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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한부 폐태자비는 살아있다-2화 (2/136)

2화. 폐위(2)

“말도 안 돼…!”

오벨리아가 히스테릭하게 소리쳤다.

“참으로 우습지요… 그토록 홀로 영민하신 척은 다 하시던 분께서, 제 사내의 마음이 다른 곳으로 향해 있는 것을 수년 동안 모르시다니.”

아그네스의 빈정거림이 오벨리아의 귓전을 때렸다.

제게 충실했다고 믿었던 남편이 실은 다른 여자를 두었다는 사실은 뼈를 저미는 듯한 고통이었다.

그리고 그 상대가 진실로 자매처럼 여겼던 아그네스였기에 더더욱 그러했다.

“내 너를 직접 구명하였어! 그런데 네가 어떻게 나를 이토록 배반할 수가…!”

한평생을 우아한 귀족으로 살아왔던 오벨리아가 아그네스에게 달려든 것은 전혀 그녀답지 못 한 일이었다.

“푸하하하하하하!”

그러나 마치 기다렸다는 듯 그런 오벨리아를 피한 아그네스에게서 돌아온 것은 마치 광대라도 본 듯한 폭소였다.

오벨리아는 달려들던 힘을 이기지 못해 벌러덩 넘어진 채로, 아그네스를 올려다봤다.

“아아, 그토록 고귀한 척 살아가던 너도 밑바닥에 떨어지면 결국 나와 같은 인간에 불과한 게지.”

그 순간 아그네스의 두 눈에 희열이 가득 차올랐다.

“추해라.”

아그네스의 한 마디가, 오벨리아를 비참함에 떨게 했다.

오벨리아는 그 순간 홀로 바닥에 나뒹굴고 있는 자신의 모습이 얼마나 우스울지 상상했다.

그 상상 속의 자신은 지독히도 끔찍했다.

“오벨리아, 네가 내게 한 적선?”

오벨리아와 시선을 맞추어 무릎을 굽혀 앉은 아그네스의 눈동자가 광기로 번들거렸다.

오벨리아의 몸이 갑작스레 냉궁의 싸늘한 한기를 느끼고 흠칫 떨렸다.

지금껏 접해 본 적이 없던 낯선 것을 마주한 한 인간의 본능적인 반응이었다.

“네가 진짜로 나를 위했다면, 왜 그 대단한 공작가가 아니라 한낱 친척 가문 따위에 나를 입적시킨 거지?”

후작가나 공작가 정도 되면 원로회가 존재했다.

그들은 대단히 고지식해서 아무리 가문의 피가 섞였더라도 사생아조차 쉬이 인정해 주는 법이 없었다.

그러니까 오벨리아로서는 줄 수 있는 것 중 가장 좋은 것을 건네었을 뿐이었다.

아그네스의 말대로 멸시해서 따위의 이유가 아니라.

“그것은…!”

아그네스가 날카롭게 오벨리아의 말을 끊어냈다.

“변명하지 마!”

긴 손톱을 곱게 다듬은 그녀의 손이 오벨리아의 머리채를 낚아 쥐었다.

“윽!”

뾰족한 손톱이 두피를 파고드는 고통에 오벨리아가 몸부림쳤다.

그러나 그녀는 이른 아침부터 심신을 대단히 소모하여 고단한 몸이었다.

게다가 그 상태로 온기 하나 없는 냉궁에 방치되었으니, 몸이 괜찮을 리가 없었다.

그에 반해 아그네스는 혈색부터 매우 건강했으므로 오벨리아는 끝내 그녀의 손을 뿌리치지 못했다.

“그 대단하신 카테리안느에 나 같은 평민을 들여 놓을 수는 없었겠지.”

따끔한 아픔에 찌푸려졌던 오벨리아의 눈이 크게 떠졌다.

평민이라니, 처음 듣는 이야기였다.

오벨리아가 아는 아그네스는 론체스터 제국의 황위 전쟁 중 운 없게 거기에 휘말려 멸망한 속국의 왕녀였으니까!

“너희들은 너희가 대단한 줄 알지. 우습기도 해라. 대단한 건 너희가 아니라, 너희가 가진 돈과 권력일 뿐인데!”

오벨리아는 어안이 벙벙했다.

아그네스는 지금 그녀에게 분노하고 있었다.

“내가 대체 네게 무엇을 그리 잘못해서…?”

오벨리아가 중얼거렸다.

냉정하게 따지자면 결국 제국의 황위 싸움에서 이득을 보려 끼어든 것은 왕국들이었다.

