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2. 화해
라이넨에게 마력을 전부 넘겨준 후, 황제는 병에 걸렸다. 황궁의가 지속적으로 상태를 보고 있지만 상황은 점점 심각해지기만 했다.
“내게 시간이 얼마나 남았는가?”
황제의 말에 황궁의는 머뭇거리며 대답했다.
“폐하……. 오늘 하루조차 넘기기 힘듭니다.”
“그렇군. 알려 줘서 고맙다네.”
이제 얼마 남지 않았다. 그는 자신의 손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항상 그에게는 희미하게 보였던 마력이 더 이상 보이지 않았다. 라이넨에게 무사히 넘어간 것이다. 이제 작별 인사를 할 때가 온 것이다.
“모두를 이곳으로 불러오도록.”
“예, 명을 받들겠습니다.”
그리고 시종은 황후, 라이넨, 라이부스를 불렀다. 마력을 받은 이후 라이넨에게서는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마력의 농도가 보였다. 사람은 아주 티끌만 한 마력이라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황제는 그 티끌만 한 마력조차도 허공에 흩어지고 있었다. 그는 황제의 끝을 직감했다.
“황후…….”
“여기에 있습니다.”
“우리의, 우리의 아이들을 부탁합니다.”
황제는 말하다 숨이 찬지 숨을 골랐다. 그런 그의 모습이 안타까워 황후는 안타까운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폐하…….”
황제와 이때까지 함께한 세월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다. 전 황후의 뒤를 잇겠다는 마음으로 하게 된 혼인. 그렇지만 그렇게 함께하면서 황후는 황제에게 전우애를 느꼈다. 그렇게 그들은 어려움을 함께 헤쳐 올 수 있었다.
라이넨이 마력을 가지게 되면서 이런 날이 곧 올 것이라는 건 알고 있었지만 이렇게 빨리 헤어지게 될 줄은 몰랐다.
“폐하, 그곳에서 부디 그분을 만나 주십시오.”
“황후…….”
“이때까지 홀로 계셨던 그분과 함께 저를 기다려 주십시오. 곧 따라가겠습니다.”
“……그리하지.”
그렇게 대화를 나누던 그들은 라이넨이 다가오자 비켜섰다. 황제는 그에게서 느껴지는 무언가에 황후와 라이부스를 잠깐 밖으로 내보냈다.
“하고 싶은 말이 무엇이냐?”
“어떻게 아셨습니까?”
“네놈 얼굴만 보면 다 알지 뭐.”
황제는 마지막까지 투덜거렸다. 라이넨은 그걸 보며 반드시 해야 할 말이 있었다.
“아바마마.”
“무엇이냐?”
“이제는 원망하지 않습니다.”
“무엇을 말이냐?”
“지금의 황후 폐하를 맞이한 것이요.”
라이넨이 어렸을 때, 장례식을 치른 지 얼마 되지도 않아 황제는 새로운 반려를 맞이했다. 그것이 현 황후였다. 그리고 그것에 대해 큰 거부감과 동시에 상처를 받은 그는 황제의 진심에 응답하지 않았다.
황제의 관심을 거부하고, 거짓이라고 의심했다. 그러나 어느 순간부터 알게 되었다. 황제는 투덜거리지만 늘 언제나 뒤에서 묵묵하게 자신을 받쳐 주고 있었다. 표정은 무심해도 항상 걱정하고, 말투는 퉁명스럽지만 상냥했다.
언제나 황후와 함께 자신을 걱정하고, 무슨 일이 생기면 제일 먼저 달려와 준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카니벨라를 잃고 힘들어할 때 누구보다 옆에서 위로해 주고 싶었지만 스스로 이겨 내게 하기 위해 가만히 있었던 것을 알게 되었다.
본인이 더 힘들고 아팠을 텐데도.
그걸 언제 깨닫게 된지는 알 수 없었다. 그렇지만 언제부터 자신을 걱정하고 믿어 주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며 그의 마음이 서서히 열리게 되었다. 황제의 입장에서 다시 생각해 보며 그는 누군가를 이해해 가고 있었다.
