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90. 마침내 (91/93)

90. 마침내

“그건 네 탓이 아니야.”

“어째서야?”

라이넨은 입을 열었다. 어차피 지금은 그 어떤 말을 해도 카니벨라의 두려움과 죄책감을 어떻게 할 수는 없을 것이다.

“내 어릴 적 이야기 기억나지?”

“응?”

“내 철없는 행동으로 인해 어마마마와 형님이 죽은 거.”

그녀는 기억한다는 의미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절대 그가 그들을 죽였다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그건 네 탓이 아니야.”

그는 그것을 아직도 후회하며 자책하고 있다. 그녀는 그가 그렇게 무너지던 모습을 잊을 수가 없었다.

“왜 내 탓이 아니지?”

그러나 그는 무심하게 물을 뿐이었다. 그녀는 반박하듯 말했다.

“넌 그저 네가 좋아하는 사람들과 함께하고 싶었던 거였잖아.”

“맞아. 난 그저 어머님과 형님과 함께하고 싶었지. 그런데 결과는 처참했잖아?”

“아니야! 그 사람들도 절대 그렇게 생각하지 않을 거야! 그저 함께하고 싶다는 마음에 한 행동이 그저 끔찍한 결과로 이어진 것뿐이잖아!”

“…….”

그녀는 발작하듯 계속 말했다.

“넌 그때 어렸고, 아무것도 몰랐어. 그런데 그 행동의 결과가 그저 그런 것이고 그 사람들도 절대 그렇게 생각하지 않을 거라고!”

그는 그녀의 말에 차분하게 말했다.

“그래, 잘 알고 있네.”

“뭐?”

“너도 마찬가지야.”

“무슨…… 말이야?”

“네가 학살에 가까운 살인을 했다는 건 분명 사실이야.”

그녀는 그 말에 침묵했다. 그의 입에서 그런 말이 나오는 것 자체가 그녀의 마음을 잔인하게 갈라놓았다. 그러나 그는 말을 이었다.

“그렇지만 그걸 네가 원해서 한 건가?”

“뭐?”

“네가 죽이고 싶어서 그 사람들을 죽인 건 아니잖아.”

“…….”

“네가 그 일을 하지 않았더라면 아레마이는 널 죽였을 거야. 그리고 너와 가까이 있던 마리라는 사람과 우리 딸도 죽었겠지.”

“…….”

“그건 네 자의가 아니었어. 넌 강요에 의해 그런 짓을 한 거야.”

“그렇지만…….”

그녀는 그가 무슨 말을 하고 싶어 하는지 알 것 같았다. 그러나 그가 저지른 행동과 그녀가 저지른 행동은 애초에 무게부터가 달랐다.

“그러니 괜찮아.”

그것은 궤변이었다. 그녀는 자신에게 죄가 있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으면 마치 미쳐 버릴 것만 같았다. 그녀는 다소 비꼬는 어조로 대꾸했다.

“아니, 달라.”

“왜?”

“아무리 명령이라고는 하지만 죄 없는 사람들의 생명을 빼앗고 그걸로 내 삶을 연명했어. 그런 삶이 쓰레기가 아니면 뭐야?”

“절대 아니야.”

그렇게 말하며 그는 그녀의 양팔을 꽉 잡은 채 자신을 바라보게 했다. 그녀는 마치 자신을 질책하는 것 같은 그의 표정에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는 으르렁거리며 말했다.

“그런 같잖은 소리 그만해.”

“…….”

“넌 그 사람들의 생명을 아무렇지도 않게 빼앗았어?”

그건 단언컨대 절대 아니었다. 그녀는 격하게 고개를 저었다.

“그래, 넌 분명히 그 사람들을 죽였어. 그렇지만 넌 그 사람들에게 항상 미안해하고 있어. 그리고 그 사람들을 죽인 살인의 무게를 지금까지 지고 있지.”

“……그건.”

“넌 너 대신 레미우스 왕국에 끌려간 그 여자를 위해서 몇 달을 연구했어. 그냥 모른 척해도 되는데 네가 모르는 사람 때문에 최선을 다했어.”

그러니 이제 제발 그런 말 그만해.

“그리고 아레마이에 있던 사람들이 과연 너처럼 생각할까? 단언컨대 절대 아닐 거야.”

그는 확신할 수 있었다. 그들은 아무렇지도 않게 내팽개치는 생명의 무게를 그녀는 미련하게 혼자서 아직도 짊어지고 있다. 홀로 후회하며 눈물을 흘리고, 항상 기억하며 자기 자신을 옥죈다.

물론 그녀의 행위는 절대로 옳은 것이 아니고 지탄받아야 마땅하다. 그러나 이렇게 계속 후회하며 아파하는 그녀를 본 그 사람들이 계속해서 원망을 퍼부을 수 있을까? 그건 절대 아닐 거라고 그는 단정할 수 있었다.

