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화. 폐위(4)
오벨리아가 머무는 수도와 힐켄테데 영지는 상당히 떨어져 있었다.
그런데도 그날 그때 그녀가 그를 구했다는 것은 비극이 일어날 줄 알고 있었다는 것과 다름없었다.
“사정이 있었어. 그렇지만 우선… 당신의 목숨값을 갚아 줘야겠어.”
오벨리아가 물러서지 않고 말했다.
에크하르트는 힐켄테데 사변에서 살아남은 후, 몰락할 뻔한 가문을 3년 만에 재건했다.
괴물이라 불릴 만큼 비상한 육체 능력과 두뇌 덕이었다.
그로 인해 냉궁에까지 이리 잠입했다지만, 오벨리아로서는 언제 이 사실을 들킬지 조마조마했다.
“지금 내가 너를 죽여도 저항도 못 할 판에- 감히 나와 흥정을 하자는 건가?”
에크하르트가 성큼 오벨리아에게로 다가왔다.
무시무시한 기세가 그로부터 흘러나와 그녀를 압박했다.
“그때, 당신이 나에게 주었던 것을 잊어버렸나?”
검을 잡아 본 적도 없는 오벨리아의 몸이 떨려 왔다. 그녀는 제 허벅지를 꼬집어 주저앉으려는 몸을 막고 말을 이었다.
힐켄테데의 모두가 죽어가던 날, 에크하르트는 불이 난 저택에서 도망가려는 사람들을 베어 넘기는 괴한들과 맞서려 했다.
비겁하게 도망치느니 불타 죽더라도 긍지를 지키고 싶었다.
그런 에크하르트를 정신 차리게 하여 후일을 기약하게 만든 것이 오벨리아였다.
‘힐켄테데는 은혜를 잊지 않아.’
그리고 에크하르트는 제 어머니인 힐켄테데 대공에게 배워 온 대로, 제 어리석음에서 제 목숨을 구해낸 오벨리아에게 훗날 빚을 갚겠다는 의미로 힐켄테데의 인장 반지를 건넸었다.
“나만 알 수 있는 곳에 그때 당신이 주었던 힐켄테데의 인장 반지가 있어.”
오벨리아가 지금 황족을 시해한 혐의를 쓰고 있음은 에크하르트도 알았다.
그리고 알렉산드로는 3년 동안 다시 세를 불린 힐켄테데가 거슬린다는 티를 종종 드러내고는 했다.
그런데 이 시점에 오벨리아에게서 힐켄테데의 인장 반지가 발견된다면 알렉산드로는 반드시 황족 시해에 힐켄테데를 엮으려 할 터였다.
“인장 반지는 내가 냉궁을 빠져나가는 순간 어디에 있는지 알려 주겠어.”
오벨리아가 때를 놓치지 않고 말했다.
에크하르트에게 황태자비궁에 잠입하는 것은 일도 아니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그 반지가 어디에 있는지 아는 게 오벨리아뿐이라는 점이었다.
“하… 내가 너를 구하느라 힐켄테데가 엮이나, 인장 반지의 존재를 들켜 엮이나 무슨 차이지?”
그러나 에크하르트는 그녀의 말 속 허점을 놓치지 않았다.
“차라리 황태자비 궁을 불태우는 게 낫겠군.”
에크하르트가 빈정거렸다.
“당신 말이 맞아. 그러니 냉궁에 불을 질러.”
그러나 곧 오벨리아의 말에 에크하르트의 표정이 기괴하게 변했다.
“미친 건가? 난 분명히 너를 돕지 않을 거라고 이야기했을 텐데. 이대로 타 죽겠다고 나를 불렀나?”
그는 숫제 실성한 사람이라도 보는 듯한 얼굴이었다.
“내가 여기서 억울하게 죽어야만 알렉산드로가 내 죽음을 빠르게 덮으려 할 거야.”
그에 반해 이미 결심한 오벨리아의 표정은 지독히도 평화로웠다.
백성들은 오벨리아의 자애로움을 칭송했다.
만약 사건의 진상이 명백히 밝혀지지도 않은 시점에서 그녀가 죽는다면, 오벨리아에 대한 동정으로 민심은 들끓을 터였다.
“알렉산드로는 지금까지 온화한 성군의 이미지를 만들기 위해 완벽을 기했어. 사실 누가 봐도 이렇게 갑작스러운 폐위는 부자연스럽잖아? 어쩌면 그가 정부에 눈이 멀어 아내를 죽이려 한다는 추문이 돌지도 모르지.”