“그래서 죄송합니다. 전 아바마마의 진심을 몰랐고 언제나 의심했어요.”
“…….”
“전 이제 괜찮습니다. 더 이상 저를 보며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아가야…….”
“이제 다 컸습니다. 그러니 편히 쉬셔도 됩니다.”
황제는 어느새 눈빛이 단단해지고 따뜻하게 말하는 아들을 바라보았다. 이 아이가 언제 이렇게 컸지?
“제국을 위해서 이때까지 헌신하신 것, 이제 제게 맡기셔도 됩니다. 제가 열심히 하겠습니다.”
“……고맙구나.”
황제의 눈가에 아들에 대한 자랑스러움이 가득 찼다.
“그럼 먼저 나가 보겠습니다.”
문밖으로 나오자 기다리고 있던 황후와 라이부스가 들어갔다. 그는 궁에서 나와 하늘에 날아가는 새들을 바라보았다. 이제 황제라는 무거운 이름이 그에게 붙게 된다.
‘편히 쉬소서…….’
하늘은 지독하게도 맑았다.
* * *
황제가 붕어했다. 장례식이 성대하게 치러졌다. 라이넨은 다소 멍한 표정으로 모든 장면을 바라보았다. 그런 그를 부축하며 카니벨라가 말했다.
“선황제 폐하께 앞으로 잘하겠다고 말했잖아. 그러니까 잘해야지.”
“…….”
“똑바로 서. 지금 네가 그러는 모습을 보고 싶어 하시지는 않을 거야.”
“……그래.”
그는 다시 정신을 차렸다. 그리고 손수건으로 연신 눈물을 찍어내는 태후와 그런 태후를 옆에서 지켜 주고 있는 라이부스가 눈에 보였다.
“나는 가 볼게. 하고 싶은 이야기가 많을 거 아니야.”
눈치 빠른 카니벨라는 그가 태후, 라이부스와 뭔가 이야기를 나누고 싶어 한다는 사실을 눈치챘다. 그는 고맙다는 표정을 지으며 그들에게 다가갔다. 라이부스가 다가오는 그를 보며 인사했다.
“황제 폐하.”
아직 즉위식을 한 것은 아니었지만 그는 이미 황제였다. 울던 태후가 울먹이는 목소리로 그에게 인사를 했다. 그는 그런 그녀를 바라보며 말했다.
“할 말이 있으니 일단 제 궁으로 가시죠.”
그렇게 그들은 라이넨의 궁으로 왔다. 아직 선황의 궁에는 선황이 사용하던 짐이 가득 차 있던 상태였기에 그는 즉위 전까지는 기존에 쓰던 궁을 사용하던 상황이었다. 태후와 라이부스는 그가 대접해 주는 차를 얼떨떨한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거처는 정하셨습니까?”
“선황 폐하의 붕어가 너무 갑작스러워 미처 정하지 못했습니다.”
“걱정 마십시오, 폐하. 조만간 나갈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
그들은 라이넨이 자신들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선황이 아니었다면 진즉에 쫓겨났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 이제 자신들을 보호해 줄 선황은 없다. 그랬기에 빨리 궁에서 나가야 했다.
라이넨은 한숨을 쉬었다. 그가 그들을 좋아하지 않았던 것은 사실이었으나 슬픔을 미처 다 추스르지 못한 사람을 쫒아낼 정도로 악랄한 사람은 아니었다. 그리고 그가 하고 싶었던 말은 그런 말이 아니었다.
“다행이군요.”
“예?”
“전 계속 궁에 함께 살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해서요.”
그의 말에 둘의 입이 벌어졌다. 저게 라이넨의 입에서 나올 소리인가?
“예?”
그들의 믿기지 않는다는 반응에 그는 쓴웃음을 지었다. 그게 다 자신이 벌인 일이었다. 그는 다시 한번 또박또박한 목소리로 말했다.
“여기 있으셔도 됩니다.”
선황이 죽기 전, 그는 선황의 진심을 알아주지 못해 미안하다고 사과를 했다. 그리고 미안한 것은 그들에게도 마찬가지였다.
