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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8. 절망 (89/93)

88. 절망

모든 것이 끝났으나 아직 란시엔을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에 대한 것이 남아 있었다. 카니벨라는 황제에게 독대를 청했다. 황제는 그녀의 요청을 순순히 받아 주었다.

“네가 나를 먼저 부르다니 의외구나.”

“란시엔을 어떻게 하실 작정이십니까?”

그녀는 거두절미하고 물었다. 황제가 지금 당장 란시엔을 죽이겠다고 하면 곤란했다. 그녀는 반드시 란시엔에게 들어야 할 것이 있었다.

“봄이 오면 사형하려 한다.”

그녀는 밖을 바라보았다. 눈이 거세게 내리고 있었다. 그녀는 한때 겨울을 싫어했다. 그녀의 비극은 겨울에 자주 일어났으니까. 그러나 지금 내리는 눈은 마치 그녀의 행복을 빌어 주는 것 같았다.

“제가 다시 한번 만나 볼 수 있겠습니까?”

“그러도록 해라.”

그녀는 혹시나 황제가 반대할 것에 대비해 준비해 놓은 말들이 있었다. 그러나 그것이 무색하게 황제는 너무나도 쉽게 허락의 말을 내뱉었다. 그녀는 고개를 숙이며 감사함을 표했다.

“……아니다.”

황제는 뭔가 더 하고 싶은 말이 있어 보였다. 그러나 그녀는 그저 빨리 란시엔을 빨리 만나 이야기를 할 생각에 서둘러 미처 보지 못했다. 황제는 그녀에게 수면을 깨울 수 있는 약을 주었다.

“그럼 실례하겠습니다.”

그녀는 황제에게 인사를 하고 사라졌다. 방문을 여니 카샨이 기다리고 있었다. 그녀는 그녀에게 열쇠를 내밀었다.

“여기.”

“고마워요.”

이미 황제의 비밀 감옥이 어디에 있고, 그 구조가 어떻게 되어 있는지는 파악하고 있었다. 그랬기에 그녀는 고맙게 열쇠를 받아 들고 지하로 향했다.

“황제 폐하의 허락을 받고 왔습니다.”

란시엔이 갇힌 감옥 안을 지키고 있던 간수들이 그녀의 인사를 받았다. 몇 달 전에 잠시 깨어났던 란시엔은 그 이후 계속 잠들어 있었다. 그리고 깨어나지 않았다.

저 평안한 얼굴을 보자 속이 뒤틀리는 것 같았다. 지금 당장에라도 검을 뽑고 싶었다. 죽여 버리고 싶었다. 여기서 당장 더 뻔뻔한 낯짝을 주먹으로 갈겨 버리고 싶었다.

그녀의 인생을 힘들게 만든 원흉. 그녀의 모든 비극을 제공한 자. 그녀를 기만하고 그것을 비웃은 자…….

그녀가 란시엔을 죽일 이유는 차고도 넘쳤다. 그렇지만 참았다. 그녀는 란시엔에게 듣고 싶은 말이 있었다.

‘짜증 나.’

예전처럼 볼 때마다 두렵지는 않았지만 여전히 란시엔을 보는 것은 불쾌했다. 그냥 빨리 모든 일을 처리하고 라이지에게 가고 싶었다.

그녀는 간수들에게 먼저 란시엔을 의자에 묶으라고 지시했다. 그리고 황제가 준 약을 란시엔에게 먹였다. 란시엔은 곧장 깨어났다.

“이제 일어났어?”

“이익! 닥쳐!”

“내가 왜 다시 왔는지 알겠지?”

“네, 네년……!”

그녀는 란시엔에게 비아냥거리며 약 올렸다. 이때까지 란시엔이 그녀를 괴롭힌 것에 비해서는 한없이 작은 놀림거리에 불과했지만, 란시엔의 얼굴은 분노로 새빨개졌다. 그녀는 무심하게 대꾸했다.

“네가 나한테 한 것에 비해서는 턱없이 유치하고 티끌 정도의 수준인데 그것도 못 견뎌서 지금 나한테 화내고 있는 거야?”

그러나 란시엔에게 있어 그건 분노의 방아쇠를 당기는 발언이었다. 평소에 그녀를 무시하고 열등감을 가지고 있던 란시엔은 거칠게 화를 냈다.

“네 따위가 감히 지금 나에게 그런 소리를 하는 거야? 언제나 내 발밑에서 뒹굴었던 주제에!”

그 말에 그녀 또한 표정이 굳었다. 그녀는 살기를 억누르지 않았다. 싸늘하게 일갈했다.

“그 입 닥쳐. 지금 네가 멀쩡히 살아 있는 이유는 내가 극도로 인내하고 있기 때문이야.”

“그, 그건.”

“거기서 한마디만 더 해 봐. 안 그럼 사형이고 나발이고 내가 직접 널 죽여 버릴 거니까.”