그리고 알렉산드로는 절대로 그것을 용인하지 않을 터다.
그러니 최대한 빠르게 오벨리아의 죽음과 관련된 사건을 덮는 수밖에 더 있겠는가.
“냉궁에 배치된 기사의 수가 적지 않아. 너를 산 채로 데리고 나가려면, 어떻게든 황제한테 덜미를 잡히고 말 거다.”
에크하르트가 곧바로 반박했다.
증거를 남기지 않으려면 가장 완벽한 수단은 모든 것을 전소시켜 버리는 것이었다.
그렇게 되면 크게 이는 불길 속에서 평범한 여인인 오벨리아가 홀로 빠져나오기란 사실상 불가능해진다.
에크하르트의 말대로 그가 도와주지 않는 이상, 그녀는 죽을 게 확실했다.
그는 많은 기사가 지키는 이 냉궁을 오벨리아와 함께 조용히 빠져나가는 게 불가능하리라 여겼다.
“그건 걱정할 필요 없어.”
“어째서?”
“아그네스 이멜리언이 회임했어.”
오벨리아는 아그네스가 자신을 찾아와 회임을 티내는 순간, 많은 것들을 깨달았다.
예컨대 왜 알렉산드로와 아그네스가 자신을 끌어내리는 일을 이토록 성급하게 처리해야만 했느냐가 그중 하나였다.
“그것도 계획에 없던 임신을.”
오벨리아가 입가에 싸늘한 비웃음을 매달았다.
지금 이 시점에서 알렉산드로와 아그네스 사이에 아이가 생기는 일은 그들이 전혀 예상하지 못한 일임이 분명했다.
오벨리아의 생각대로라면, 차분히 자신의 폐위를 준비하기에는 그들에게 시간이 부족했을 터였다.
교황청은 이혼이라는 단어를 대단히 불경하게 여겼다.
교황청이 정한 유일신을 국교로 믿는 론체스터에서 이혼이란 사실상 불가한 것이었다.
일부일처제를 표방하는 론테스터는 정식적으로 혼인한 배우자 외에 모든 이는 모두 정부에 불과했다.
이는 황제도 벗어나지 못할 절대적인 법으로, 황제의 정실은 황후뿐이었다.
즉 오벨리아가 황후의 자리에 올라 버리면 아그네스는 그녀를 폐위하기 전까지 쭉 정부가 되는 셈이었다.
‘아이가 없다면 문제가 되지 않겠지만.’
귀족 부부 간에 정부를 두는 일이 흔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그 눈을 감아 주는 것의 한계선은 명백했다.
정부와의 사이에서 아이를 만들지 말 것.
그런데 현재 알렉산드로의 정부에 불과한 아그네스가 덜컥 아이를 가져 버린 것이다.
귀족들은 가문의 치욕이 될 부정의 증거이자, 추후 그들의 고귀한 피를 흐리게 될 사생아를 혐오했다.
버젓이 황후가 있는데도 아이를 낳았다는 것은 말 그대로 알렉산드로와 아그네스의 부정을 증명하는 일이었다.
그렇게 되면 귀족들은 추후 새 황후을 맞게 할지언정 아그네스를 황후 위에 올리려고 하지는 않을 것이었다.
“궁에서 불이 나면 아그네스는 반드시 보호되어야만 해. 그렇지만 계획이 어긋나 그녀는 현재 아무것도 아니니 대놓고 보호할 수 없어. 그러니까 다른 이들의 눈에 띄는 외부의 기사들을 보내기보다, 다들 일부러 신경 끄고 있을 냉궁의 기사들을 그리로 보내는 게 덜 이목을 끌 거야.”
그뿐인가? 정부에게서 태어난 부정한 사생아 또한 절대 황위를 꿈꾸지 못할 터였다.
따라서 지금 오벨리아를 폐위하지 않고서는 아그네스와 그 아이를 정부와 사생아라는 운명에서 벗어나게 만들 수 없었던 것이다.
그러니 아그네스의 존재는 오벨리아가 황태자비의 자리에서 공식적으로 사라질 때까지 비밀이어야만 했다.
“그럼 널 대신하여 타 죽은 시신은 어찌 들여놓지? 죽은 척을 하려면 필요할 텐데.”