<당신은 제 어머니가 아닙니다.>
그의 머릿속에 과거의 자신이 태후에게 했던 이야기가 스쳐 지나갔다. 그는 태후를 배척했다. 가시를 세우고 거부했다. 날카로운 말로 상처를 주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태후는 그를 끝까지 품어 주기 위해 노력했다.
본래 태후는 라이넨 친어머니의 최측근이었다. 그런 이점으로 선황과 혼인을 하면서 라이넨을 만나게 되었다. 태후는 그분의 하나밖에 없는 핏줄이라는 것과 아이의 귀여움에 이끌려 그를 돌보기 위해 노력했다.
그러나 어느 순간부터는…… 그를 진심으로 사랑하고 자신의 아들로 생각했다. 그래서 늘 그의 행복을 바랐다. 그게 바로 태후였다. 그리고 그는 그것을 계속 외면했다. 그리고 지금에서야 깨달았다.
그래서 라이넨은 태후에게 미안했다. 너무 늦게 알아차렸고, 늘 비수 같은 말을 내뱉음으로 상처를 주었다. 그는 도대체 얼마나 많은 말로 태후의 가슴에 못을 박아 버렸을까? 태후는 그를 언제나 진심을 다해 아들로 대해 준 것을.
그리고 라이부스를 보며 나쁜 놈이라고 생각했다. 선황에 대한 배신감과 태후에 대한 거부감 때문에 태어난 동생을 보고도 탄생을 축하해 주지 못했다. 오히려 늘 경계했다. 저놈이 언제 뒤통수를 칠까 불안해했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은 그의 상처를 끌어안느라 다른 사람들의 마음을 보지 못해 생겨난 결과였다. 그가 가지고 있는 슬픔이 너무 커 진심을 알아차리지 못하고 오히려 경계하고 의심했던 것이다.
그렇지만 지금은 카니벨라를 만나고, 오해가 풀림으로써 사이가 돈독해졌다. 그리고 그럼에 따라 자신을 바라보고 있던 그들의 시선을 느끼게 될 수 있었다.
“머물러 주십시오.”
“폐하…….”
“제가 저지른 죄인데 그걸로 인하여 눈치 보는 것을 원치 않습니다. 전, 태후께서 제게 얼마나 잘해 주셨는지 알고 있습니다.”
“…….”
그리고 우연찮게 듣게 된 라이부스의 진심. 그는 자신이 얼마나 속이 좁은 인간이었는지 깨달았다.
“라이부스 네가 얼마나 나를 뒤에서 받쳐 주려고 노력하고 있는지도 잘 알고 있다.”
“……형님.”
“그렇지만 나의 편협한 시각으로, 나의 아픔에 눈을 두느라 정작 중요한 가족을 신경 쓰지 못하고 상처를 주었습니다.”
그는 서툴렀다. 그렇지만 온 힘을 다해 그들에게 부딪혔다. 용서해 달라고, 이것은 모두 나의 잘못이니 부디 이곳에 나와 함께 있어 달라고 온몸으로 고백했다. 그런 그의 사죄에 그들의 눈빛이 흔들렸다.
“폐하, 전 단 한 번도 폐하가 미웠던 적이 없습니다.”
“……알고 있습니다.”
“폐하는 제게 있어 첫째 아들입니다. 마음으로 낳은 아들입니다. 그런 아들을 어찌 부모가 미워할 수 있겠습니까?”
“…….”
태후는 손수건으로 눈물을 찍으며 말했다. 그는 태후에게서 느껴지는 사랑과 포용에 할 말이 없었다.
“형님, 전 형님을 미워한 적이 없습니다. 형님께서 의무와 책임을 지시고 어떤 마음으로 황태자 자리에 계셨다는 걸 알고 있었으니까요.”
라이부스는 말을 이었다.
“그리고 만약 ‘형님’이라는 단어가 아픈 기억을 일으킨다는 걸 처음부터 알고 있었더라면 폐하를 그리 부르지 않았을 겁니다. 이건 제 실책이죠.”
