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4. 누군가의 죽음 (1)
갑자기 아군들을 공격하기 시작한 자들 탓에 카니벨라는 저들을 막기 위해 맹렬히 말을 몰았다. 그녀는 검을 내리치며 저들을 무자비하게 베어 넘겼다. 이렇게 모습을 드러내 준 것은 참으로 고맙지만 수가 꽤 되었다.
‘적어도 5천은 되는 숫자군.’
루미니르 제국은 마법의 존재 때문에 귀족들이 보유할 수 있는 사병의 수가 꽤 되었다. 이번 전쟁에서 귀족들이 대부분의 사병을 끌고 왔었기에 이런 사태가 벌어진 것이다.
‘젠장. 역시 아레마이는 짜증 나서 미쳐 버리겠는 조직이야.’
그녀는 이때까지 쓰지 않고 아끼고 있던 활과 화살을 들었다. 그녀는 훈련 당시 에이스이자 기대주였기 때문에 여러 가지 훈련을 받았었는데 활쏘기가 그중 하나였다. 그녀는 아레마이가 자신을 혹독하게 훈련시킨 것을 후회하게 만들 참이었다.
그녀는 검을 검집에 넣었다. 그리고 전장을 살폈다. 마침 그녀의 눈에 라이넨과 싸우고 있는 귀족이 보였다. 질 것 같아 보이지는 않았으나 쉽사리 승기를 잡고 있지는 못하고 있었다. 그녀는 그자에게 활을 쏘았다.
그리고 파공음과 함께 화살이 쏜살같이 날아와 손등에 박혔다.
“크…… 윽!”
라이넨이 그녀를 쳐다보았다. 그는 약간 아쉽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녀는 문득 그가 스스로의 힘으로 그자를 상대하고 싶어 했다는 느낌이 들었다.
“죽어라!”
그녀는 그에게 사과를 하고 싶었으나 자신에게 덤벼드는 적들이 많았다. 그녀는 기민한 자세로 말 위에서 중심을 잡으며 빠르게 활을 조준하고 쏘았다. 그들은 머리, 목, 심장에 활을 맞고 죽었다.
그리고 그녀는 또한 독을 발랐다. 암살자에게는 암살자의 방법으로 상대해야 한다. 그녀는 그들에게 독화살을 쏘았다. 어디 너희도 너희가 그렇게 자랑하는 독에 죽어 보지 그래.
“으악!”
“끄르륵!”
그녀의 화살을 맞은 자들이 거품을 물고 쓰러졌다. 해독제도 다 떨어진 상황에서 그들이 맞이할 수 있는 것은 죽음밖에 없었다.
그녀는 활을 들고 일방적으로 그들을 학살했다. 일부가 적군으로 돌아선 상황이지만 문제는 없었다. 애초부터 그들이 전장을 주도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그런 상황에서 얼마 되지 않은 수가 적이 되었다고 해서 승기를 뺏길 수는 없는 것이다.
루키에르는 멀리서 활과 화살로 적들을 죽이고 있는 카니벨라를 보며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그녀는 그의 도움이 필요하지 않은 사람이었다. 그런데 그런 그녀를 위해 그가 무엇을 할 수 있단 말인가.
심지어 그녀는 그를 마치 없는 사람 취급했다. 말을 걸면 대꾸는 해 주었지만 그녀에게 있어 그의 존재감은 공기나 다름이 없었다. 심지어 그녀는 전투도 잘했다. 그야말로 못하는 것이 없었다.
‘젠장.’
그때의 도움은 그저 라이넨과 라이부스를 보호하기 위해 받아들인 것이었다. 그는 뭔가 자괴감이 들었다.
‘이럴 때가 아니다.’
전장. 기사였던 그는 전쟁터에서 쓸데없는 생각을 하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 일임을 잘 알고 있었다. 그는 혹여나 나중에 그녀가 위험에 처한다면 가야겠다는 생각을 하며 대검을 들었다.
“도망쳐!”
“으아악!”
이 대검을 들고 얼마나 많은 조직원들의 목을 베어 버렸는가. 그랬기에 그의 공격에 모두들 도망가기 바빴다. 그러나 이미 전쟁은 장기화되고 있는 상황이었다. 서로가 지쳐서 도저히 공격을 할 상황이 아니었다.
‘밤이기 때문에 더 이상 전투를 지속하기가 어려워.’
단쿤은 일단 후퇴하기로 했다. 조직원들의 대부분이 죽었기에 더 이상 전투를 할 수 있는 사람들이 없었다. 그는 어쩔 수 없이 폭죽을 하나 더 터뜨렸다.
펑!
“후퇴하라!”
