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89. 아직 끝나지 않은 (90/93)

89. 아직 끝나지 않은

시간은 빠르게 지나고 봄이 되었다. 드디어 란시엔의 처형식이 거행되었다. 그녀는 마지막으로 란시엔이 있는 감옥으로 향했다. 전에 봤을 때와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처참한 모습이 된 란시엔이 그녀를 맞이했다.

“근데 웬 재갈이에요?”

“허구한 날 자꾸 소리를 지르고 혀를 깨물려고 해서 그렇게 했어요.”

란시엔은 그녀를 베어 버릴 기세로 쳐다보았다. 그러나 그녀는 무심한 표정으로 란시엔을 쳐다보았다. 어린 그녀가 사라진 이후, 그녀는 란시엔을 봤을 때 그 어떤 감정도 느끼지 않았다.

그저 빨리 모든 일이 끝났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어렴풋이 할 뿐.

“사형은 언제 집행되지?”

“이제 곧입니다.”

“그래?”

그녀는 밖으로 나갔다. 라이넨이 밖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잠깐 구경하다 갈까?”

“그것도 괜찮겠네.”

그들은 정원을 거닐었다. 꽃향기가 좋았다. 그녀는 이 평화로운 광경이 너무 좋았다. 그러나 곧 그들의 귀에 시끄러운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무슨 일이지?”

정원에서 나온 그들은 곧장 거칠게 끌려오는 란시엔을 볼 수 있었다. 어느새 재갈이 풀렸는지 란시엔은 악을 쓰고 있었다. 그녀는 란시엔의 저 꼴을 보니 기분이 그리 좋지는 않았으나 그것은 한순간이었다.

“이것 놓으라니까!”

라이넨은 그녀의 시선이 자신에게 돌아가자 뾰로통한 목소리로 말했다.

“저런 거 보지 말고 나랑 같이 놀자. 어차피 나중에 제일 좋은 곳에서 볼 수 있잖아.”

“그래.”

그녀는 곧 고개를 돌렸다. 란시엔은 기사들에 의해 성문 밖으로 끌려 나왔다. 처형장까지 사람들이 구름처럼 몰려 있었다.

“꺼져라, 이 마녀!”

“죽어라!”

“더러운 아레마이의 잔당!”

군중은 그녀를 저주했다. 돌을 던지고 오물을 던졌다. 늘 깨끗한 것만 먹었던 그녀의 입에 음식물 쓰레기들이 묻었다. 늘 깨끗한 옷만 입던 그녀의 옷에 흙먼지가 가득했다. 늘 깨끗하게 감았던 비단결 같은 머리카락은 뻣뻣해졌다.

“네놈들이 감히!”

그녀는 소리를 질렀다. 그러나 그녀의 그 소리는 군중을 더 흥분시킬 뿐이었다. 돌멩이가 그녀의 이마에 날아와 정확하게 찍혔다. 이마에서 피가 흘러내렸다. 그녀에게 덤벼드는 사람도 있었다.

“물러나라!”

그러나 기사들은 적극적으로 말리지는 않았다. 그녀의 머리채를 잡은 한 아낙이 있는 힘을 다해 머리카락을 쥐어뜯었다. 그녀는 고통에 눈물이 날 것 같았다.

“악!”

왜 자신이 이런 고통을 받아야 하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녀는 그저 아버지의 유언을 이루고자 했을 뿐이었다. 자신의 아버지가 아레마이의 부흥과 대륙의 지배를 원했기에 했을 뿐이었다.

그런데 왜 너희는 나를 이렇게 못살게 구는 거지? 내가 도대체 무엇을 잘못했기에!

그녀는 저항했다. 그러나 그럴수록 사람들은 더 과열되었다. 그녀는 처형장까지 오는 동안 이미 만신창이가 되어 있었다.

“마녀를 빨리 죽여라!”

“카약, 퉤!”

“너랑 이 땅에 서 있는 것도 싫다!”

“죽어라!”

“사악한 년!”

모든 사람이 그녀를 저주했다. 누군가가 그녀의 얼굴에 침을 뱉었다. 그녀는 고개를 돌렸다. 그러나 누구인지 알 수 없었다. 모두가 끔찍하게 그녀를 저주하고 있는 상황에 그제야 두려움이 밀려들었다.

그때, 길이 열리며 황제와 라이넨, 카니벨라, 라이부스가 등장했다. 그들은 가장 좋은 자리에 착석했다. 그리고 사형 집행자가 나와서 란시엔의 죄목을 줄줄 읊기 시작했다. 그녀의 죄목이 나열될수록 사람들은 흥분했다.

