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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3. 복수의 전장 (84/93)

83. 복수의 전장

항복 문서를 받을 당시, 라이넨은 일부 귀족들이 소집에 응하지 않는 것을 보고 이상하게 생각했다. 분명히 모두들 오라고 했고, 대다수가 왔는데 이상하게 몇 명이 보이지 않았다. 그는 불안한 마음에 문서에 사인을 하고 있는 귀족들에게 말했다.

“몇 명이 보이지 않는다.”

“예?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모든 귀족에게 오라 하였는데 오지 않은 자들이 있다는 말이다.

그는 짓씹듯 말했다. 귀족들의 표정이 창백해졌다. 아무리 귀족이 왕국 안에 별로 없어도 모아 놓고 보면 꽤 숫자가 많았기에 누가 참석하지 않았는가는 쉽게 알 수 없었다.

“아스트로 백작이 보이지 않습니다.”

그때, 귀족 중에서 가장 나이가 많은 귀족이 입을 열었다. 그리고 그녀의 입에서 그 외에도 여러 귀족들이 언급되었다. 그러나 그는 다른 이들보다 아스트로 백작이라는 자가 매우 걸렸다.

“아스트로 백작? 그자는 누구지?”

“단쿤 아스트로 백작으로 최근 휴가를 떠난다면서 다른 왕국에 요양을 갔습니다.”

그 노귀족의 말을 듣던 카니벨라는 미묘한 위화감에 휩싸였다. 매우 낯이 익은 이름이었다. 단쿤 아스트로? 내가 그 이름을 어디서 들어 봤지?

그러나 그녀가 모든 것을 기억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녀가 그렇게 머리를 굴리고 있는 사이, 이번 전쟁에서 라이넨을 따라온 보좌관 한 명이 초상화와 함께 간단한 서류를 내밀었다.

“단쿤 아스트로라는 자입니다.”

라이넨은 초상화를 보았다. 별다른 특징이 없는 자였다. 어디서나 볼 수 있는 흔한 인상. 그는 별생각 없이 초상화를 봤다. 그렇지만 서류를 보고는 이내 표정을 찌푸렸다.

본래 출신이 카시르 왕국이라고? 이곳은 란시엔의 출신지 아닌가?

그는 자신이 너무 과도하게 반응하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먼저 들었지만 이자가 애초에 라소니 왕국 전복을 위해 이곳에 오지 않았을까 하는 의심이 들었다. 그래서 그는 확인을 해 보기로 했다.

“카니벨라, 혹시 이자를 아나?”

그는 그녀에게 단쿤의 초상화를 내밀었다. 그녀는 단쿤이 왕궁에서 쫓겨나기 전 자신을 감시했던 자임을 한눈에 알아보았다.

“알고는 있어. 그런데 왜?”

“이자가 란시엔 공주의 최측근이야.”

“뭐?”

그때, 문득 그녀는 자신이 단쿤을 어디서 봤는지 생각했다. 시스티아 왕국 점령 임무 당시 어디서 많이 들어 본 목소리인 것 같다고 생각했던 간부가 있었다. 그자가 바로 단쿤 아스트로였던 것이다!

“젠장.”

그녀의 몸에서 살기가 일렁거렸다. 억지로 갈무리하려 하지도 않았다. 속으로는 아직도 그녀를 욕하던 귀족들은 그녀의 사나운 기운에 찌그러질 것만 같았다. 맹수 앞에 던져진 것 같은 두려움에 펜을 쥐고 있는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진정해, 카니벨라.”

“……라이넨.”

“일단 누가 없어졌는지 확인했고 저놈들이 다 작성하고 나면 가서 처단하면 돼. 너무 초조해하지 마.”

“알겠어.”

그리고 그녀는 숨을 깊게 들이쉬었다. 살기도 한층 누그러졌다. 숨쉬기가 편안해진 귀족들이 부들거리며 사인을 마쳤다. 그들은 그녀와 눈을 마주치지도 못하고 애꿎은 부채만 계속 만지작거렸다.