그녀는 얼굴이 새파랗게 질린 채 벌벌 떨고 있는 란시엔을 보며 피식 웃었다. 다시 약 올릴 시간이었다.

“이제 조직은 산산조각 났어. 남은 사람은 너밖에 없어.”

“……!”

란시엔의 눈이 커지고 턱이 떨렸다. 현실을 부정하고 싶은 것 같았다. 그러나 그녀는 멈출 생각이 없었다.

“레미우스 왕국은 제대로 된 통치자를 되찾았고, 라소니 왕국은 라이문타 왕국으로 바뀌었지.”

유키르는 여렸지만 똑 부러지고 당차 보였다. 앞으로 왕국을 잘 이끌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카일라는 여왕이 되자마자 왕국의 이름을 라이문타 왕국으로 바꾸었다. 자신의 뿌리가 라이문타 가문임을 잊지 않기 위함이었다.

“…….”

란시엔은 마치 영혼을 잃어버린 것 같은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거짓말하지 말라고 소리쳤다.

“내가 거짓말을 왜 해. 현실 부정하지 마.”

“아아악!”

그것도 모자라 소리를 질러댔다. 눈에서 불이 튀겼고, 언뜻 드러나는 광기에 그녀는 질색했다. 그놈의 아레마이가 뭐라고 저렇게까지?

“죽여 버릴 거다!”

란시엔은 마지막으로 발악했다. 그녀는 네가 어떻게 나를 이길 수 있냐고 비웃었다. 그 말에 란시엔은 입을 다물었다.

애초에 란시엔은 머리를 쓰는 사람이지 몸을 움직이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렇지만 그에 반해 카니벨라는 루카민이 가르쳐 준 검술과 아레마이의 암살 훈련을 받으며 웬만한 기사들보다 실력이 더 뛰어났다.

“네가 힘으로 나를 이길 가능성은 없어.”

란시엔은 그녀의 말에 입술을 깨물었다. 치욕스러웠고, 자신보다 아래로 봤던 사람에게 그런 말을 들으니 미쳐 버릴 것만 같았다. 입술을 깨물고 있는 란시엔의 모습을 보며 그녀는 입을 열었다.

“물어볼 것이 있다.”

“물어도 절대 말 안 해 줄 거니까 닥쳐!”

그녀는 손으로 란시엔의 볼을 꽉 쥐었다. 란시엔은 그녀의 손에서 느껴지는 어마어마한 악력에 뺨이 찌그러지는 것만 같았다. 그녀의 눈에서 불똥이 튀었다. 그녀는 란시엔에게 사납게 속삭였다.

“닥쳐, 그걸 정하는 건 나야. 넌 그냥 대답만 해.”

란시엔은 두려움에 떨었다가 거칠게 고개를 돌렸다. 내가 두려움에 떨었다고? 저 카니벨라에게? 그것을 인정하기 싫었던 란시엔은 입술을 깨물었다.

그사이, 카니벨라는 얼굴을 가까이 대고 입을 열었다.

“내가 궁금한 건 딱 하나야. 네가 왜 나를 자꾸 괴롭혔는지 그것만 말하면 돼.”

“뭐?”

“귓구멍이 썩었나? 왜 자꾸 나를 괴롭혔냐고.”

그렇게 살기를 풀풀 날린 것에 비해 정말이지 쓸데없는 이유였다. 란시엔은 그런 하찮은 것에 대답해야 할 가치를 느끼지 못했다. 자신도 모르는 사이 웃음이 나왔다.

“풋, 푸하하하하!”

“왜 웃는 거지?”

남의 인생을 망쳐 놓고 뭐가 그렇게 신나서 웃는 거야? 그녀는 그때 진심으로 란시엔을 죽여 버리고 싶다고 생각했다. 그녀의 의지에 따라 살기가 전신에 피어올랐다. 그러나 이번에 란시엔은 그녀의 기세에 조금도 주눅 들지 않았다.

“내가 널 괴롭힌 이유라…… 그게 반드시 이유가 필요한 일인가?”

“……뭐라고?”

“아무 이유 없어. 그냥 네가 재수 없어서 그랬어.”

“…….”

그냥 그저 재수가 없어서 남의 인생을 그렇게 짓밟았다고? 란시엔의 웃음소리가 그녀의 귀를 거칠게 찔렸다. 그녀는 그 말에 정신이 나갈 것 같았다.

나는 아직도 이렇게 고통받고 있는데 너는 뭐가 그렇게 신나서 웃고 있는 거야. 뭐가 그렇게 즐거운데?

“난 널 처음 봤을 때부터 재수 없었어. 그래서 짓밟고 싶었고 그게 다야.”

“…….”

“풋! 뭐 거창한 이유라도 필요했나 봐?”

“…….”

“안타깝게도 이유 따윈 없어. 네 죄가 있다면 그저 내 눈에 띈 것이 전부야.”

