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7. 제자리로 돌려놓다
겨울은 빨리 왔다. 황제는 겨울이 오자 바로 제국 안에 기생충처럼 침입해 있던 아레마이 단원들을 처형한다고 선포했다. 백성들은 약속된 날짜가 되자 모두 광장으로 모였다.
“저놈들을 죽여라!”
“당장 죽여!”
황제는 사형수들에게 돌을 던지고 욕설을 내뱉는 군중들을 진정시켰다. 그리고 곧장 사형은 집행되었다. 그들은 목이 베였고, 그들의 목은 데굴데굴 굴러 바닥으로 떨어졌다. 머리를 잃은 몸은 부들부들 떨다가 쓰러졌다.
드디어 제국을 어지럽히던 자들이 죽었다는 사실에 군중들은 기뻐했다. 그러나 황제는 아직 끝나지 않은 일에 한숨을 쉬었다. 아직 처형해야 할 자들이 한참 남은 것도 모자라 아레마이가 벌인 일에 대한 수습도 해야 했다.
‘왜 일은 저들이 벌여 놓고 수습은 우리가 해야 하는지.’
시스티아 왕국은 감투에 집착하는 왕의 치세로 인해 거의 망해 가고 있었고, 레미우스 왕국은 이지가 없는 왕의 통치로 나라 자체가 굴러가지 않았다. 그리고 라소니 왕국은 왕이 아예 없는 상황이었기에 이도 저도 못 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제국은 이미 땅이 넓었다. 그랬기에 굳이 저들을 정복해야겠다는 필요성은 느끼지 못했다. 그리고 그 무엇보다 땅이 넓어지면 결계를 크게 쳐야 하기에 드는 마력 양도 늘어난다.
“라소니 왕국은 이미 저희의 속국이나 다름없는 상황입니다. 그렇다면 저희 쪽에서 왕을 정해서 그 나라를 다스리도록 하면 될 것 같습니다.”
라이넨은 카니벨라를 위해 라소니 왕국을 멸망에 이르게 할지언정 그렇다고 아예 없애 버리지는 않았다. 혹시라도 그녀가 마음 아파하지 않을까 배려한 것이었다. 그러나 그녀는 딱히 신경 쓰지 않았다.
“그렇다면 누가 가는 것이 좋겠느냐? 친 황태자파가 좋지 않겠느냐.”
“생각해 두던 사람이 있습니다.”
황제의 말에 그는 고개를 까딱했다. 그러자 한 여인이 문을 열고 들어왔다. 라이문타 가문의 유일한 직계, 카일라였다. 그녀는 황제에게 인사했다.
“폐하, 저를 라소니 왕국으로 보내 주시옵소서.”
“어째서냐.”
“전 황태자 전하의 파벌입니다. 그리고 전 이제 라이문타 후작이지요.”
이번 전쟁 때문에 수많은 사람들이 희생되었다. 그리고 카일라는 라이문타 가문을 물려받아 후작이 되었다.
그렇지만 그녀는 그 자리에 만족할 수 없었다. 더 높은 곳에서 세상을 바라보고 싶었다. 그래서 왕국의 여왕이 되는 것은 그녀에게 있어 좋은 기회였다.
‘제가 의무를 다할 수 있도록 허락해 주십시오!’
황제는 카일라의 눈빛에서 열망을 보았다. 이미 카니벨라는 라소니 왕국의 왕족으로서 모든 권리를 포기한 지 오래였고, 오히려 카일라가 라소니 왕국을 다스린다는 이야기에 긍정적인 반응을 보였다.
<카일라, 제가 하지 못했던 일을 당신이 해 주세요. 라소니 왕국을 잘 부탁드립니다.>
황제는 무거운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저들은 네가 루미니르 제국 출신이라는 이유만으로 배척할 것이다.”
“괜찮습니다.”
“그리고 이때까지 경험해 보지 못한 수많은 것들이 너를 짓누르고 책임을 강요할 것이다.”
“괜찮습니다.”
“그래도 넌 도망치지 않고 이 일을 감당해 낼 수 있겠느냐?”
“자신 있습니다.”
“그래, 그렇다면 네게 자리를 허락하마.”