전쟁판에서 패를 잘못 골라 패배한 것은 결국 선택한 자의 책임이지 않은가.

왕국의 비극은 왕국의 지도자들이 책임져야만 했다.

그래도 대륙을 뒤흔든 제국의 싸움이 남긴 잔흔들이 너무 참혹해서, 그래서 오벨리아는 외면하지 못했을 뿐이었다.

나라가 선택했다고 하여 개인이 선택한 것은 아니니까.

바꿔 말하자면, 결국 그 참혹함에 신경을 기울인 것은 오벨리아뿐이라는 이야기이기도 했다.

그런데 무엇을 그리 잘못하여… 나는 너의 미움을 이토록이나 받는가.

그녀는 정말이지 이해할 수 없었다.

“남의 나라를 짓밟은 주제에 겨우 그깟 백작 집안 하나 던져 줬다고 용서받으리라 생각했어? 욕심이 많네, 오벨리아.”

“아그네스, 나는….”

“뭐, 됐어. 네 그런 위선 덕에 나는 이 자리에까지 오를 생각도 할 수 있었으니까.”

그러나 아그네스는 마치 오랜 세월 생각이 굳어진 사람처럼 오벨리아에게 변명할 기회조차 주지 않았다.

그 굳건한 단호함 앞에서 오벨리아는 잠시 분노조차 잊어버렸다.

“우리의 비극이 진실로 안타까운 듯 구는 너를 사람들은 칭송했지. 나는 그게 참을 수 없이 역겨웠어.”

아그네스는 진심으로 오벨리아를 싫어했다.

함께해 온 세월 간 전혀 드러나지 않았던 마음이었다.

“그렇지만 봐. 결국 바닥에 떨어지면… 너도 고상 따위 떨지 못할 별 볼 일 없는 사람인 것을.”

아그네스가 자신의 추락을 아주 오랫동안 바라왔음을, 오벨리아는 오늘에서야 깨달았다.

“아 참, 네 처형식은 최대한 빠르게 이루어질 거야.”

아그네스가 돌연 짝 소리 나게 두 손바닥을 마주하며 발랄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오벨리아의 머릿속에서 태풍이 몰아쳤다.

“그게 무슨…!”

오벨리아의 가문은 제국의 개국 공신이자, 귀족 가운데 가장 권세가 높기로 유명한 카테리안느 공작가다.

그런데 어떻게 이리 빨리도 처형이 정해진다는 말인가?

그러나 아그네스의 다음 말이 떨어지자, 오벨리아는 머리를 망치로 맞은 듯이 멍해졌다.

“다행이지, 시기적절하게 너를 보호해 줄 카테리안느 공작이 죽었으니까.”

그녀의 아버지가 죽었다.

아그네스는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만약 오벨리아가 양철 인형이었더라면 그를 향해 고개를 드는 그녀의 몸짓에서 끼긱 매끄럽지 못한 소리가 났을 것이 분명했다.

“설마, 알렉산드로가 아버지를 죽인… 아니야, 그럴 리가… 아니지?”

오벨리아의 두 눈이 정체 없이 흔들렸다.

그녀는 너무 오랜 세월 알렉산드로를 사랑해 왔다.

그가 자신을 배신했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끝내 설마 하는 가정을 버리지 못했기 때문이다.

“뭐가? 카테리안느 공작은 그저 우연한 마차 사고로 죽었을 뿐이야.”

아그네스가 능청스레 말했다.

그러나 그녀의 입가에는 적나라한 비웃음이 매달려 있었다.

마차 사고는 아그네스의 말대로 수많은 귀족에게도 우연히, 무수히 일어나는 일이었다.

그러나 그녀는 오벨리아가 건넨 질문의 의미를 전혀 모르는 척하면서 실상 답을 내놓았다.

“아아악! 너희가 어떻게 나한테 이렇게까지 해! 너희가 어떻게!”

그 순간 오벨리아가 다시 아그네스에게로 달려들었다.

어떻게든, 어떻게든 저 목을 조르고 싶었다.

철썩!

그러나 아그네스가 내려친 손에 뺨을 맞고 나동그라진 것은 오벨리아였다.

평생 드잡이질 한 번 해 보지 않은 그녀가 최악의 몸 상태로 달려들었으니 결과는 처음부터 빤한 셈이었다.

“회임한 사실을 숨기기 위해 배에 오랫동안 붕대를 감고 있다 보니 아이에게 좋지 않은 영향이 갔어. 아이가 거꾸로 자리 잡아 이틀 전 유산을 할 뻔했고.”