그들은 마음이 참 넓은 사람들이었다. 그는 예전의 자신이 그들을 제대로 보지 않고 오해하고 있었다는 사실이 정말 부끄러웠다. 그는 그들의 말에 고개를 숙였다. 얼굴을 들 수 없었다.
“두 사람은 저를 부끄럽게 만드시는군요.”
“폐하.”
“전 부족한 사람입니다. 그러나 전 앞으로 이 제국을 다스려 나가게 될 겁니다.”
그때 부디 제게 도움을 주세요. 제가 올바른 길을 걸어 나갈 수 있도록 함께 생각하고, 때로는 질책하고, 때로는 서로 위로하고 토닥이면서 그렇게 우리 평범한 가족처럼 살아요.
그의 많은 말이 마음속에서 맴돌았다. 그러나 그들은 그런 그의 말을 다 들었다는 듯 웃었다.
긴 시간을 돌고 돌아 진정한 가족이 결합했다. 그들은 앞으로 가족의 이름으로 힘든 일을 극복해 나갈 것이다.
즉위식은 얼마 지나지 않아 이루어졌다. 즉위식 자체는 매우 간결했다. 라이넨은 재빨리 돌아와 처리해야 할 것들을 처리했다.
“전사자들에게 포상금은 갔는가?”
제일 먼저 미처 다 끝내지 못한 전쟁 이후 처리를 진행했다. 전사자들의 집에 돈을 지원했다. 그리고 시신들을 수습하여 그들을 위한 공동묘지를 만들었다. 그곳에 모두가 안치될 수 있게 하였다.
“고마워.”
“아니야, 이 정도는 괜찮아.”
그리고 그는 루키에르와 오래전에 죽었던 루카민 또한 이곳에 묻힐 수 있게 해 주었다. 그는 마법으로 루카민 생전의 물건들을 가지고 와 땅에 묻었다. 그녀는 루카민의 묘비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불효녀네.”
“응?”
“루카민은 내 진짜 아버지야. 그런데 나란 사람은 제대로 추모도 못 했어.”
혹독했던 아레마이의 훈련에 그녀는 기사의 정신을 버렸었다. 그 사실은 그녀에게 아직도 후회의 꼬리표였다. 그는 그런 그녀의 머리를 가만히 끌어당기며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 사람도 이해하고 있을 거야.”
“그럴까?”
“그래. 그리고 이제 다 끝났으니 우리의 결혼식이나 생각하자고.”
이제 남은 건 그들의 결혼식밖에 없었다.
에필로그: 더없이 완벽한 해피엔딩
날이 더 풀리자 본격적으로 카니벨라와 라이넨의 결혼식이 진행되기 시작했다. 초대장을 작성하고, 식장을 꾸미고, 드레스와 예복을 맞추며 하루는 바쁘게 흘러갔다. 그녀는 늘 일정이 끝나면 파김치가 되었다.
“휴, 이제야 한가해졌네.”
“그러게 말이야. 난 요즘 내 아내의 얼굴도 잊어버릴 지경이었다고.”
그의 투정 어린 말에 그녀는 그의 이마에 키스했다. 그녀는 오랜만에 한 스킨십에 기분이 좋아 헤실거리며 웃었다.
“이제는 좀 더 볼 기회가 많을 거야.”
“당연하지.”
둘은 서로를 보며 웃었다. 모든 슬픔이 씻겨 나간 그들의 표정은 한없이 밝았다. 소중한 사람을 잃었다는 분노와 슬픔은 그 어디에도 없었다.
“이제 정말 혼인이 얼마 남지 않았어.”
둘은 그렇게 말하며 정원을 거닐었다. 향긋한 꽃냄새와 불어오는 시원한 바람, 그리고 아름다운 풍경은 환상적이었다.
“마치 구름 위를 걷는 것 같아.”
“앞으로 자주 오자.”
그렇게 손을 잡고 걸어가는 그들의 앞에 에오라가 나타났다.
“카니벨라 님. 드레스 디자이너들이 왔습니다.”
그 말에 그녀는 얼굴을 찌푸렸다.
“아침에도 왔었잖아?”