“감사합니다.”
카일라는 황제에게 절을 했다. 황제는 마치 친딸이 긴 여행을 떠나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러나 이것은 그녀가 선택한 길이기에 말없이 응원해 주기로 했다.
“너에게 언제나 신의 가호가 함께하기를 바란다.”
“폐하, 무강(無疆) 하시옵소서.”
그녀는 자신이 원하는 새로운 길을 향해 나아갔다. 황제와 라이넨은 카일라가 라소니 왕국을 어떻게 부강한 나라로 만들 수 있을지 기대가 되었다. 이제 라소니 왕국은 새로운 강국이 될 것이다.
* * *
한편, 카니벨라는 에리칼과 협력하여 아레마이 간부들이 머물렀던 장소들을 수색했다. 다른 왕국들의 지부들을 모두 수색하여 아레마이의 정보들을 모조리 빼냈다.
‘정말이지 이건 할 짓이 못 되네.’
그녀는 한숨을 쉬었다. 왜 아레마이가 저지른 일에 대한 수습을 그녀가 해야 하는지. 란시엔은 정말로 그녀의 인생에 도움이 되지 않는 사람이었다.
“이게 다입니까?”
“네, 그렇습니다.”
그렇지만 수많은 시간을 쏟아부은 끝에, 그녀는 아레마이의 어마어마한 자료를 손에 넣을 수 있었다. 이제 이걸로 혹시라도 남은 잔당들을 다 쓸어 버리고 또한 그녀가 원하는 마약 해독제를 만들 수 있게 되었다.
‘미안합니다. 너무 오래 걸렸습니다.’
그녀는 예전에 자신으로 인해 인생이 망가져 버린 레미우스 왕국의 꼭두각시 왕 유키르를 반드시 구해 내겠다고 다짐한 적이 있었다. 다행히 그녀에게 그 기회가 왔고, 그것을 반드시 이루어내기 위해 두 나라를 왔다 갔다 하며 고군분투했다.
“이제 돌아갑시다.”
이제는 돌아가서 약을 만들기만 하면 되었다. 만들기만 하면 유키르에게 사죄할 수 있었다.
‘반드시.’
아레마이는 그녀에게 여러 가지 상흔을 남겼다. 그리고 그녀는 그들과 동참했다는 이유로 그들의 모든 죄업을 받았다. 그녀는 돌아가자마자 아레마이의 서류를 통해 학자들과 연구해 가며 해독제를 만들었다.
“이 공식대로 만들었는데 왜 이렇게 된 건지 잘 모르겠군요.”
학자들은 골머리를 썩었다. 쉬울 것 같은 연구는 끝나지 않았다. 도대체 어떻게 되어 먹은 약이기에 해독제가 없단 말인가.
그녀는 입술을 깨물었다. 그렇지만 그녀가 라이넨과 재회하면서 느낀 점은 희망이라는 것은 작게나마 존재한다는 것이었다. 그녀는 서류를 다시 한번 샅샅이 훑어보았다.
“혹시 이렇게 한다면……?”
그녀는 그렇게 말하며 약물을 아주 적게 넣었다. 그러자 마약과 반응하며 그 성분이 흩어지는 것이 보였다.
“오! 이렇게 하면 되겠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해독제가 완성이 되었다. 그녀는 황제의 허락을 받아 레미우스 왕국 안에 있는 아레마이 잔당을 해치우기 위한 파견단으로 가게 되었다. 그녀와 외양이 비슷한 여인이 초점 없는 눈으로 옥좌에 앉아 있었다.
‘죄송합니다.’
입 안이 썼다. 직접 보니 더 참혹했다. 저것은 그녀가 저지른 죄의 결과물이었다.
“폐하께서 함께 차를 마시고 싶어 하십니다. 안으로 들어오십시오.”
그녀는 시녀의 안내를 따라 정원에 들어갔다. 다과가 잔뜩 있는 테이블 앞에 유키르가 앉아 있었다. 그녀는 품에 있는 해독제를 만지작거렸다. 시녀는 유키르의 곁에 서서 그녀가 먹을 다과들을 입으로 먹여 주었다.
“제가 할게요.”
