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화. 폐위(3)
도르륵.
오벨리아의 앞으로 보랏빛 액체가 담긴 특이한 모양의 병 하나가 굴러 왔다.
“바실리스크의 독이야.”
오벨리아는 이 독을 알았다. 여기에 그런 이름이 붙는 이유도 알았다.
이걸 마시면, 머리가 새하얗게 새어 버릴 만큼 고통스럽게 그리고 확실하게 죽기 때문이었다.
심지어는 그 독이 얼마나 지독한지, 곧바로 해독제를 먹는다고 할지라도 살아난다고 장담할 수 없었다.
물론 당연하게도 오벨리아에게는 해독제조차 없는 것을 생각하면, 기회라기에는 끝까지 잔인한 처사였다.
“알렉이 네가 불명예스럽게 단두대에 오르는 걸 피하게 해 주려고 특별히 고심해서 주는 마지막 선물이야. 네가 알아서 죽는다면, 황족 시해가 아니라 병사쯤으로 잘 포장해 준대.”
아그네스가 알렉산드로의 말을 전했다.
오벨리아가 멍하니 독이 담긴 그 크리스탈 병을 바라봤다.
8년을 알렉산드로에게 헌신했다.
그런데… 알렉산드로는 오벨리아의 마지막에조차 관심이 없었다.
아그네스로 하여금 말을 전달하게 하고 그의 얼굴은 코빼기도 비추지 않을 만큼.
“내가 그 속셈을 모를 줄 알아…? 카테리안느 공작가가 손에 들어왔으니, 최대한 멀쩡히 갖고 싶은 거잖아.”
오벨리아가 마지막 발악을 하듯, 그러나 힘없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녀가 황족 시해를 시도했다는 죄명으로 죽어 버리면 공작가는 망가진다.
그러니까 제 것이 된 이상, 알렉산드로는 카테리안느 공작가를 부수고 싶지 않은 것이었다.
그 뜻대로 해 주기 싫었다.
“네 어미는 살려야 하지 않겠어?”
하지만 오벨리아의 마지막 발악조차 소용없었다.
아그네스의 말 앞에서 그녀는 완전히 힘을 잃었다.
오벨리아는 끝내… 그 크리스탈 병을 받아들었다.
***
아그네스가 가고 난 자리에는 패잔병처럼 오벨리아만이 남아 있었다.
오벨리아가 모든 것을 잃은 허탈한 얼굴로 약병의 뚜껑을 열려는 순간, 누군가의 손이 그것을 막았다.
“정신 차리세요, 오벨리아 님!”
“마리, 네가 여기 어떻게…?”
오벨리아가 크게 놀라 마리아를 바라봤다.
마리아는 어린 날부터 오벨리아를 지켜 온 그녀의 비밀 호위였다.
“아까 오벨리아 님을 끌고 온 기사들에게 섞여 들어온 후 밤이 될 때까지 쭉 숨어 있었습니다. 오벨리아 님을 구할 틈을 보기 위해서요.”
“마리, 다 끝났….”
“끝나지 않았습니다! 오벨리아 님께는 힐켄테데의 반지가 있지 않습니까!”
마리아가 최대한 목소리를 낮춰 단호히 외쳤다.
3년 전, 이 나라의 유일한 대공가인 힐켄테데의 저택에 불이 났고 힐켄테데 영식만을 제외한 모든 식솔이 죽음을 당했다.
그리고 오벨리아와 마리아는 그 현장에 있었다.
그 순간 절망에 잊고 있던 것이 떠오르자 오벨리아의 두 눈이 번뜩였다.
“공작님을 죽이고, 오벨리아 님의 과거와 현재, 미래 모두를 짓밟은 것들이 바라는 게 바로 오벨리아 님의 죽음입니다. 여기서 이렇게 죽으실 겁니까?”
마리아가 간절히 말을 이었다.
그러나 제 아버지의 죽음이 상기되자, 오벨리아의 두 눈에 비췄던 빛은 또 다시 꺼져 버렸다.
“내가 그걸 써서 빠져나간다고 해도 알렉산드로는 날 추격하는 걸 멈추지 않을 거야.”
카테리안느 공작가가 알렉산드로에게 넘어간 이상, 오벨리아는 그와 대적할 방법이 없다.