“너와 나는 같아.”

“라이넨…….”

“나는 내 실수로 인해 어머니와 형님을 잃었고, 넌 아레마이의 강요로 인해 피를 뒤집어썼지.”

“…….”

“우리는 의도하지 않았어. 그러니 그건 우리 탓이 아니야.”

그건 단언컨대 확실하게 말할 수 있었다.

“우리는 그냥 마음이 다친 피해자들이야.”

“그런 거야……?”

“그래, 그건 내가 단언할 수 있어.”

울먹거리던 그녀의 기세가 살짝 풀어졌다. 그는 그녀가 자신의 생각을 충분히 정리할 때까지 토닥이며 기다려 주었다. 그녀는 그의 눈을 보며 말했다.

“솔직히 아직까지는 납득이 안 돼.”

아무리 저렇게 말한다 한들, 그녀는 자신이 거둔 생명들의 무게를 절대 잊지 못할 것이다.

“그렇지만 이제는 벗어나 보려고 노력할게.”

그는 그녀의 말에 감격했다. 그래, 이제 우리 모두 행복해질 수 있어.

“그렇다면…….”

“응, 앞으로 노력해 볼게.”

그 말에 그는 희망을 품었다. 우리는 이제 함께해도 되는 것일까?

*   *   *

자리를 비웠던 사용인들이 돌아왔다. 라소니 왕국은 라이문타 왕국이 되었고, 레미우스 왕국도 서서히 안정되고 있었다.

‘어떡하지.’

라이넨은 초조했다. 그는 후에 카니벨라에게 혼인에 대한 의사를 물었으나 그녀는 딱히 말을 하지 않았다. 그는 계속 물어보는 것이 그녀를 부담스럽게 할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으나 아무런 대답을 듣지 못한 상황이기에 불안했다.

‘어떡해야 하지?’

그래서 그는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황제에게 찾아갔다.

“그 아이와 다시 혼인을 하고 싶다고?”

“예, 어차피 카일라와의 약혼도 취소되지 않았습니까.”

황제는 고개를 끄덕였다. 황제 역시 카니벨라가 마음에 들었고, 황태자비로 맞이하고 싶다고 생각했다. 그녀는 다른 영애들과 달리 두뇌 회전도 비상하고, 마냥 누군가에게 지켜지기만을 바라지 않는다.

그러나 귀족들이 가만히 있지 않을 거였다. 실제로도 귀족들은 어느 정도 상황이 해결되자 다시 자신의 딸들을 라이넨과 약혼시키기 위해 밑에서 분주하게 움직였다.

“네가 그들을 설득해 보거라.”

“제가요?”

“그래. 네 자질을 보여 주고 그와 동시에 네 반려가 그 정도의 자격이 있다는 것을 증명하도록 해라.”

그의 방황으로 인해 황태자파도 흔들렸었다. 후에 약혼을 통해 어느 정도 신뢰가 회복되긴 했지만 완전하지는 못했다. 그래서 황태자 순례 때 자질을 제대로 어필하려 했으나 아레마이의 일이 엮이면서 어영부영 넘어가 버렸다.

그래서 그는 귀족들과 제대로 된 대화를 하지 못한 상태였다. 황제는 그에게 단호하게 말했다.

“넌 아이가 아니다. 그러니 네 일을 네가 해결해 보도록 해라.”

“……네, 알겠습니다.”

그는 황제와의 독대를 끝냈다. 그는 일단 황태자의 이름으로 모든 귀족들에게 소집령을 내렸다. 귀족들은 갑자기 나온 소집령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갑자기 무슨 일이지?”

“황태자 전하께서 무슨 심경의 변화가 있으신 건가?”

“드디어 황권을 라이부스 전하께 넘기는 건가?”

온갖 추측을 한 귀족들은 의아한 상태에서 하나둘 회의장으로 모였다. 이미 아레마이 같은 굵직한 사건들은 다 끝난 상태였다. 도대체 무슨 이야기를 하고 싶어서 이렇게 모두를 소집한 것일까?

그때 라이넨과 라이부스, 그리고 카니벨라가 회의장 안으로 들어왔다. 귀족들은 황족도 아닌 카니벨라가 입장하자 난처한 기색을 보였으나 황족들이 아무런 말을 하지 않았기에 딱히 뭐라 말할 수 없었다.

“오늘은 회의를 하기 위한 것은 아니다. 몇 가지 선언할 것이 있어서 그대들을 불렀다.”

그리고 라이넨은 고개를 까딱거렸다. 그러자 라이부스가 앞으로 나왔다. 라이부스를 지지하는 귀족들이 기대에 찬 시선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라이부스는 저들도 참 징 하다는 생각을 했다.