단쿤은 후퇴 명령을 내렸다. 조직원들이 어둠 안에 녹아들었다. 라이넨은 어둠을 응시하며 싸움을 끝내준 단쿤에게 고맙다고 생각했다. 그의 병사들도 지친 상황이기에 여기서 더 싸웠다가는 전쟁의 양상이 어떻게 달라질지 몰랐다.
“우리도 후퇴한다.”
그는 사상자들을 수습해 국경선 안으로 들어갔다. 그녀는 저들을 노려보았다. 내일은 반드시 결판을 낼 것이다.
국경선 안에는 작은 마을이 있었다. 라이넨은 직접 마을 촌장에게 양해를 구하고 군대를 안으로 들여보냈다. 오랜만에 마을에는 활기가 가득 불어닥쳤다. 마을 사람들은 병사들에게 맛있는 음식을 대접해 주고 잘 곳을 마련해 주었다.
‘단쿤 그자는 내일 어떻게 싸울 생각이지? 이미 그 이상의 조직원들이 남아 있지 않을 텐데…….’
그러나 카니벨라는 고민에 빠졌다. 오늘 싸움을 다 끝내지 못한 것이 마음에 걸렸다. 저들이 어떻게 다시 반격해 올지 예상이 되지 않았다. 그녀는 한숨을 쉬었다. 쉬어야 한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쉴 수가 없었다.
“마마, 무엇을 하십니까?”
루키에르가 옆에 섰다. 그녀는 그를 무심히 바라보았다. 란시엔에 대한 원한이야 이해하지만 굳이 이렇게까지 도움을 줄 필요가 있는지 알 수 없었다. 그렇지만 그녀는 그걸 삼키고 무심하게 말했다.
“단쿤 아스트로 그자의 꿍꿍이에 대해 생각해 보던 중이었다.”
“꿍꿍이…… 말씀이십니까?”
“그래. 지금 얼마 남지도 않은 인원을 가지고 무엇을 할지 모르겠어. 항복 선언을 하지 않는 게 수상하다고.”
게다가 간부들 대부분이 전쟁에 불참한 상황이었다. 그러니 불안해서 어쩔 줄 모르는 수밖에.
루키에르는 단순해서 제대로 된 대답을 해 줄 수는 없었다. 그러나 그는 단순한 만큼 상황을 단순하게 생각하는 능력이 있었다. 그는 잠시 생각을 한 후 어깨를 으쓱거리며 그녀에게 말했다.
“혹시 인원 충원을 할 생각이 아닐까요?”
“그럴 리가. 이번 전쟁에 조직원들 대부분이 투입되었어. 그런 상황에서 보충할 인원이 있을 리가…….”
“그것까지는 모르겠습니다만, 도움을 청할 곳이라도 있겠죠.”
“도움?”
무언가가 생각날 듯했다. 그녀는 한참 동안 도움이라는 단어를 읊조리다가 무언가가 번개처럼 생각이 났다.
“고마워 루키에르!”
그녀는 그렇게 말하고는 라이넨이 있는 곳으로 달려갔다. 그런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루키에르는 처음으로 자신이 그녀에게 도움이 되었다는 사실에 뿌듯해졌다. 앞으로도 계속 이런 관계를 유지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라이넨!”
그런 루키에르의 생각을 알지 못한 채 그녀는 마침 대화를 하고 있는 라이넨에게 달려갔다. 그는 무엇인가가 생각이 났다는 그녀의 표정을 보자 반드시 꼭 들어야 한다는 직감이 들었다. 그는 대화를 중지한 채 그녀에게 다가갔다.
“무슨 일이야?”
“내일 아레마이가 레미우스 왕국과 시스티아 왕국을 끌어들일 것 같아.”
“뭐라고?”
그는 깜짝 놀랐다. 그들이 아레마이의 수중에 있기에 그럴 수도 있지는 않을까 염려는 했지만 진짜로 그럴 수도 있다는 말에 머리가 아파 왔다.
“아레마이는 대부분 전멸했지. 그렇지만 아직 간부들은 죽지 않았고, 아레마이가 끌어들일 수 있는 패는 많아.”
“…….”
“그렇기에 아주 틀린 추측은 아니라고 생각해. 아까 폭죽을 쏘아 올린 것도 그들에게 이곳으로 오라는 신호일 수도 있어.”
“그렇다면…….”
“우리도 재정비를 해서 그들에게 대항할 수 있도록 해야 해.”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의 말은 일리가 있는 말이었다. 아무리 아레마이가 뛰어난 실력을 가지고 있어도 현재 대부분 전멸한 상태였다. 그리고 암살자들과 기사들이 싸우는 방식 자체가 너무 달랐다.