힐켄테데가 이제 가진 힘이라고는 전혀 없는 것에 반해 추격자까지 달고 있는 그녀를 도와줄지도 모를 일이었다.
“제가 오벨리아 님을 대신해 죽을게요.”
그 순간, 마리아가 결연한 표정으로 선언했다.
“궁에 불을 질러 시체를 불태우면 남은 시신이 오벨리아 님인지 저인지 알 수 없을 거예요.”
오벨리아가 멍하게 눈을 깜빡였다. 그러나 마리아가 무슨 말을 하는지 이해하자, 그녀는 반박했다.
“말도 안 되는 소리 마!”
귀족가의 비밀 호위는 위기 시 그 주인을 대신할 수 있도록 비슷한 외형에 체구를 뽑는 것이 관례였다.
그에 따라 마리아는 오벨리아와 똑같이 화려한 금발에, 비슷한 체형을 지니고 있었다.
그러나 오벨리아는 마리아를 자신을 대신하는 희생양으로 삼을 생각 따위 전혀 없었다. 마리아 또한 오랜 세월을 함께한 소중한 존재였으니까.
“안나에 이어 마리, 너까지 나보고 잃으라고…?!”
오벨리아는 반쯤 제정신이 아닌 채로 소리쳤다.
이런 상황에서 또 제 귀중한 사람을 잃어야만 하는 것이다.
아무리 영민한 사람일지라도 오히려 제정신인 게 이상한 상황이었다.
“오벨리아 님과 비슷한 체형을 가진 시신을 구할 시간이 없어요. 오벨리아 님이 죽은 걸로 착각하게 만들려면 이게 유일한 방법입니다.”
그러나 이어지는 마리아의 말은 냉정했다.
내일이면 오벨리아의 처형 소식이 퍼질 터다.
마리아의 말대로 시신을 구하기에는 시간이 없었다.
“사셔야 합니다, 아가씨. 그래야만 복수도 할 수 있습니다.”
마리아가 오벨리아의 손을 잡고 당부했다.
“공작님과 안나, 그리고 아가씨 스스로의 복수를 할 수 있는 사람은 이제 아가씨뿐이세요.”
“나는, 마리… 나는….”
오벨리아는 끝내 울음을 터트렸다.
8년만에 처음으로 그녀는 어린아이처럼 엉엉 울어 버렸다.
***
한참을 울고 난 뒤, 오벨리아가 입술을 질끈 깨물며 일어나 미친 듯이 방문을 두들겼다.
오벨리아를 따르던 자들이 아무도 그녀에게 접근하지 못하도록 하기 위하여, 알렉산드로는 분명 냉궁에 기사들을 빼곡히 배치해 놨을 것이다.
오벨리아는 그중에 자신이 찾는 사람이 반드시 있으리라 짐작했다.
‘뭐라도 큰 소리를 낼 만한 게….’
오벨리아가 분주히 주변을 둘러봤다. 냉궁에는 정말이지 아무것도 없었다.
게다가 마리아가 조금 전보다 조금만 더 크게 기척을 내도 숨어든 걸 들킬 터였다.
결국 오벨리아는 홀로 맨손과 몸으로 문을 두들기는 수밖에 없었다.
쾅쾅쾅! 쿵!
오벨리아는 제 몸을 아낌없이 문으로 집어 던졌다.
누군가 본다면 오벨리아가 미쳐 패악을 부린다고 할 법한 모양새였다.
그러나 이 상황에 오명을 뒤집어쓰는 일 따위가 두렵겠는가.
오벨리아는 젖 먹던 힘까지 짜내어 소란을 피웠다.
쾅!
“시끄러워, 이 미친 여자야!”
그리고 마침내- 오벨리아가 원하던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너무 춥구나! 궁 밖에라도 불을 피워라!”
오벨리아가 외쳤다.
황실의 법도 상 죄인을 가둔 냉궁에 불을 피우는 것은 금지되어 있었다.
그러니 그녀의 말은 일견 정말 궁 주변에 불을 놓아서라도 추위를 피해보자는 심산 같기도 했다.
“당신이 아직도 고귀한 황태자비인 줄 알아! 이딴 날씨에 무슨 불을 피우긴 피워!”
문밖의 기사가 신경질적으로 외쳤다.
냉궁의 방에도 창은 있었다.
오벨리아의 눈에도 눈이 소복이 내리고 있는 것이 빤히 보였다.