“……이와 같은 결과로 란시엔 루넨 카시르를 사형에 처한다!”

“이, 이것 놔!”

그녀는 버둥거렸다. 단두대의 칼날이 날카롭게 벼려졌다. 그녀는 죽기 싫었다. 내가 왜, 내가 왜 죽어야 해!

그렇지만 기사들은 그녀를 억지로 질질 끌고 갔다. 그리고 구멍에 그녀의 머리를 집어넣고는 움직이지 못하게 제압했다.

“사형을 집행하라!”

단두대의 칼날이 그녀에게 떨어졌다. 그녀는 미처 눈을 감지도 못했다. 섬뜩한 소리와 함께 목이 잘렸다. 군중은 흥분하여 잘린 목에 돌멩이를 던졌다. 침을 뱉고 오물을 던졌다.

그리고 그걸 멀리서 지켜본 카니벨라는 드디어 모든 것이 끝났다는 게 실감 났다. 그녀는 더 이상 악몽을 꾸지 않을 것이다. 더 이상 과거를 떠올리며 무력하게 떨지도 않을 것이다. 앞으로 그저 행복만을 바라보며 살 것이다.

“가자.”

혹시나 그녀가 이상 반응을 보이면 어떡하나 걱정하며 옆에서 지켜보던 라이넨이 손을 내밀었다. 앞으로 함께할 수 있을 것이라고 장담하지 못한다. 아니, 오히려 그러지 못할 가능성이 크겠지.

그러나 지금은 그저 이 손을 잡고 싶었다. 이 손을 잡으면 느껴지는 따뜻함에 모든 것을 맡겨 버리고 싶었다. 그녀는 그를 쳐다보며 웃었다.

“그래, 가자.”

*   *   *

모든 것이 끝났다. 아레마이가 멸망했고, 란시엔이 죽었다. 자신을 괴롭히던 모든 것이 다 없어졌다. 그리고 반드시 사죄하겠다고 결심했던 유키르에게 용서까지 받았다. 그래서 카니벨라는 안심했다.

이제 라이지와 함께 살 수 있을 것이라고. 이제 평화롭게 살 수 있을 것이라고. 그리고 어쩌면 라이넨과도…….

그러나 그 모든 것을 비웃는 듯, 그녀의 상황은 그녀를 놓아주지 않았다.

‘어디지?’

꿈 가운데, 어두운 곳에 그녀가 있었다. 그녀는 예전에 꿈을 꾸었을 때와는 다른 느낌을 받았다. 그때는 뭔가 포근한 느낌이었다면 지금은 좀…….

-왔네?

“넌 누구야?”

다소 기괴한 목소리가 들렸다. 두려움에 그것을 떨쳐 버리기 위해 그녀는 허공에 외쳤다. 어둠 가운데서 누군가가 키득키득 웃는 소리가 들렸다. 그녀는 침을 삼켰다.

그녀는 어두운 곳이 싫다.

“누구냐고.”

-안녕?

그녀는 으르렁거렸다. 이 불쾌한 곳에서 빨리 나가고 싶은데 자꾸만 약 올리는 그 목소리가 짜증이 났다. 그러자 어둠 속에서 누군가가 드러났다.

-안녕?

목소리는 다시 한번 말했다. 그러나 그녀는 입을 뗄 수가 없었다. 그 목소리는 바로 그녀 자신이었다. 어디가 그렇게 즐거운지 비틀린 웃음을 짓고 있는 그녀 자신이 그녀에게 다가왔다.

-인사를 했는데 왜 안 받아 줘.

“넌 누구야?”

-난 너야. 지금 봐서 알고 있잖아.

“…….”

뭔가 불안한 예감이 들었다. 어린 카니벨라는 이미 그녀의 마음속에서 사라졌다. 그녀에게 고맙다고 말하며 사라진 아팠던 그녀. 그런데 지금의 그녀는 지금과 비슷한 나이를 가지고 있었다.

-무슨 말이라도 해 봐. 나 심심하다고.

“넌, 뭐야?”

그녀는 표정을 굳혔다. 그러자 꿈속의 그녀가 그녀에게 말했다.

-난 네게 정신을 차리라고 말해 주러 왔어.

“뭐라고?”

-넌 말이야, 네가 행복해질 자격이 있다고 생각해?

“……!”

그녀는 그 말에 심장이 쿵 떨어지는 느낌을 경험했다. 뭐라고?

-넌 행복해질 자격이 없어.

“……무, 뭐…….”