그렇지만 그들이 레미우스 왕국과 시스티아 왕국의 군대를 데리고 온다면 상황이 달라진다. 일단 지금 루미니르 제국군과 저들이 데리고 온 군대의 규모가 비슷해진다. 그리고 암살자들은 저들 사이에 숨어 조용히 적들을 처단하겠지.
게다가 아레마이가 그 나라들을 정복하면서 레미아치 가문이 정보를 제대로 수집할 수 없었다. 그녀의 말에 일리가 있기에 그는 고맙다는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네 의견을 회의에 반영해 볼게.”
“부탁할게.”
“아, 맞다. 라이문타 영애는 무사해?”
“그래, 지금 무사히 귀환하고 있어.”
“전쟁을 겪어 본 적이 없기에 많이 놀랐을 거야. 나중에 위로해 줘.”
“……그래.”
카일라의 선언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자신이 라이넨과 함께할 수 있을 것이라고 딱히 생각하지 않았다. 그 물음에 그는 고저 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렇지만 표정은 어두웠다.
“나 먼저 갈게.”
그녀는 일부러 회의 내용을 듣지 않겠다는 듯 가 버렸다. 그는 일단 전쟁 상황에 집중하기로 했다.
“회의를 시작하지.”
그는 대책 마련을 위한 회의를 시작하였다. 반드시 아레마이를 이 대륙에서 멸절시켜 버리겠다는 모두의 열망이 회의장을 뜨겁게 달구었다.
* * *
“이건 뭐 압도적인 패배군.”
“게다가 우리를 기만하기까지 했어.”
“이번에는 우리 또한 전쟁에 나서겠어.”
“짜증 난다, 저놈들. 반드시, 죽인다.”
레미우스 왕국과 시스티아 왕국의 모든 군대를 이끌고 다른 간부들이 집결했다. 단쿤은 골치가 아팠다. 왜 이들이 왔냐 이 말이다.
“왜 왔나.”
“우리가 전투를 할 줄 모른다고 해서 너 혼자 독식하지는 말란 말이야.”
“너희를 다 감당하기 귀찮기 때문이다.”
단쿤의 차가운 말에 칸나가 비웃으며 대꾸했다.
“우린 슌카린이 아니야. 흥분해서 날뛰다가 개죽음당할 사람들은 아니란 말씀.”
단쿤은 칸나의 비아냥거림에 입을 다물었다. 슌카린은 결국 과다 출혈로 죽음을 맞이했다. 진짜, 그야말로 개죽음이었다.
“내 인생에 그놈이 죽는 걸 보게 될 줄이야, 정말 의미가 깊어.”
“부대장님께서 그리 허무하게 가시다니…….”
키슌은 그런 슌카린의 죽음을 비웃었고 시카온은 받아들일 수 없다는 듯 중얼거렸다. 그러나 지금은 그렇게 서로에게 비수를 꽂을 시간이 아니었다. 단쿤은 과열될 것 같은 분위기를 진정시켰다.
“지금은 그럴 때가 아니다. 어떻게 싸울지 생각해야 한다.”
“작전은 있어?”
“있다.”
그는 시스티아 왕국군이 가지고 온 무기들을 쓱 훑어보고 작전을 하나 세웠었다. 그는 그들에게 자신이 생각한 계획에 대해 설명하기 시작했다. 그들의 얼굴에서 서서히 웃음꽃이 피기 시작했다.
“좋은데?”
“네 말대로 된다면 정말 승리할 수 있겠어.”
승리는 바로 우리 아레마이의 것이다!
다음 날 아침이 되었다. 카니벨라는 눈을 떴다. 어제의 격렬한 전투의 여파로 인해 몸이 다소 쑤셨지만 견딜 만했다. 그리고 그 아픔을 잊게 만드는 것은 바로 저들에 대한 복수심과 빨리 전쟁을 끝내고 싶은 열망이었다.
‘빨리 라이지가 보고 싶어.’
치료를 받고 눈을 떴을 때 잠시 본 이후로는 바빠서 아이의 얼굴을 보지 못했다. 아이들은 자주 보지 않으면 얼굴을 잊어버린다던데 내 얼굴을 잊어버리면 어떡하지? 그녀는 불안함에 계속 서성거렸다.
“뭐 해?”
“아, 그냥 갑자기 빨리 돌아가고 싶어서.”
“이제 나가야 해.”
마지막 전쟁이었다. 아레마이의 종말을 고하고 그들이 승리할 수 있는 마지막 전쟁. 그는 군대를 이끌고 국경선 밖으로 나갔다. 이미 단쿤을 포함한 간부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그는 각오를 다지고 있는 사람들을 향해 소리쳤다.
“전군 진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