그녀는 그 말에 곧장 란시엔의 목을 움켜쥐었다. 란시엔은 고통에 캑캑거렸다. 간수들이 놀라서 그녀를 진정시키려 했으나 그녀의 힘을 이겨 내지 못하고 땅에 내동댕이쳐졌다. 그녀의 전신에 이때까지보다 더 짙은 살기가 피어올랐다.

“마음이 다시 바뀌려고 하고 있어.”

“…….”

“그냥 죽어.”

란시엔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그녀는 진심이었고, 점점 까맣게 물드는 시야에 란시엔은 무서워졌다. 그때, 라이넨이 등장하며 그녀의 손목을 잡았다.

“카니벨라, 안 돼.”

“이것 놔.”

“지금 저자는 너를 도발하고 있는 거야. 알면서도 왜 그래.”

“…….”

“저자를 죽이는 것은 사형 집행인이어야 하지, 네가 되어서는 안 돼.”

지금 란시엔을 죽이면 그녀는 아레마이와 똑같은 자가 된다. 상대에게서 정보를 빼내 오기 위해 잔인하게 상대의 영혼과 육신을 망가뜨리는 존재가 되어 버린다. 알면서도 다시 손을 더럽힐 뻔했다.

그녀는 마치 더러운 것이라도 만진 것처럼 거칠게 손을 떼어 냈다. 란시엔이 갑자기 들어오기 시작한 숨에 캑캑거렸다.

“켁!”

그러나 그녀는 분을 다 참지 못해 란시엔의 배를 발로 걷어찼다. 의자가 뒤로 넘어가며 머리를 부딪친 란시엔은 눈에서 별이 나오는 것만 같았다. 그녀는 그런 란시엔과 눈을 맞추며 이를 갈았다.

“라이넨 덕분에 살았네. 고마워해.”

그녀는 손을 털며 일어났다. 그러고 보니 갑자기 등장한 라이넨의 모습에 그녀는 의아했다.

“무슨 일이야?”

“아, 네가 만든 해독제가 시스티아 왕국에게서 반송되었어.”

“그렇구나.”

그녀가 만든 해독제를 시스티아 왕국에서는 쓰지 않았다. 루미니르 제국의 것이라는 이유가 가장 컸지만 그들은 아레마이가 제공했던 마약의 맛이 너무 좋아 딱히 해독제를 쓰고 싶어 하지 않아 했다.

“……해독제라니 무슨 말이야?”

“너희들이 만든 마약의 해독제를 만들었지.”

“그걸 어떻게 만들어? 조직에서도 못 해낸 일인데.”

“제국에 인재가 얼마나 많은데. 그리고 너희들 생각보다 자료 많이 남겨 놨더라? 그거 알차게 잘 쓰고 있어.”

란시엔은 순간적으로 잊고 있었던 아레마이의 멸망에 울부짖었다. 자신의 아버지가 남겨 준 유산을 자신이 망쳐 버렸다는 죄책감, 그리고 그걸 무너뜨린 카니벨라에 대한 분노가 란시엔을 휘감았다.

“죽어!!”

란시엔은 몸을 어떻게든 비틀며 빠져나오기 위해 애썼다. 그러나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결국 란시엔은 마구 울부짖기 시작했다.

“더 자세히 말해 줄 필요는 없겠네.”

그것이 그녀가 란시엔에게 복수하는 또 하나의 방법이었고, 어차피 저승 가면 동지들이 많을 텐데 그 사람들한테 들으라고 하지.

“나가자.”

라이넨은 그녀를 이끌었다. 그녀는 뒤에서 짐승처럼 울부짖고 있는 란시엔을 보며 또 한 번 어린 그녀가 나오는 것을 느꼈다.

나 역시 저렇게 슬퍼했다. 도와달라고 소리쳤다. 그러나 넌 그런 나를 무시하고 짓밟았다. 나는 그저 무력하게 내게 내리치는 폭력이 끝나기를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주르륵.

그녀의 눈에서 눈물이 흘렀다. 어린 그녀는 참으로 슬픈 것이 많았다. 그녀는 어린 그녀에게 란시엔의 최후를 보여 주었다.

어때? 이제는 괜찮니?

응, 괜찮아.

그녀는 상대의 불행을 보고 통쾌해하는 부류는 아니었다. 그렇지만 란시엔의 모습은 그녀로 하여금 이상한 감정이 들게 만들었다. 내가 슬펐던 만큼 슬퍼하는 너를 보니 기분이 좋아져. 네 최후가 그만큼 불행했으면 좋겠어.

그녀는 어린 그녀가 통쾌하게 웃는 모습을 보며 기묘한 감정이 들었다. 그렇지만 항상 울기만 하던 어린 그녀가 그녀에게 작별 인사를 하며 사라지는 것을 느꼈다. 그녀는 웃으며 속으로 작별을 고했다.

슬펐던 나여, 이제는 활짝 웃기를.

안녕, 나의 아픈 과거들이여. 내일부터 새로운 미래를 걸어갈 수 있는 힘이 생겼어.

“그래, 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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