얼마 지나지 않아 모든 것이 완료되었다. 그녀는 드레스를 움켜쥐고 부리나케 도망가는 귀족들을 물끄러미 바라보다 고개를 돌렸다. 멀리서 상황을 지휘하고 있는 라이넨의 모습이 보였다.

“이제 어떻게 할 거야?”

“돌아가야지.”

“어느 경로를 이용할 생각인데?”

“바다는 안정적이지만 시간이 오래 걸려.”

“……그렇다면?”

“산맥을 넘을 거야. 이 정도 규모가 이동하려면 시간이 꽤 걸리고 습격 위험도 있겠지만 일단은 도착하는 게 먼저야.”

그건 맞는 소리였다. 그들이 이번에 바다를 이용한 것은 혹시 모를 습격에 대한 염려와 이동의 어려움 때문이었다. 그러나 지금 아레마이에게 더 큰 덫을 놓기 위해 움직인 이상, 빨리 제국에 남아 있는 군대와 합류해야 했다.

이제부터는 시간 싸움이었다.

“지금 바로 제국으로 귀환한다!”

얼추 다 정리가 되자 그는 귀환을 명했다. 군대가 산맥을 넘기 위해 움직였다. 시간이 꽤 소모되었다. 게다가 중간에 아레마이 조직원들의 습격이 있었다. 그렇지만 그들은 적들을 모조리 격파했다.

그리고 마침내 도착했다. 그런 그들의 눈에 보이는 것은 초록빛의 독 안개였다. 그녀의 표정이 굳어졌다.

“저건…… 독 가루?”

그것도 꽤 극독이었다. 저걸 들이켜게 되면 10분도 되지 않아 죽는다. 그녀는 초조한 표정으로 말했다.

“저건 극독이야.”

“뭐라고?”

그는 전장을 쳐다보았다. 저 안개 속에서도 편하게 누비는 아레마이 조직원들과 달리 병사들은 입에서, 귀에서, 코에서, 온몸의 구멍에서 피를 흘리며 고통 속에서 쓰러져 갔다.

‘젠장.’

그는 속으로 생각했다. 어떻게 해야 하지? 그러나 냉정해져야 했다. 지금 무작정 돌파했다가는 개죽음이었다. 아군을 구하려다 같이 죽을 판이었고 이기기는커녕 저들의 승리의 제물이 될 뿐이었다.

그는 입술을 깨물었다. 대책을 생각해야 했다. 그는 그녀에게 저 독이 얼마나 지속되는지 물어보았다.

“……앞으로 대략 5분 정도.”

크게 오래 걸리지는 않겠지만 그쯤이면 이미 병사들 대부분이 죽을 것이었다. 그는 고민했다. 그때 그녀가 입을 열었다.

“절대 지금 가서는 안 돼.”

“어째서?”

“지금 그대로 진격해서는 저 독을 들이마시고 다 같이 죽자고 하는 거랑 다름없어. 그리고 저 안개…… 사라지고 난 후에도 몇 분간은 공기 중에 독성이 있어서 그대로 갔다가는 자살하러 가는 거랑 같아.”

그는 자신의 백성들이 저렇게 고통 속에서 죽어 가는 것을 볼 자신이 없었다. 저걸 계속 볼 바에는 눈을 파 버리고 싶을 정도였다. 그러나 저들을 위해서 지금 그의 뒤에 서 있는 수많은 사람들을 희생시킬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대기하도록.”

그의 인생에서 이토록 길고 긴 10분은 없었다. 그녀는 전황을 살펴보다 독이 사라진 것을 확인하고는 말했다.

“이제 가도 괜찮아. 본때를 보여 주자.”

“그래.”

그 후, 그는 승리의 표정을 짓고 있는 단쿤에게 소리쳤다. 그리고 말을 몰고 가장 앞으로 뛰어나가기 시작했다.