그녀는 그렇게 말하며 시녀를 물렸다. 그리고 시녀가 고개를 돌린 사이 해독제를 유키르의 차 안에 넣었다.
“맛있는 홍차입니다. 마셔 보세요.”
유키르는 느릿하게 고개를 끄덕이고는 그녀가 먹여 주는 차를 마셨다. 차를 마실수록 초점이 또렷해졌다. 그녀는 해독제가 잘 들고 있다는 사실에 안도감을 느꼈다. 그러나 유키르는 정신을 차릴수록 자신이 어디에 있는지 혼란스러워했다.
“여, 여기는 어디? 당신은 누구죠?”
“진정하세요.”
그렇게 말하며 그녀는 유키르에게 있던 모든 일에 대해 말해 주었다. 자신 때문에 혼인 대용으로 이 왕국에 팔려 왔고, 아레마이의 도구로 사용되었다는 일까지 상세하게 설명해 주었다.
“뭐라고요……?”
유키르는 처음에는 의아해했다가 나중에는 경악했고, 마지막에는 울부짖었다. 자신에게 일어났던 모든 일들이 하나씩 생생하게 기억났기 때문이다. 그녀는 눈을 감으며 잠자코 유키르가 내릴 처벌을 기다렸다.
그녀는 자신을 죽이는 것만 아니라면 무엇이든 감내할 자신이 있었다. 욕을 하더라도, 침을 뱉더라도, 때리더라도, 모두 다 감내할 수 있었다.
“흑흑…….”
그녀는 정확하게 모든 일을 다 알지는 못했다. 그렇지만 지금 유키르가 느끼고 있을 절망에 대해서 어느 정도는 알 수 있었다. 자신도 아레마이에게 놀아났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 그 이상의 절망을 느꼈었으니까.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그녀는 무릎을 꿇고 유키르가 그녀의 말을 들을 때까지 계속해서 사과했다. 한참의 시간이 흐른 후 유키르가 진정되었다. 유키르는 자신의 앞에 무릎을 꿇고 있던 그녀를 일으켰다.
그녀는 엉거주춤한 자세로 자신을 일으킨 유키르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잘못한 사람은…… 란시엔 공주와 아레마이라는 조직이지 당신이 아니에요.”
“……!”
그 말에 갑자기 그녀는 눈물이 났다. 유키르는 그녀를 용서해 준 것이었다. 이때까지 가시넝쿨처럼 뻗어났던 죄책감이 한 번에 잘려 나갔다. 그녀는 눈물을 흘리며 감사하다고 중얼거렸다.
유키르는 그런 그녀를 말없이 안아 주었다. 그렇게 한참 동안 울던 그녀는 품에서 벗어났다. 유키르는 그녀에게 눈물을 닦아 줄 손수건을 내밀며 웃어 주었다. 그녀는 그 웃음이 참으로 슬프다고 생각했다.
“이제 어떻게 하실 생각이십니까?”
“비록 제 의지로 인해 이 나라의 왕이 된 것은 아니지만 책임을 져야죠.”
“…….”
“전 제 영지에 있을 때 해 보고 싶었던 일이 많았어요. 이 나라에서 제가 생각했던 정책들이 실현된다면 참으로 행복할 거 같아요.”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것이 유키르의 의견이라면 그녀는 그것을 존중해 줘야 했다. 그녀는 왕궁에 며칠 더 머무른 후에 제국으로의 귀환을 위해 짐을 쌌다.
“좀 더 있어도 괜찮은데 아쉽네요.”
“그러게요. 제가 할 일이 좀 많아서 갈 수밖에 없다는 게 참 아쉽습니다.”
“다음에는 더 오래 머물도록 해요. 준비해 놓을게요.”
“감사합니다.”
레미우스 왕국은 줄곧 후진국의 위치에 있었다. 그렇지만 지금 이 순간부터 날개를 달고 훨훨 날아갈 것이었다. 그녀는 그날이 오기를 진심으로 바랐다.
* * *
그녀는 제국으로 귀환했다. 들어가는 와중에 시스티아 왕국에 해독제를 전해 준다는 이야기를 들었으나 신경 쓰지 못했다. 지금부터 그녀는 자신의 하나밖에 없는 딸 라이지에게 진실을 말해 줘야 했다.
