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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한부 폐태자비는 살아있다-1화 (1/136)

< 시한부 폐태자비는 살아 있다 >

1화. 폐위(1)

“오늘 드디어 황후궁으로 옮겨가시겠군요.”

오벨리아의 고운 머리칼을 빗겨 주던 시녀가 말했다.

아무것도 없던 7황자 알렉산드로와 결혼한 지 8년, 그 많은 황자 중에서 그가 황태자위에 오른 지 3년만의 일이었다.

5년 만에 오벨리아는 황자비에서 황태자비가 되었고, 또 다시 3년 만인 오늘 드디어 황후가 될 예정이었다.

“폐하도 참, 어차피 오벨리아 님의 것인데 미리 황후궁으로 거처를 바꿔 주셨다면 좀 좋아요.”

황태자비궁의 시녀장, 조안나가 작게 투덜거렸다.

그녀는 오벨리아에게 즉위식을 치른 후 황후궁으로 가는 게 좋겠다고 권고하던 알렉산드로의 행동이 상당히 서운했던 모양이었다.

“폐하를 탓하면 못 써, 안나. 워낙 완벽한 것을 좋아하시는 분이잖니.”

오벨리아가 그런 조안나를 가볍게 책망했다.

어차피 알렉산드로의 유일한 비는 그녀뿐이었다.

일찍 가든 늦게 가든 황후궁은 결국 오벨리아의 것이 될진대, 조금 더 기다리는 것쯤이야 괜찮았다.

“오벨리아 님은 서운하지도 않으세요? 폐하께서는 일찍이 황제궁으로 옮겨가신 데다, 그간 즉위식 준비 때문에 바쁘시다고 황태자비궁에는 잘 찾아오지도 않으셨잖아요.”

조안나가 속 좋게 알렉산드로를 감싸는 제 주인을 보며 작게 한숨 쉬었다.

제 주인이지만, 정말이지 오벨리아는 알렉산드로를 너무 사랑했다.

“폐하야 황제로서 정무를 보셔야 했으니 어쩔 수 없지.”

선황이 양위의 뜻을 밝힌 후, 알렉산드로는 곧바로 황제궁에 기거하게 되었다.

황제의 집무실에서 일을 봐야 했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그래서 오벨리아는 조안나의 말대로 알렉산드로가 자신의 궁을 찾지 않는 일도 이해했다.

8년간 그를 보좌해 왔으니, 그녀 또한 그가 얼마나 바쁜 사람인지 잘 아는 탓이었다.

“그것도 그래요. 오벨리아 님이 지금까지 황태자비로서 내궁의 업무를 다 보셨는데 잠깐 쉬는 중이신 게 뭐가 문제라고….”

8년간 알렉산드로를 보좌하며 오벨리아의 몸은 날이 갈수록 약해졌다.

선황의 1, 2대 황후는 모두 죽어 없었다.

그렇기에 황태자비가 된 후 내궁 일은 전부 오벨리아의 차지였다.

그로 인해 애초에 연약했던 몸으로 매번 날밤을 새워 그를 도왔으니 어쩌면 당연한 결과였다.

그래서 선황이 양위의 뜻을 밝힌 후 오벨리아는 휴식 중이었다.

“그만, 안나. 좋은 날이잖니.”

오벨리아가 조안나의 말을 끊었다.

요 근래 알렉산드로가 살짝 무심하여 섭섭한 것은 그녀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군주는 본디 바쁜 법이었다.

그 긴 시간을 함께해 온 자신이 아니면 알렉산드로를 이해해 줄 사람이 누가 있겠는가.

오벨리아는 알렉산드로를 믿었다.

8년간 오직 오벨리아에게만 충실했던 알렉산드로였다.

잠시 바빠 조금 신경을 못 쓸지라도, 영원토록 그녀를 서운하게 할 사람은 아니리라 믿었다.

쾅!

그러나 믿음은 대개 가장 굳건한 순간에 철저히 어그러지는 법이었다.

큰 소리를 내며 열린 황태자비의 방문 사이로 기사들이 쏟아져 들어왔다.

“이게 뭐 하는 짓…!”

“비켜!”

“악!”

놀라 기사들을 막아선 조안나를 맨 앞의 기사가 거칠게 밀쳤다. 황태자비궁의 시녀장을 대하는 것치고는 대단히 무례한 행동이었다.

“지금 이 무얼 하는 짓인가!”

오벨리아가 자리에서 일어나 호통 쳤다.

단언컨대 누구도 그녀를 이런 취급할 수 없는 법이었다.