“이랴!”

그녀와 루키에르, 그리고 모든 병사들이 함성을 지르며 라이넨의 뒤를 따라 달렸다. 아레마이는 갑작스러운 그들의 출현에 당황했다. 이미 준비한 독도 다 써 버린 상태에서 저런 대군이 나타나니 어쩔 줄 몰랐다.

“괜찮다! 우리는 아레마이다!”

단쿤은 조직원들을 독려했다. 언제나 승리만 걸었던 그들에게 이것은 승리로 가는 종착지라고 소리쳤다. 그 말에 모두가 기운을 냈다. 암살자로서의 장기는 내지 못하겠지만 1차전 때의 전투 패턴을 익혔기에 아까보다는 싸움이 수월하리라.

“와라!”

단쿤은 소리쳤다. 저들은 자신이 승리할 줄로만 알고 이 전쟁을 일으켰겠지만 승리는 언제나 아레마이에게 있었고 그는 그것을 몸소 느낀 사람이었다. 이번 일도 반드시 그들의 승리일 것이다.

그는 확신했다. 아마 저들은 오늘의 일을 영원히 두고두고 후회할 것이다.

“적을 모두 쓸어 버려라!”

라이넨은 소리쳤다. 창을 들고, 검과 방패를 들었다. 거센 함성에 이때까지 운 좋게 살아남은 병사들 또한 마지막 힘을 쥐어짰다. 그들은 전우의 시체를 밟고 적을 반드시 죽이겠다는 일념 하나로 공격했다.

“이야압!”

무거운 몸으로 내지른 창은 허공을 찌르고 검의 궤적은 엉뚱한 곳으로 나아갔다. 방패는 들 힘도 없어서 미처 다 막지 못한 공격에 그들의 목숨이 사라졌다. 그러나 죽는 그 순간까지 불타오르는 그들의 눈빛에 조직원들은 몸을 떨어야 했다.

“전우들의 복수를 하자!”

“저들에게 죽음의 무서움을 깨닫게 하라!”

마침내 라이넨이 선두에 선 제국군과 아레마이가 충돌했다. 방패가 암기를 막아 냈다. 검은 제국군의 이곳저곳을 베었다. 창은 조직원들의 심장을 관통했다.

“으아악!”

“죽어, 죽으라고오!”

사방에서 비명이 들리고 서로를 반드시 죽이겠다는 일념으로 방출해대는 살기가 퍼져 나갔다. 그리고 그건 카니벨라 역시 마찬가지였다.

“죽어라, 에이니!”

“네년이 감히 대장을……!”

조직원들은 자신들을 배신하고 거짓말을 한 것도 모자라 감히 대장을 납치한 극악무도한 에이니를 죽이기 위해 눈에 불을 켜고 달려들었다.

“닥쳐.”

그들의 말도 안 되는 개소리에 그녀는 입술을 깨물며 대꾸했다. 그녀는 살기를 머금은 검을 높이 쳐들었다.

자신의 삶을 무너뜨리고, 불행에 빠뜨린 것도 모자라 기만하고 영혼을 죽이려고 했던 아레마이를 반드시 없애 버릴 것이라는 그녀의 어마어마한 원한과 일념이 합쳐져 엄청난 에너지가 되어 전신에 흘렀다.

말을 타고 전장을 휩쓰는 그녀는 그 순간만큼은 전쟁의 여신이었다. 그들은 위에서 검을 휘두르는 그녀의 공격을 피하지 못했다. 순식간에 공격을 당한 그들은 눈도 감지 못한 채 죽었다.

동료가 당하자 그들은 뛰어오르며 동시에 품에 숨어 있던 단검을 던졌다. 그러나 그녀 역시 암살자. 암기를 던지며 그와 동시에 검으로 단검들을 모조리 다 쳐냈다.

“……!”