“이모, 오랜만이야!”
오랜만에 아이를 보니 기분이 이상했다. 아이의 웃음에 심장이 바늘로 찔리는 것 같은 통증이 일었다. 또 다른 죄책감의 가시넝쿨이 그녀의 마음에 피를 내고 있었다.
“……잘 지냈니?”
아이는 그녀를 잊어버리지 않았다. 그녀는 그것이 고마웠으나 그래서 더 무서웠다. 이 아이가 진실을 알았을 때 어떤 반응을 보일지 예상하지 못했다. 왜 자신을 속였냐고 원망하면 어떡하지?
괜찮아요, 무서워하지 말아요.
마리가 눈빛으로 그녀에게 말해 주고 있었다. 그녀는 마리를 멍하게 바라보았다. 그때, 문이 열리며 라이넨이 들어왔다. 아이는 그를 반겼다. 그의 눈이 슬프게 웃고 있었다.
“우리 라이지, 이모 보고 싶었어?”
“응!”
그렇게 말하며 아이는 그녀에게 안겨들었다. 그녀는 아이를 꼭 안은 채 물었다.
“라이지, 예전에 엄마보다 이모가 더 좋다고 말했던 거 기억나니?”
“응!”
축제 때 라이지와 함께 구경을 갔을 때 그렇게 말했었다. 그녀는 그때 당시에 희망을 품었다. 이 모든 것이 끝나면 아이와 함께 살 수 있을 것이라고. 그러나 막상 그때가 오자 그녀는 겁이 났다.
“이모가 엄마였으면 좋겠다고 말했던 것도 기억나지?”
그녀는 아이에게 계속 말을 걸었고, 아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이제 아이의 삶을 기만했던 진실에 대해 말해 주어야 했다.
“미안해, 라이지. 이모가 사실은…… 네 엄마야.”
“응?”
“라이지는 내가 배 아파 낳은 딸이야. 이때까지 사정이 있어서 마리 이모에게 맡겼어.”
그녀는 너무나도 죄가 많은 사람이었다. 그래서 한 사람의 인생을 나락으로 떨어뜨려 버렸고, 아이가 친엄마의 사랑을 받고 자라지 못하게 만들었다. 품에 안겨 있는 아이는 어떤 표정을 짓고 있을까?
차마 아이의 눈을 볼 수 없어 그녀는 아이를 꼭 껴안았다. 그리고 얼굴을 떨구었다. 심장이 벌렁벌렁 뛰고, 입이 바짝 말랐다.
“미안해, 아가야.”
그녀는 계속해서 그 말을 되풀이했다. 마리는 그런 그녀의 얼굴을 안타깝게 바라보았다. 지금 아이의 표정을 본다면 그런 말을 하지 않아도 괜찮을 텐데.
“미안해.”
그러나 라이지는 그 말이 너무나도 듣기 좋았다. 줄곧 내 엄마가 되어 주었으면 하는 이모가 사실 진짜로 내 엄마란다. 기분이 좋았다.
아이는 그녀의 모든 걱정이 무색할 정도로 밝은 목소리로 말했다.
“난 이모가 우리 엄마라서 좋아!”
“그래……?”
“응, 난 이모가 너무 좋아! 그래서 이제 이모랑 영원히 같이 살 수 있어서 좋아!”
아이는 그녀를 쉽게 받아 주었다. 그녀는 미안했다. 애초에 이런 일을 겪게 하지 않은 게 더 좋았는데. 그런데도 넌 날 이해해 주고 그저 내가 네 친엄마라는 이유로 내 죄를 끌어안아 주는구나.
그녀는 아이의 말에 눈물이 흘렀다. 최근에 왜 이렇게 자주 우는지 모르겠다. 그때, 라이넨이 다가왔다. 아이는 자신과 눈을 맞춘 라이넨을 보며 말했다.
“그럼 아저씨가 아빠야?”
“……그래, 네 아빠란다.”
그는 눈물을 먹은 목소리로 말했다. 마침내 가족이 모두 모였다. 마리와 루카스는 그런 가족 상봉을 감동 어린 표정으로 바라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