개국 공신 가문인 공작가의 사랑받는 막내로 태어나 황자비가 되었다. 그렇게 남편을 황태자로 만들어 황태자비가 되었고, 이제는 황후의 자리에 앉을 몸이었다.

그런데 지금껏 누가 감히 오벨리아의 앞에서 이런 무례를 범했겠는가.

“자중하시오, 오벨리아.”

그러나 그런 오벨리아의 분노를 막아서는 이가 있었다.

그녀의 사랑하는 부군, 알렉산드로였다.

“…폐하?”

오벨리아의 목소리에 의아함이 가득했다. 마치 저 형세는 알렉산드로가 기사들의 편을 들고 있는 듯하지 않은가.

“가서 오벨리아의 관을 벗겨라.”

알렉산드로가 기사에게 명했다.

그는 오벨리아의 의문을 해결해 줄 생각이 전혀 없는 모양이었다.

“폐하! 왜 이러십니까!”

무려 8년 만에 쓰게 된 황후의 금관이었다.

그런데 쓴 지 채 하루도 지나지 않아 강제로 벗겨지게 생긴 것이다.

“순순히 내 뜻에 따르는 게 좋을 것이오, 오벨리아.”

“폐하!”

오벨리아가 납득하지 못하고 소리쳤다.

오늘은 황제와 황후의 즉위식이 있는 날이었다.

이런 날, 그녀에게서 황후의 관을 빼앗는다는 것은 그녀를 황후로 인정하지 않는다는 말이나 진배없었다.

이 자리에 오르기 위해 들여 온 공을 생각하면, 오벨리아에게 가해지는 지금의 처사는 터무니없었다.

“아니 됩니다! 황제 폐하께서 어찌 황후 폐하께 이러실 수….”

조안나가 오벨리아에게 다가오는 기사를 막아서며 외쳤다.

그러나 그녀는 제가 하고자 했던 말을 끝까지 마칠 수 없었다.

그 순간 조안나에게서 피 분수가 솟구쳤기 때문이다.

“누가 황후라더냐.”

조안나를 직접 베어 피가 뚝뚝 떨어지는 검을 든 알렉산드로가 말했다.

주인의 의지를 잃은 조안나의 몸이 무너져 내렸다.

“아아악…!”

차마 믿을 수 없는 광경에 오벨리아가 비명을 지르며 주저앉았다.

조안나는 오벨리아에게 소중한 사람이었다. 둘은 공작가에서부터 자매처럼 함께 자란 사이였으니까.

무려 8년을 함께해 온 그녀의 부군이 그 사실을 모를 리가 없었다.

“안, 나… 조안나….”

오벨리아가 바닥을 기어 조안나에게 다가갔다.

“안나, 일어나… 제발….”

즉위식을 위하여 화려하고 곱게 치장된 얼굴 위로 눈물이 투두둑 떨어졌다.

금수가 놓인 새하얀 황후의 의복이 바닥에 낭자한 피로 붉게 물들어갔다.

오벨리아가 조안나의 팔을 붙들어 흔들었으나, 그것은 더 이상 조안나가 아닌 시체에 불과했으므로 눈을 떠 제 주인을 봐줄 리 없었다.

“체통을 지키시오, 오벨리아.”

알렉산드로가 쯧 혀를 차며 말했다.

그 소리에 오벨리아가 멍하니 고개를 들어 제 부군을 바라봤다.

그 자리에 서 있는 상대는 더 이상 자신의 남편이 아닌 것만 같았다.

오벨리아가 멍하니 자신을 바라보기만 하자, 알렉산드로가 휙 등을 돌렸다.

“오벨리아 카테리안느를 냉궁에 집어넣어라!”

“제게 어찌 이러십니까, 폐하…!”

오벨리아가 대노하여 소리쳤다.

그들은 황위 전쟁에서 무려 8년간 싸운 부부다.

그리고 오늘은 알렉산드로가 마침내 만인의 앞에서 자신이 황제임을 선언하는 영광된 날이었다.

사랑했고 믿었다.

그런 남자가 가장 기뻐야 할 날에, 자신을 배반했다.

“조용히 냉궁으로 향하시오, 오벨리아.”

그러나 오벨리아의 부군은 그녀의 이런 심정을 이해해 줄 마음이 전혀 없는 모양이었다.

“그렇지 않다면 대가를 치르는 것은 그 시녀 하나로 끝나지 않을 터이니.”

알렉산드로의 눈길이 조안나에게 닿았다.

그 순간 오벨리아는 그가 본보기로 조안나를 죽였음을 빠르게 깨달았다.

‘황태자비.’

그리고… 더 이상 알렉산드로가 자신을 황태자비로 지칭하고 있지 않다는 사실 또한 알아차렸다.