‘너희가 내 파벌이랍시고 아레마이에 붙어서 나까지 의심받을 뻔했다고.’

실제로 라이넨은 라이부스를 의심했었다. 그러나 그가 해명하고, 심지어 황제와 황후, 그리고 카니벨라까지 아니라고 하자 라이넨은 의심을 거두었다.

<그렇다면 네 의견을 확실히 말하도록. 네가 황제의 자리에 전혀 관심이 없다는 것을 저들 앞에서 선포해라. 그럼 믿어 주겠다.>

까짓거 못할 것도 없었다. 그는 황제에 관심이 없었다. 자유롭게 사는 것이 좋았다.

“여기 있는 자들 중에서 황태자 전하께서 계심에도 불구하고 내가 황제가 될 것이라고 공공연하게 떠들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

“여기서 공식적으로 선언하건대 나는 절대 황제가 될 생각이 없다. 내 생각을 표현하지 않아 오해한 자들이 많은 것 같더군. 그러니 여기 이 자리에서 다시 한번 말하겠다.”

라이부스는 숨을 들이쉬고 또박또박 말했다.

“나는 절대로 황제가 되지 않는다. 그러니 그런 허튼소리는 하지 말도록.”

라이부스를 지지하고 있던 귀족파는 큰 충격을 받았다. 그럼 이때까지 라이부스를 지지했던 일은 모두 다 헛짓거리였다는 것인가?

그러나 그들이 미처 충격을 다 갈무리할 시간을 주지 않겠다는 듯 라이넨은 카니벨라의 손을 잡고 앞으로 나왔다.

“그리고 나는 여기 내 옆에 있는 카니벨라와 혼인하겠다.”

<만약 나와 네가 혼인한다는 걸 귀족들이 허락한다면 나 또한 여기서 너와 영원히 함께하겠어.>

어젯밤 카니벨라가 했던 말이 계속 맴돌았다. 그는 그녀 아니면 혼인하고 싶은 사람이 없었고, 그러기 위해서는 귀족들을 설득해야 했다. 이미 모든 근거는 준비되어 있으나 저들이 순순히 허락할 수 있도록 해야 했다.

그러나 아니나 다를까, 그것은 모든 귀족들에게 충격적인 발언이었다. 또 저 여자와 결혼을 하겠다니. 도대체 제정신인가?

“절대 안 됩니다!”

“저 여자는 아레마이였습니다! 저런 여자에게 제국을 맡기시다니요!”

“전하, 다시 생각해 보십시오!”

회의장은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되었다. 그는 미안하다는 표정으로 그녀를 쳐다보았다. 그러나 그녀는 딱히 흔들리는 기색이 아니었다. 마치 그렇게 될 거라는 것을 아는 것처럼 표정에 변화 하나 없었다.

귀족들은 절대 안 된다고 소리쳤다. 그는 입술을 깨물었다. 이제 그는 자신이 생각한 근거들에 대해서 말해야 했다.

“그렇다면 너희들은 여기 있는 카니벨라가 목숨을 걸고 아레마이의 기밀 자료를 가지고 오고, 우리 제국군과 함께 싸웠다는 사실은 알고 있었나?”

그녀와 함께 싸웠던 귀족들이 끙 소리를 냈다. 실제로 그들은 그녀만큼 용맹한 자를 본 적이 거의 없었다. 그녀는 전쟁터를 누비고 다니던 장수였고 아레마이를 섬멸하기 위해 누구보다 앞장서서 싸웠다.

“그렇게 자신의 목숨을 걸어 준 자가 우리와 영원히 함께해 주겠다고 하는 것인데 지금 그대들은 그것을 막겠다는 것인가?”

뭔가 이상해 말이 되지 않았지만 그들은 할 말이 없었다. 그들의 딸에게 카니벨라와 같은 능력이 있다고 절대 빈말로도 하지 못한다. 그러니 할 말이 없었다. 그녀는 앞으로 나서서 조용한 목소리로 말했다.

“지금은 보여 줄 것이 이런 것밖에 없지만 황태자비가 되고, 황후가 되면 보여 줄 수 있는 것이 또 다를 겁니다.”

“그렇다면 결정이 되었군.”

황제가 손뼉을 쳤다. 황제까지 나서니 더 이상 반대할 명분이 없었다. 귀족들은 똥 씹은 표정이 되어 찬성표를 던졌다.

“이것으로 회의를 끝내도록 하지.”

사람들이 사라지자 라이넨은 카니벨라의 손을 더 꽉 잡았다. 그녀는 피식 웃었다.

“나 어디 안 가.”

“그냥 꽉 잡아 보고 싶었어.”

그는 그녀와의 혼인이 미치도록 기대가 되기 시작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