“더 좋은 천들이 들어왔다고 반드시 한 번 맞춰 봐야 한답니다.”
“……그래, 알았어.”
그녀는 한숨을 쉬었다. 그녀의 눈에는 모든 드레스가 다 거기서 거기였다. 그래서 빨리 다 끝내고 다른 일을 하고 싶었다. 그러나 드레스 장인들은 그녀를 붙잡고 놓아줄 생각을 안 했다.
특히 과거 그녀의 옷을 지었던 카샤는 마치 인생의 역작을 만들겠다는 기세였다. 그리고 그녀는 그 열정이 부담스러웠다.
“카니벨라 님, 이 천은 마음에 드십니까?”
“이 디자인은 어떠십니까?”
“이 색의 드레스가 좋으십니까, 아니면 이 색의 드레스가 더 좋으십니까?”
“잠시 이곳에 발을 대주실 수 있으시겠습니까?”
“카나벨라 님께는 이 화장법이 잘 어울리십니다.”
“가만히 계셔야 드레스가 더 예쁘게 나옵니다.”
수도 없이 옷을 입었다 벗고, 원단들을 갖다 대는 그들을 보며 그녀는 마치 인형이 된 것 같았다. 힘이 쭉 빠지면서 왜 내가 이러고 있는지 상기하였다.
‘망할 과거의 나, 도대체 왜 거기서 탈출한 거야!’
비공식적으로 라이넨과 혼인했을 때와는 정말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할 일이 많았다. 드레스만 수십 벌을 입었고, 복잡한 절차를 외우며 머리가 아팠다. 그녀는 혼인이라는 것이 이리 복잡한 것인지 잊고 있었다.
마음만 같아서는 그에게서 도망쳤던 과거의 자신을 죽도록 패고 싶었다.
라이넨 역시 그녀보다는 한가했으나 꽤 바쁜 시간을 보냈다. 그녀 대신 궁의 일들을 주도하면서도 그녀의 옷 디자인을 구경하기 위해 늘 찾아왔다. 한시라도 떨어지고 싶지 않아서였다.
“두근거리는데?”
“그래, 네가 그렇게 말하면 다 괜찮아지더라.”
이 많은 과정이 힘들었지만 그와 동시에 즐겁기도 했다. 예전에 했던 혼인과는 다르게 그와의 결합을 온 대륙에 알리는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 역시 즐거웠다. 이제는 그녀와 함께 있어도 아무도 뭐라 하지 못하리라.
시간이 지나고 혼인 전날 밤이 되었다. 평소에는 같이 잤으나 오늘은 그러지 못했다. 그는 입을 내밀며 투덜거렸다.
“오늘은 떨어져서 자야 한다니…….”
“어쩔 수 없잖아. 제국 풍습이니까.”
“이런 풍습 따위 무시해 버리겠어!”
“안 돼. 당장 네 궁으로 돌아가.”
제국에는 혼인 전날에 신랑과 신부가 같이 들어가서 자면 안 된다는 풍습이 있었다. 만약 같이 자게 된다면 질투의 신이 그것을 시기해 앞으로의 미래에 먹구름이 잔뜩 낀다고 사람들은 믿었기 때문이다.
“아니, 그런 신이 이 세상에 어디 있어?”
그러나 마력이라는 것을 보유하게 된 이후, 라이넨은 그런 풍습이 정말이지 말도 안 된다고 생각했다. 그가 아는 신에 가장 가까운 존재는 나이티 하나뿐이었다. 그러나 그녀는 그런 그의 투정을 들어주지 않았다.
“지금 당장 안 가면 혼인 미룬다?”
“엑? 가면 되잖아!”
“내일 봐.”
그녀는 그렇게 말하며 문을 닫았다. 그녀의 축객령에 그는 터덜터덜 걸어 나왔다. 그는 한숨을 쉬며 중얼거렸다.
“그래, 너는 질투의 신이 충분히 질투할 만한 모습의 사람이니까 그렇다고 생각할게.”
실제로 모든 근심거리가 사라지자 그녀는 더 아름다워졌다. 늘 달고 다니던 무표정 대신 미소를 지었다. 그런 그녀의 모습에 모두들 찬양했다.