에크하르트는 가까운 시일 내 오벨리아가 처형되리라는 사실을 이미 아는 듯, 시신을 구할 시간이 없음을 짚어냈다.
역시나 3년 만에 대공가의 위세를 돌려놓은 남자다운 정보력이었다.
“…그건.”
매끄럽게 이어지던 오벨리아의 말이 잠시 주춤했다.
뒤늦게 흘러나온 말이 칼날처럼 목구멍을 죄 난도질하고 올라오는 듯 고통스러웠다.
“내 호위 기사는 나와 체모나 피부색도, 체형도 비슷해. 그 애가… 나를 대신해 죽을 거야.”
그 칼날을 모조리 입에 담은 채로, 오벨리아는 말을 계속했다.
“그러니 나 하나 빼돌리는 것쯤은 대공께서 충분히 할 수 있겠지.”
오벨리아가 당당히 에크하르트에게 강요했다.
“황실 기사 중 당신의 사람 몇쯤 있는 것 알고 있어.”
그리고는 에크하르트가 다른 말을 하기 전에, 오벨리아가 말을 덧붙였다.
기사들에게 빈틈이 생긴 시점에 힐켄테데의 대공이 그 정도도 못 할 리가 없었다.
모든 일은 이미 오벨리아가 계획해 놓은 뒤였다.
자신을 부른 것조차 그녀가 손안의 체스말을 다룬 것에 불과하다는 생각이 들자, 에크하르트가 불쾌한 낯으로 대꾸했다.
“이리 대단한 분께서 어쩌자고 이리 멍청한 일을 당하셨는지 모르겠군.”
그러자 이번에는 오벨리아의 안색이 어두워졌다.
그러나 그녀는 분노하지 않고 침착하게 말을 이었다.
“대공, 누군가를 사랑하고 믿는 것이 죄인가?
오벨리아는 제 질문의 답이 명확히 정해져 있다는 듯이 곧바로 부정했다.
“아니지, 인간이라면 응당 도리를 아니까. 그러니… 그 고마움도 모르는 짐승만도 못한 것들이 죄가 아니겠어.”
오벨리아는 자신이 누군가를 너무 믿었고, 너무 사랑하여 어리석었다는 점은 인정했다.
그러나 어리석음 하나로 대가를 치르기에는, 오벨리아가 잃은 것이 너무 많았다.
“그러니까 죽더라도 내가 가는 지옥에는 반드시 그 금수만도 못한 자들이 함께일 거야.”
오벨리아의 붉은 두 눈이 선연하게 빛났다.
에크하르트는 직감했다.
저런 여자와 척을 지게 되는 자들은 절대로 쉬운 생을 살지 못하리라.
“…너를 죽은 것으로 위장하는 일까지만 도울 것이다. 너와 나의 거래는 그것으로 끝이야.”
그래서 에크하르트는 선언했다.
오벨리아는 반드시 알렉산드로와 아그네스에게 복수할 것이다.
그는 이 복잡한 사연에 이 이상으로 얽히고 싶지 않았다.
“글쎄.”
그에 답하는 오벨리아의 미소가 참으로 기묘했다.
***
오벨리아는 황궁에서 떨어진 곳에서 냉궁에 붙은 불이 사그라들 때까지, 그 모습을 끝까지 지켜봤다.
제 어리석음으로 인한 죄를 대신 짊어지고 가 버린 제 기사의 마지막을.
마침내 한밤중을 밝히는 불이 꺼지고 새벽이 되었을 때, 오벨리아는 허리를 꼿꼿이 세운 채로 에크하르트를 돌아봤다.
“내 목숨 빚을 갚는 건 여기서 끝이야.”
시선이 마주치자마자 에크하르트는 의심이 가득한 목소리로 오벨리아에게 선언했다.
그는 그녀가 약속을 지키지 않으리라 생각했다.
왜냐하면 카테리안느 공작가마저 잃은 상황에서, 오벨리아가 기댈 수 있는 것은 힐켄테데의 인장 반지가 유일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오벨리아는 전혀 개의치 않는 듯 쉽게 고개를 끄덕였다.
도리어 쉬이 인장 반지의 위치를 말해주어 에크하르트를 당황하게 만들었다.
“그래. 힐켄테데의 인장 반지는 공작가의 묘지, 11대 공작님의 무덤 옆 붉은 꽃 아래에 묻어두었어.”
오벨리아는 침착하고 담담했다.
마치, 이미 다음 수가 완벽히 준비되어 있는 사람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