왔었더라면 전투 양상이 조금은 달라졌을 텐데.
그렇게 생각하며 남자는 조직원들에게 업혀 사라지는 슌카린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러나 이내 고개를 돌렸다. 이제는 전투를 해야 할 상황이기에 신경 쓸 수가 없었다. 저놈이 운이 있다면 살아나겠지.
‘참으로 난감하군.’
애초에 조직원들은 이런 전투에 어울리지 않았다. 그들은 어둠 속에서 상대를 베어 넘기는 암살자지 전쟁에 동원되는 일반 병사가 아니었다. 그러나 그는 장군이었고, 그 누구를 데리고도 지휘를 해야 하는 자였다.
이번에는 혼자서 해내야 했다. 어려운 전투가 될 것으로 예상한 그는 부하들에게 명했다.
“앞으로 나아가면서 버텨라! 저들이 화살이 떨어질 때까지 버텨라!”
그 말에 조직원들은 방패를 꼭 움켜쥐었다. 그리고 화살 세례를 받으며 앞으로 나아갔다. 그리고 이윽고 적들에게 화살이 다 떨어졌다.
“전군 전투를 준비하라!”
제국 쪽 지휘관이 소리쳤다. 병사들이 활을 버리고 칼과 방패를 들었다. 창을 들기도 하였다. 그리고 명령에 따라 소리를 지르며 달려갔다.
“으아악!”
“아악!”
서로가 거칠게 충돌했다. 비명 소리가 산맥을 뒤흔들었다. 검과 검이 맞부딪히고, 창이 섬뜩한 소리를 내며 누군가를 찔렀다. 피가 강이 되어 흘렀다. 서로를 죽이겠다는 살기가 근처에 가득 피어올랐다.
조직원들은 병사들의 목과 얼굴에 암기를 던졌다. 소리 없이 그들을 죽이는 조직원들의 모습은 가히 사신과도 같았다.
“으악!”
“어디에 있어?”
“크악!”
“당황하지 말도록! 저들은 분명히 어딘가에 숨어 있다!”
그들은 전장을 소리 없이 누볐다. 상대를 죽일 때 그 어떤 수단도 가리지 않았다. 동료가 쓰러지면 그 동료의 등을 밟고 적의 심장을 찔렀다. 그리고 어떻게든 임무를 완수하기 위해 힘썼다.
기사들은 곧았다. 그렇기에 전투 패턴이 너무 평이했다. 그것을 이용해 변칙적인 공격을 하면 적들은 속수무책으로 쓰러졌다. 틈 사이로 검을 쑤셔 넣고, 입 안에 독을 넣었다.
“크륵……!”
“억!”
“으아악!”
그러나 이런 전투가 익숙하지 않은 조직원들은 이내 밀려나기 시작했다. 남자는 유리하게 흘러가지 않는 전투 양상을 보며 입을 깨물었다. 전투의 흐름을 바꿔야 했다. 자신들이 이끌어야 했다.
남자는 후회했다. 너무 암살에만 치중되게 교육을 시켰다. 만일 이런 일이 있을 줄 진즉에 알았더라면 아마 군사 훈련도 병행했으리라.
그렇지만 지금은 그런 후회할 시간조차도 사치였다. 이대로 계속 간다면 전멸을 면하지 못할 것이 뻔했다. 절대 전쟁에 쓰고 싶지 않았던 것이지만 이기기 위해서는 해야 했다. 그는 입술을 깨물고는 외쳤다.
“모두 독을 뿌려라!”
암살자는 암살자의 방식으로 싸워야 한다. 조직원들이 품 안에 있던 독들을 던졌다. 독 안개가 사방을 뒤덮었다. 초록색의 안개가 전장에 가라앉았다.
“쿨럭!”
“큭!”
순식간에 전황이 바뀌었다. 적군들이 온 구멍에서 피를 토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안개가 피부에 닿자 괴사하기 시작했다. 그와 동시에 조직원들은 재빨리 해독약을 먹고 얼굴 전체를 가렸다.
이것이 바로 암살자의 전투 방식이었다.
그러나 적들이 독을 사용할 거라고 생각 못 한 지휘관은 당황했다. 그리고 그 당황이 그들의 패착이 되었다. 순식간에 혼란에 빠진 군사들은 급속도로 전황이 무너졌다. 속수무책으로 당하기 시작했다.
적들이 보이지 않는 곳에서 목숨을 빼앗는 암살자. 조직원들은 자신들이 활약할 수 있는 환경을 절대로 놓치지 않았다. 순식간에 검으로 목을 베고, 심장을 찔렀다. 살이 찢기는 소리가 울렸다.
남자는 해독제를 들이켠 후 더욱 활발하게 움직였다. 그의 검이 마치 사신처럼 적들의 목숨을 앗아 갔다. 그는 기척만으로 적들의 움직임을 간파했다. 그의 검에는 이미 피가 한가득 묻어 있었다.
검을 비틀어 적의 심장을 터뜨린 그가 중얼거렸다.
“저 안으로 들어가는 것이 문제인데…….”
이미 그들의 승리가 확실시되어 있는 상황. 시간이 지날수록 독을 흡수하여 쓰러지는 적의 수는 더욱 늘어난 상황이었다. 남은 자들도 거의 억지로 버티고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였고 그들의 얼굴에도 중독 증세가 만연했다.
“이미 진 상황에서 더 버틸 여력이 남아 있나?”
“……닥쳐라.”
지휘관은 검을 들었다. 그는 더 싸울 수 있었다. 그러나 이미 중독된 몸은 무거웠다. 검을 드는 손이 떨렸다. 숨은 턱 끝까지 차올라 말하는 것조차 힘들었다.
남자는 피식 웃었다. 저자는 의미 없는 발악을 하고 있었다. 그것으로 자신의 병사들을 죽이고 자신마저도 죽이고 있었다. 그는 그런 지휘관의 모습이 한심하여 혀를 찼다. 승산 없는 싸움에 자신의 목숨을 걸다니.
그러나 지휘관은 본능적으로 알고 있었다. 자신은 여기서 죽고 또한 반드시 저자를 죽여야만 한다는 것을.
“난 오늘 너를 길동무로 삼을 것이다.”
그는 비웃었다. 검을 들 힘도 없는 자가 자신을 죽이겠다고 나선 것이 가소로웠다. 루카민 타키라이가 죽은 이후 라소니 왕국 최고의 기사로 있던 그는 이름도 알려지지 않은 지휘관을 보며 검을 들고 달렸다.
“히야압!”
검이 맞부딪혔다. 그의 검이 심장을 노렸다. 지휘관의 검이 그의 목을 노렸다. 그들의 검이 부딪히며 불꽃이 튀었다. 그러나 힘에 부쳤던 상대가 밀리기 시작했다.
“넌 여기서 죽는다.”
남자는 그렇게 말했고, 그의 검이 상대의 목을 찔러 갔다. 원통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던 상대는 그에게 저주를 퍼부었다.
“반드시 전하께서 너를…….”
그는 패자의 말 따위에는 관심이 없었다. 검은 상대의 목을 완전히 잘라 냈다. 전장으로 그 목이 데굴데굴 굴렀다. 뿌옇게 차오르던 독 안개가 사라졌다. 이미 대다수가 죽었고, 그의 조직원들은 건재했다.
그러나 그때 뒤에서 한 목소리가 들렸다.
“아직 싸움은 끝나지 않았다, 단쿤 아스트로!”
그 목소리의 주인공은 라이넨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