구불거리는 금발 머리와 바다를 품은 듯한 벽안, 하얗지만 생기가 넘치는 얼굴과 새초롬한 눈매, 그리고 아이를 낳았다고는 믿기 어려울 만큼 늘씬한 몸과 쭉쭉 뻗은 팔과 다리까지. 그녀는 정말 아름다웠다.
대륙 최고의 미녀라고 칭송받던 란시엔의 죽음 이후, 사람들은 그녀를 대륙제일미에 올려야 한다고 난리를 칠 정도였다.
그는 그런 반려자가 뿌듯했지만 단 1분 1초라도 보지 못하면 아쉬웠다. 그녀는 이런 그의 심정을 알까? 그는 한숨을 쉬었다. 그녀의 침실 불이 꺼지는 것을 보며 그는 자신의 궁으로 돌아왔다.
어서 빨리 내일이 왔으면 좋겠다.
* * *
드디어 대망의 혼인날.
궁 전체가 눈 뜰 새 없이 바빴다. 카니벨라와 라이넨의 거처에 배정된 시녀들은 아침부터 예식 준비를 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그리고 다른 궁의 인원들은 하객으로 온 귀족들을 안내하느라 여념이 없었다.
귀족들은 혼인을 진행할 정원으로 안내받았다. 정원은 매우 아름다웠다. 꽃으로 엮어 만든 문이 제일 먼저 그들을 반겼고, 여러 곳에 많은 꽃들이 엮여 아름다운 색감을 발휘했다. 그리고 장의자 양옆에는 화분들이 나열되어 있었다.
“아름답네요.”
너무 많은 꽃들이 한꺼번에 있으면 지겨울 만도 했지만 전혀 그렇지 않았다. 오히려 여러 가지의 꽃들이 하나로 어울려 조화를 이루었다. 너무나도 아름다웠다. 귀족들은 눈과 코가 즐거웠다.
“과연 황제 폐하의 혼인식이군요.”
“그분이 부럽네요.”
“나중에 제 딸이 이렇게 혼인식을 치르고 싶다고 할까 무섭군요.”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귀족들은 담소를 이루었다. 그리고 그걸 위에서 바라보고 있는 카니벨라는 그제야 뭔가 긴장이 되기 시작했다. 수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는 것을 보니 드디어 오늘 라이넨과 혼인을 한다는 것이 실감났다.
“카니벨라 님.”
그때, 문이 열리며 유키르와 카일라가 나타났다.
“혼인 축하드려요.”
“고마워요.”
“아니에요. 여기 주문한 부케.”
유키르는 꽃을 내밀었다. 최근 레미우스 왕국은 원예 사업을 통해 서서히 떠오르고 있었다. 이번 혼인 때 쓰인 꽃들 대부분이 레미우스 왕국 산 물건이었다. 그녀는 아름다운 색상의 꽃들로 엮인 부케를 받고 냄새를 맡아 보았다.
“고마워요.”
“제 건 나중에 열어 보아요.”
카일라 또한 그녀에게 선물상자를 내밀었다. 그녀는 나중의 즐거움을 위해 뜯어보지 않기로 했다. 그때, 오랜만에 본 반가운 얼굴 마리가 루카스와 함께 등장하였다.
“마리!”
“루시, 오랜만이에요.”
“그러게요. 궁에 나가고 난 이후에는 좀처럼 보기 힘들었는데.”
마리와 루카스는 라이지가 정식으로 카니벨라와 라이넨의 딸로 입적되자 선황의 도움으로 수도에 큰 카페를 차렸다. 주인 부부가 차기 황후의 친구라는 소문이 나 카페는 연일 사람이 넘쳤다. 그래서 정말 오랜만에 시간을 내서 올 수 있었다.
그들이 출궁할 당시, 그녀는 그들과 계속 함께 있고 싶었지만 황궁과 맞지 않다는 그들의 말을 존중했다. 친구의 행복이 곧 그녀의 행복이었다.
대신, 시간이 날 때마다 입궁해 달라고 말하며 아쉬움을 달랬다.