“눈 위에 불을 피우면 될 일이 아니냐!”
오벨리아가 멋모르고 우기는 사람처럼 소리쳤다.
그 목소리가 싸늘한 그녀의 표정과 매우 상반되었으나, 문밖의 기사가 이를 알 수는 없는 법이었다.
“입 닥쳐! 또 다시 되지도 않는 말을 지껄이면 그 입을 틀어막아 놓을 테다!”
기사가 으름장을 놓았다.
그러나 오벨리아는 개의치 않고 계속 목소리를 높였다.
“눈이 녹을 만큼 활활 불을 피워라!”
밖이 시끄러웠다. 오벨리아가 피운 소란에 기사들이 몰려온 모양이었다.
쾅! 쾅! 쾅쾅쾅!
그럴수록 오벨리아는 손이 아프도록 마구 방문을 두들겼다.
더 크게, 더 많은 자에게 그녀의 목소리가 들리도록.
“내가 춥지 않게 불을 피워라! 저 멀리에서도 환히 타오르는 것이 보일 만큼!”
오벨리아의 목소리는 결코 꺼지지 않았다.
“타 죽더라도, 내 이곳에서 억울하게 얼어 죽지는 않으리라!”
오벨리아는 밤새도록 발버둥 쳤다.
기사들의 웅성거림이 사라질 때까지, 그리하여 이 정도면 자신이 원하는 자에게 목소리가 닿았으리라 생각이 들 때까지.
***
그리고 그 날 새벽, 오벨리아의 목에 칼이 겨누어졌다.
그녀가 바라던 대로였다.
“네가 그날 밤의 일을 어찌 알지?”
남자의 낮은 목소리가 들렸다.
오벨리아는 고개를 돌리지 않은 채로 입을 열었다.
“죽더라도 억울하게 불타 죽지 말고 발버둥이라도 치다가 얼어 죽으세요.”
그것은 3년 전 오벨리아가 자신이 살린 한 소년에게 했던 말이었다.
상대의 검이 흔들렸다.
그때를 놓치지 않고 대담하게 칼날을 잡아 밀어낸 오벨리아가 고개를 돌렸다.
사내는 정체를 숨길 생각조차 하지 않는 것인지 달빛에 새까맣게 빛나는 흑발이 눈에 들어왔다.
“에크하르트 힐켄테데.”
오벨리아의 입에서 사내의 이름이 흘러나왔다.
에크하르트의 짙은 눈매가 가늘게 길어졌다.
“내가 올 줄 알고 있었나?”
“중요한 일이니까요.”
애초에 오벨리아가 소란을 피운 이유가 에크하르트를 불러들이기 위해서였다.
눈 위에 핀 불꽃, 거센 눈보라에도 꺼지지 않고 활활 타오르던 대저택, 높은 산으로 둘러싸인 평지 한가운데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멀리에서도 분간할 수 있던 한밤중의 밝은 빛.
그 모두가 3년 전에 있던 힐켄테데의 사변을 말하는 것이었으므로.
힐켄테데 대공저에 비극이 내렸던 날 그 속에서 유일하게 살아남은 자가 있었으니, 그게 바로 에크하르트 힐켄테데였다.
오벨리아가 직접 소년을 살린 덕이었다.
“방화가 있던 날 나를 살린 게 그대였던가?”
에크하르트가 미간을 찌푸린 채 물었다.
모두가 불시에 일어난 화재인 줄 알았으나 그것은 명백히 방화였다.
왜냐하면… 불길을 벗어나려던 자들 모두 누군가 보낸 이들에 의해 살해당했으니까.
사변이 벌어진 날, 얼굴을 가면으로 가려 정체를 알 수 없던 누군가에 의해 구해지지 않았더라면 에크하르트 또한 그들과 같은 운명을 맞이했을 터였다.
“맞아, 내가 구했어.”
오벨리아가 빳빳이 고개를 들었다.
처음에 내뱉었던 존대는 온데간데없었다.
처음에야 에크하르트가 자신의 말을 듣게 해야만 했으니 그랬다지만, 이제부터 그녀가 드러낼 패는 그가 듣지 않을 수 없는 것이었다.
“하면 힐켄테데의 죽음을 외면했다는 말이 아닌가? 그것을 이리 당당히 드러내?”
그러나 그 순간, 에크하르트의 목소리가 살벌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