-너 때문에 죽은 사람이 한둘이야? 그 사람들은 아무 죄가 없는데 너 때문에 죽었다고. 설마 그걸 다 잊었어?”

“그, 그건…….”

-라이넨과 행복해지고 싶다고?

그녀는 그 말에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 그러자 꿈속의 그녀가 그녀의 귀에 나지막이 속삭였다.

-꿈 깨.

“…….”

-자격도 없는 주제에 뭘 그런 꿈을 꾸겠다고 나서는 거야?

꿈속의 그녀는 신랄하게 그녀를 비꼬았다. 지금 네가 죽인 사람들의 무게가 얼마나 무거운데 그걸 다 외면하고 행복해지겠다고? 지금 네가 지은 죄가 얼마나 큰데 그걸 다 놓고 도망치겠다고?

-넌, 그 사람들의 핏값을 다 치르기 전까지는 절대 그렇게 될 수 없어.

그렇게 말하면서 꿈속 그녀의 형상이 바뀌었다. 그녀가 처음으로 죽였던 자들이었다. 그들이 하나가 되어 그녀를 비난했다.

-가만히 잘 자고 있는 나를 죽여 놓고 네가 감히?

-난 아무런 죄가 없었어! 그런데 날 죽여 놓고 내 행세를 했잖아!

-살려 달라고 빌었는데 나를 나쁜 사람들 가운데 던졌잖아요!

그녀가 죽였던 자들이 차례차례 나타나며 그녀를 옥죄었다. 그녀를 향해 다가오는 그들의 형상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도망치고 싶었으나 다리가 움직여지지 않았다.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그렇게 다가오는 그들은 그녀의 공포심을 자극했다. 그들은 어느 순간 그녀를 에워쌌다.

-살인자!

-넌 절대 행복해져서는 안 돼!

그렇게 말하며 그들은 어디서 구해 왔는지 모를 돌을 던졌다. 그녀는 아팠다. 제발, 제발 누가 좀 살려 줘!

“괜찮아?”

누군가가 그녀를 흔들었다. 그녀는 발작하듯이 눈을 떴다. 옆에서 라이넨이 걱정하는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허억!”

“무슨 일이야?”

그는 그녀를 품에 안고 진정시키기 위해 애썼다. 그러나 그녀는 허공에 이유 모를 비명만 질러대며 벌벌 떨었다. 그리고 그에게서 벗어나기 위해 몸을 비틀었다. 그는 그녀를 더 꽉 안았다.

무엇인지는 모르겠지만 넌 아직도 아프구나.

그는 눈물이 날 것 같았다. 그는 침대 옆에 있던 종을 울렸다. 에오라가 들어왔다. 그는 조용하게 말했다.

“물을 가지고 와.”

“네.”

에오라는 몸을 비틀고 있는 그녀를 안타깝게 바라보았다. 그러나 이내 시녀의 본분을 지켰다. 그는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계속 말을 걸었다. 손에서 땀이 잔뜩 묻어 나왔지만 그는 개의치 않았다.

이윽고 그녀가 정신을 차렸다. 그는 낮은 목소리로 말을 걸었다.

“이제 진정이 되었어?”

“……응.”

“마셔 봐.”

그는 에오라가 내왔던 물을 그녀에게 내밀었다. 차가운 물이 식도를 타고 내려가자 정신이 맑아진 것 같았다. 그는 그녀가 입을 열 때까지 옆에 앉아 침묵을 지켰다.

“라이넨.”

“왜 그래?”

“나 이제 아무래도 떠나야 할 거 같아.”

“…….”

그녀는 어쩌면 라이넨과 함께할 수도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건 진짜 꿈이었다. 그녀는 그의 앞에 설 수 없었다.

“어째서?”

그는 반발했지만, 그녀는 이미 결심을 한 상태였다. 앞만 바라보며 그녀는 최대한 무감정하게 말했다.

“이제 모든 것이 끝났어.”

“그래서 가겠다고?”

“응.”

“어째서?”

“우린 안 돼.”

그녀는 단언했다. 아마 아무것도 모른 척 그와 함께하게 된다면 그녀가 앗아간 저 생명의 무게들은 평생 동안 그녀를 괴롭힐 것이었다. 그녀는 행복해질 자격이 없었다.

“난 내가 지은 죄들을 잊지 못해.”

“네가 무슨 죄를 저질렀는데?”

“원하지는 않았지만…… 아레마이의 명에 따라 수많은 사람들의…….”

그녀는 속이 답답했다. 여기서 더 말했다는 토악질을 할 것 같았다. 그녀의 그런 표정을 보던 그는 입을 열었다.

“그건 네 탓이 아니야.”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