“아니면 제가 마리네 카페로 갈게요.”
“오실 시간이 없으실 거 같은데 제가 갈게요.”
“고마워요, 마리.”
그들은 오랜만에 만나 반가운 마음에 끝없는 담소를 나누었다. 그녀는 오랜만에 본 친구의 표정이 즐거워 보여 기분이 좋았다.
그때, 시녀가 와서 그녀에게 나가야 함을 알렸다. 그녀는 다소 긴장한 표정으로 일어났다. 유키르, 카일라, 마리 모두가 그녀를 응원했다. 이제 라이넨과 진정한 결합을 선포하기 위해 나가야 할 때였다.
“신랑이신 황제 폐하 등장하십니다!”
라이넨이 등장했다. 검은 머리를 살짝 뒤로 밀어 이목구비가 잘 드러났다. 검은 예복이 그의 몸에 딱 붙어 그의 매력을 더욱 부가시켰다. 귀족 영애들은 그런 그의 모습이 너무 아름다워 눈이 멀어 버릴 것만 같았다.
“와아아!”
그의 등장에 환호하던 사람들은 이윽고 카니벨라가 등장하자 더욱 환호했다.
“이 제국에 축복을!”
“두 분께 행복을!”
올린 금발 머리는 그녀를 더욱 우아하게 보이도록 했고, 목에 걸린 목걸이는 햇빛에 반짝였다. 또한 베일을 씌운 그녀의 분위기는 신비로웠고, 순백의 드레스 역시 잘 어울렸다.
그녀의 등장은 마치 천사가 이 땅에 강림한 듯한 충격을 주었다. 모두 그녀의 아름다움에 압도당해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왔어.”
그녀가 그의 곁에 섰다. 그러자 태후가 그들에게 말했다.
“이 제국의 태후 이니라스 폰 루미니르는 황제 라이넨 폰 루미니르와 황후 카니벨라 폰 루미니르의 혼인을 축하하는 마음으로 이 자리에 섰다. 그대들은 지금 맹세의 키스를 하라.”
맹세의 키스. 앞으로 행복하게 살겠다는 일종의 의식이었다. 그는 키스하기 전에 베일 속으로 보이는 그녀의 눈동자를 보며 말했다.
“난 앞으로 너와 함께 있으면 어떤 시련도 이겨 낼 수 있어.”
“마찬가지야.”
그는 그녀의 베일을 벗기며 키스했다. 이 세상 모든 달콤한 것들을 먹어도 이것보다는 달지는 않으리라. 그녀는 이 시간이 영원히 끝나지 않았으면 했다. 그들의 키스에 하객들이 환호했다.
그리고 곧장 반지 나눠 끼기 순서가 돌아왔다. 반지는 매우 아름다웠다. 다이아몬드는 화려하게 빛났고, 세공은 섬세했다. 서로의 손에 매우 잘 어울렸다.
드디어 혼인 순서가 끝났다. 그들은 환호를 받으며 퇴장했다. 옆에서 라이지를 포함한 여러 화동들이 열심히 꽃잎을 던져 주고 있었다. 마치 꽃눈이 내리는 것 같은 풍경에 사람들은 눈을 뗄 수 없었다.
둘은 서로를 바라보았다. 서로의 웃는 모습을 보며 오늘만큼 행복한 내일이 있을 것이라고 감히 확신했다.
그렇게 혼인식이 끝났다.
혼인식이 끝나자 혼인 기념 파티가 열렸다. 이 파티는 모든 귀족들이 신분에 관계없이 즐길 수 있다는 점에서 환호를 많이 받았다. 귀족들은 체면도 다 벗어던지고 이날만큼은 마음껏 놀았다.
“이름이 무엇입니까, 아름다운 영애.”
“그걸 왜 물으시는 거죠?”
“매우 아름다운 영애의 모습에 제 눈이 멀어 버릴 것만 같아서 알고 싶었습니다.”