아무리 황위 전쟁에서 승리했다지만 알렉산드로는 이제 막 황제가 된 사람이었다.

게다가 선황도 살아 있다.

그러니 자신만의 세력이 아니라, 황실 내에 세력을 완전히 휘어잡는 것은 또 다른 이야기였다.

그래서 말이 새어나가지 않게 아그네스를 의원에게 보이는 데에는 한계가 있었다.

그러니까 더는 기다릴 수 없어서 오벨리아의 아버지를 비명횡사시켰다는 말이었다.

오벨리아는 사람이 증오심에 목이 졸릴 수도 있다는 사실을 처음으로 깨달았다.

“어떻게… 아버지가, 이렇게, 허망하게….”

오벨리아가 넋이 나간 것처럼 중얼거렸다.

그녀가 제 아버지의 안위를 걱정하지 않은 데에는 이유가 있었다.

오벨리아의 아버지는 무려 카테리안느 공작이었다.

기사는 아니었어도 어느 정도 검술을 할 줄 알았을 뿐더러, 아버지에게 붙는 호위만 해도 여러 명이었다.

그런데 도대체 어떻게 마차에 손을 쓴 것인지 알 수 없었다.

게다가 오래도록 알렉산드로를 따랐던 세력의 주축은 카테리안느였다.

그 세력을 와해시킬 생각이 아닌 이상, 알렉산드로가 이토록 성급하게 명분도 없이 카테리안느 공작을 죽여 버릴 거라고는 상상하지도 못했다.

“알렉이 공작위를 라이너스에게 주기로 했거든.”

그러나 더 끔찍한 것은 이어지는 아그네스의 말이었다.

“고귀한 척하던 네 집안도 어찌나 콩가루던지! 네 둘째 오빠가 욕심이 많아서 우리로서는 참 다행이었어.”

카테리안느 공작가에는 오벨리아의 위로 두 명의 오빠가 있었다.

그중에 공작가의 첫째인 일리어스는 카테리안느 부부 사이에 오랫동안 아이가 생기지 않아 먼 친척 가문에서 입양한 아이였다.

오벨리아가 아그네스를 카테리안느에 입적시키려는 시도조차 하지 않았던 이유기도 했다.

그녀의 부모에게 듣기로, 공작가의 피가 섞였는지조차 확실하지 않다는 이유로 가문의 원로들의 어마어마한 반대에 부딪혔다고 했으니까.

그렇게 기나긴 반대 끝에 힘들게 데려온 아이이기에 카테리안느 부부는 일리어스를 더 소중히 여겼지만.

“네 둘째 오빠는 친자식도 아닌 첫째가 가문을 잇는다는 사실을 오래도록 받아들이지 못한 모양이야.”

깔깔거리는 아그네스의 웃음소리가 냉궁을 울렸다.

아그네스는 오벨리아의 절망을 즐기고 있었다.

“아… 아….”

오벨리아에게서 절망이 흘렀다.

만약 그의 말대로 둘째 오빠, 라이너스가 범인이라면… 카테리안느 공작의 마차에 손을 쓰는 것도 충분히 가능한 일이었다.

라이너스는 단 한 번도 공작위에 욕심을 드러낸 적이 없었다.

동생들을 끔찍이 생각해 주는 첫째 일리어스가 매번 진실로 자신이 공작위를 이어받아도 될지 고민할 때, 형의 용기를 직접 북돋아 준 사람이 라이너스였다.

오벨리아는 오늘날에서야, 제 둘째 오빠의 그런 다정한 면들을 의심하게 되었다.

권력 앞에서는 혈육을 두고도 골육상잔이 벌어진다 했다.

그러나 단언컨대 오벨리아는 자신의 친오빠가 제 아버지를 죽일 줄 상상해 본 적이 없었다.

오벨리아의 눈에서 분함을 이기지 못한 눈물이 연이어 흘러내렸다.

그녀는 그 순간 자신이 가장 증오스러웠다.

이런 여자를 믿어 제 사촌 자매로 받아들였고, 그런 남자를 믿어 제 아버지까지 거리에서 죽게 만들었다.

이 얼마나… 혐오스러운 종자란 말인가.

“너의 모든 것은 내가 가질 거야!”

아그네스가 당당히 선언했다. 아, 오벨리아의 악몽은 어쩌면 영원토록 깨지 않을 모양이었다.

“오벨리아, 알렉이 8년간 이루어진 너의 헌신은 특별히 인정해 준다고 하더라.”

그런 오벨리아에게 아그네스가 흥얼거리듯 말을 이었다.

“그러니 기회를 주겠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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