오벨리아는 빠르게 한 가지 사실을 인지했다.

알렉산드로는 자신을 폐위시킬 작정이다.

“알렉산드로!”

그대, 어찌 이리 나를 배반하시는가.

오벨리아가 온 분노를 담아 절규했다.

“그 시녀가 별반 중요하지 않았던 모양이오.”

그러나 오벨리아의 들끓는 감정은 알렉산드로의 빙벽을 넘지 못했다.

그에게서 흘러나온 말은 협박이었다.

이 이상 반항한다면, 조안나보다도 소중한 자들을 죽이겠노라는.

“아, 아아….”

오벨리아가 멍하니 신음했다.

그 순간 그녀의 머릿속에 카테리안느 공작가의 가족들이 떠오른 것은 절대 우연이 아니었다.

알렉산드로가 오벨리아에게 상기시키고자 했던 대상들이, 바로 그들일 테니까.

8년간 믿고 산 남편이 이 사태를 만든 것도 모자라, 제 가족을 두고 협박하고 있었다.

오벨리아는 더 이상 버틸 수 없었다.

“태자비 전하!”

오벨리아가 의식을 잃고 쓰러진 것은 어쩌면 지극히 당연한 일이었다.

***

서늘한 감각에 오벨리아는 눈을 떴다.

그러자 아무 무늬도 없고, 빛조차 희미한 작은 전등뿐인 밋밋한 천장이 눈에 들어왔다.

냉궁이었다.

말만 궁일 뿐, 실상은 폐위시킬 자들을 가둬 놓는 곳에 불과한.

넋을 놓고 주변을 살펴보던 오벨리아가 흠칫했다.

그녀의 옷과 몸을 물들인 핏자국이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하하… 하… 하하하!”

오벨리아가 실성한 사람처럼 웃음을 터트렸다.

입은 웃고 있는데 눈에서는 눈물이 흘렀다.

아마도 알렉산드로는 그녀가 기절하자마자, 어떤 조치도 없이 그녀를 냉궁에 덜렁 버려 둔 모양이었다.

그 사실 앞에 치가 떨렸다.

똑똑.

그러나 분노를 표할 새도 없이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오벨리아는 그것이 알렉산드로일 것이리라 생각했다.

귀족들이 배우는 예법에서 노크는 항상 세 번이 기본이었다.

그리고 두 번만 두드리는 것은 오직 황족뿐이었다.

황위 다툼 끝에 이 황궁에 남은 것은 선황과 알렉산드로 그리고 오벨리아뿐이었다. 그러니 병환 중인 선황이 아니라면 알렉산드로인 것이 당연했다.

그러나 허락도 없이 그 사이로 들어온 사람은 알렉산드로가 아니라 오벨리아의 사촌 자매 아그네스였다.

“네가 어떻게 이곳에…?”

아그네스 이멜리언.

그녀는 8년 전, 오벨리아가 전쟁터에서 구해 와 카테리안느 공작가의 친척 집안에 직접 입적시켜 준 사람이었다.

“황태자비 전하, 아니….”

아그네스가 화사하게 웃으며 다가왔다.

그러나 분명 그 혀끝에 걸린 것은 날카로운 칼날이었다.

“폐비, 오벨리아 카테리안느.”

“지금, 뭐라고….”

오벨리아의 목소리가 떨렸다.

아무리 잘못을 하여 폐위를 한다고 하더라도 절차라는 게 있었다.

그리고 그녀의 가문은 무려 개국 공신인 공작가였다.

카테리안느 공작가가 버젓이 버티고 있는데 하루 만에 폐위라니,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하면 투기로 황손을 해하려 시도를 하시고도 살아남으실 줄 아셨습니까?”

아그네스의 말에 오벨리아는 잠시 멍하니 그녀를 바라봤다.

오벨리아의 목소리가 자신도 모르게 높아졌다.

“황손이라니, 내가 아이를 잉태한 적이 없거늘…!”

3년 전과 1년 전, 오벨리아는 아이를 유산했다.

합방일 외에도 금실이 좋기로 소문나 종종 밤을 함께 보내던 황태자 부부였으나, 두 번의 유산 탓에 그녀는 회임이 어려운 몸이 되었다.

그런 상황에서 황손을 시해하려 하다니.

황손이 어디 있어서 오벨리아가 아이를 해한다는 말인가?

“회임은 혼자만 하신답니까?”

아그네스의 입꼬리 끝에 픽, 비웃음이 내걸렸다.

그 순간 오벨리아의 눈이 반사적으로 아그네스의 배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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