작업을 거는 자들도 있었지만 춤을 추거나 어울려 대화를 하는 자들도 있었다. 또한 대륙의 각종 진귀한 음료를 마시거나 한쪽에 쌓여 있는 여러 종류의 음식을 먹기도 했다. 대륙 최고의 요리사들이 아낌없이 실력을 발휘한 만큼 매우 맛있었다.
또한 황궁 악단은 이날을 위해 열심히 갈고닦은 실력을 유감없이 발휘하고 있었다. 음악과 춤이 어우러진 회장의 모습은 매우 아름다웠다. 주위에는 자연과 어우러지고 또한 촛불들이 타올라 분위기가 매우 묘했다.
“정말 아름다운 광경이야.”
“여기 데려오기 잘한 것 같은데.”
“응, 정말 잘했어.”
그러나 정작 파티의 주인공들은 그 현장에 없었다. 지금 그들이 있는 곳은 성 꼭대기였다. 라이넨이 마법을 써서 순간 이동을 한 것이었다.
“앞으로 이런 파티를 나름 자주 열어야겠어.”
늘 자신에게 어떻게든 이득이 되게 하기 위해 머리를 굴리던 귀족들이 신나게 노는 모습은 그들에게 또 다른 즐거움과 동시에 놀라움을 안겼다.
“저기 봐.”
성 멀리서 보이는 백성들의 모습에 그녀는 손가락으로 그곳을 가리켰다. 백성들 역시 축제를 하고 있었다. 그들이 예전에 잠행으로 즐겼던 많은 것들을 사람들이 즐기고 있었다.
“백성들도 우리의 혼인을 축하해 줘서 다행이야.”
“그러게.”
그렇게 그들만의 축제를 즐기는 백성들을 보며 그들은 기분이 좋았다. 그리고 지금 함께 있는 것도 좋았다.
“근데 왜 여기로 오자고 한 거야?”
“예전에 어마마마와 형님께서 돌아가셨을 때 너무 외로워서 온 궁을 헤맸어. 그리고 혼자 있을 수 있는 곳을 찾았는데 거기가 바로 여기였던 거지.”
그는 멀리 보이는 별을 바라보았다. 두 개의 별이 마치 어머니와 형님인 것 같았다. 그는 씩 웃었다.
“나중에 사랑하는 사람이 생기면 꼭 이곳으로 데려오고 싶었는데 그게 지금이 되었네.”
“날 여기 데리고 와 줘서 고마워.”
그녀는 싱긋 웃었다. 이미 평소의 모습으로 돌아온 그녀지만 아름다웠다. 그는 그녀의 얼굴을 황홀하다는 듯이 바라보았다. 그렇게 그들의 시선이 얽혔다. 그녀의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랐다.
퍼엉!
그때, 그들이 처음 만났던 날처럼 갖가지 색깔의 아름다운 불꽃들이 터졌다. 너무나도 아름다운 불꽃을 보며 그들은 손을 잡았다. 바람이 불며 그들의 머리를 흩뜨렸다.
“아…….”
누구의 소리인지는 모르겠다. 서로를 바라보는 시선에 불꽃이 튀었고, 자연스럽게 서로의 입술로 향했다. 아까 혼인식 때 했던 것은 부족하다는 듯 그들은 격렬하게 서로의 숨을 탐했다. 입술이 더 붉어졌고, 서로의 모든 것을 탐하는 그들의 표정은 더욱 농밀해졌다.
“혼인 기념으로 라이지 동생 만들어 줘야겠는데?”
라이넨이 능글맞은 표정으로 말했다. 그녀는 그런 남편의 고약한 말을 입술로 덮었다. 솜사탕보다 더 달콤하고, 저 밤하늘보다 더 아름다운 숨결이 서로를 감쌌다. 두 사람의 옷이 구겨졌다.
“오늘은 끝까지 가 볼 거야. 괜찮겠어?”
그가 그녀에게 도발하듯 말했다. 그녀는 낭랑한 목소리로 말했다.
“당연하지. 자신 있어.”
별들이 하늘 위에서 그들의 진정한 결합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깍지 낀 그의 손을 보며 생각했다.
정말 더없이 완벽한 해피엔딩이라고.
『신데렐라의 눈물』 완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