그리고 그 쳐 낸 단검들은 다른 동료의 목과 심장을 향해 날아갔다. 졸지에 아군을 죽여 버린 그들의 표정은 흙빛이 되었다. 그리고 도리어 자신의 몸에 박힌 암기들을 믿을 수 없다는 눈으로 보며 추락했다.

“바보 같은 새끼들.”

그녀는 낮게 욕을 읊조리고는 말을 몰았다. 적들은 그녀의 방해가 되지 못했다. 덤비는 족족 그녀에게 죽어 저승행을 재촉할 뿐이었다. 그러나 그녀는 꽤 초조함을 느끼고 있었다.

‘이 싸움은 결국 간부들이 다 죽어야 끝난다. 그런데 어디에 있는 거지?’

멀리서 아군들을 죽이고 있는 단쿤을 제외한 그 누구도 보이지 않았다. 아무리 찾아도 코빼기도 보이지 않았다.

‘설마?’

그러나 생각을 할 틈은 없었다. 지금은 눈먼 무기들이 날아다니는 전쟁터이고 아직 적이 많이 남았다. 그녀는 라이넨 쪽으로 눈을 돌렸다. 그는 잘 싸우고 있었다.

“황태자를 죽여라!”

“죽이면 우리가 이길 수 있어!”

그는 자신을 향해 덤벼드는 자들을 무심한 표정으로 찔렀다. 그의 검에 속수무책으로 쓰러지는 적들은 시시할 정도였다. 그는 자신의 검에 피를 흘리는 조직원들을 보며 끝나가고 있는 전투를 실감했다.

‘우리가 이기겠군.’

그와 함께 투입된 사람들은 말 그대로 적을 휩쓸고 있었다. 오랜 싸움에 지쳐 있던 조직원들과 달리 체력을 비축하고 있던 그들은 날아다니고 있었다. 승리의 실체가 점점 보이고 있었다.

그러나 언제나 인생은 예상대로 흘러가지 않는 법이었다. 갑자기 단쿤이 품에 있던 폭죽을 터뜨렸다.

펑!

그러더니 갑자기 아군 측에 있던 몇몇 기사와 병사들이 같은 편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

라이넨은 당황했다. 이것은 예상에 없는 일이었다. 아레마이 단원들이 제국에 일부 있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이들이 전쟁에 참여했을 거라는 생각은 하고 있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그들이 전쟁에 참여하지는 않을 거야. 임무 자체도 그러하고 괜한 위험을 감수하려 들지 않을 거야.>

카니벨라 역시 그렇게 말했기에 그는 그에 대해 대비하지 못했다. 정체를 알아차리지 못한 실책이 이렇게 돌아올 줄이야.

‘제길.’

그러나 자책할 틈도 없었다. 갑자기 누군가가 그를 공격했기 때문이다. 그는 재빨리 몸을 기울여 공격을 피했다. 귀족파의 귀족이었다. 그는 비웃음을 날렸다.

“아레마이의 쪽에 붙었다니, 너희도 어지간히 망한 모양이군.”

“닥쳐라. 대장을 위해서라면 무엇이든지 할 수 있다.”

“하하, 무엇이든지?”

“그렇다!”

그는 피식 웃었다. 상대하기 쉬운 놈은 아닐 터였다. 그렇지만 그는 자신 있었다. 저놈은 상대를 잘못 선택했다. 그들에게 쌓인 화는 그를 강하게 만들어 줄 것이고 저놈에게 일격을 선사할 것이다.

카니벨라만큼이나 그는 저들에게 원한이 있었다.

“너희들만 아니었어도 우리는 서로를 오해하지도 않았고 헤어지지도 않았겠지.”

“풋! 그건 대장의 뜻이었다. 모든 것은 대장의 뜻대로 이루어져야 한다.”

“……그 입 닥쳐라.”

저 말도 안 되는 궤변을 계속 듣고 있을 만큼 그는 착한 사람이 아니었다. 그는 자신의 모든 화를 끌어올려 검을 휘둘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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