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화. 죽어 봐, 오벨리아(1)
에크하르트가 헛웃음을 지었다.
공작가의 묘지.
그 말만으로도 오벨리아가 인장 반지를 절호의 기회에 써먹으려 했던 것을 알 수 있었다.
유서 깊은 가문의 묘는 아무나 건드릴 수 있는 게 아니다.
높은 가문일수록 무력을 익힌 묘지기가 대체로 그곳을 지키며, 소란이 일면 달려올 사병들도 준비되어 있었다.
즉, 그 넓은 무덤가를 전부 뒤지지 않고 별다른 소란 없이 반지를 빼내 오려면 정확히 어디에 반지가 있는지 알아야만 한다는 의미였다.
그것은 단언컨대 반지를 숨긴 자가 아니고서야 알 수 없는 정보였다.
그러나 연이어진 그녀의 말은 에크하르트를 더욱 기가 막히게 했다.
“나는 당신과의 약속을 지켰어. 그러니 새로운 거래를 하자.”
“하…? 네가 나와 거래할 게 뭐가 남아서?”
에크하르트의 말은 빈정거림이 아니었다.
그것은 그저 그가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에크하르트의 눈에 모든 것을 잃은 오벨리아는, 자신과 거래할 것이 아무것도 없어 보였으니까.
“힐켄테데 사변의 진실. 그리고 당신 혈통 문제의 해결.”
그러나 오벨리아의 말이 입 밖으로 나오는 순간, 두 사람의 대화에서 결국 표정을 굳힌 것은 이번에도 에크하르트였다.
***
오벨리아가 꺼낸 이야기가 워낙 중대한 사항들이었기 때문에 두 사람은 자리를 옮겼다.
그리하여 그녀는 에크하르트를 따라 수도에 있는 힐켄테데의 타운 하우스에 와 있었다.
“이제 말해. 만약 허튼수작을 부린 거라면 그 대가를 치러야 할 거야.”
단 둘뿐인 응접실에 들어오자마자 에크하르트가 말을 꺼냈다.
그의 표정이 그 어느 때보다도 살벌했다.
“힐켄테데의 비극에 황실이 개입되어 있어.”
그래서 오벨리아는 곧바로 본론으로 들어갔다.
실은 그녀에게도 뜸을 들일 시간이 없었다.
3일간 제대로 먹지도 자지도 쉬지도 못하고 온갖 충격이란 충격은 다 받은 오벨리아의 몸은 이미 한계였기 때문이다.
그녀가 기절하지 않고 현재 깨어 있을 수 있는 것은 순전히 정신력 덕이었다.
“그걸… 네가 어떻게 알지?”
힐켄테데 대공가는 외적에게서 숱한 전투를 통해 론체스터의 북방을 오래도록 지켜 온 가문이었다.
그런데 화재 하나에 대처하지 못해 에크하르트를 제외한 저택 내의 모두가 몰살당했다.
게다가 저택을 습격했던 괴한들도 있었다.
비극이 일어났던 날의 화재가 이상하다는 사실은 에크하르트도 진작 알고 있던 일이었다.
다만, 오래도록 덜미를 잡지 못했을 뿐.
그러나 그 상대가 황실이라면 아무리 에크하르트라고 할지라도 3년 안에 범인을 찾아내지 못한 것이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당신도 의심하고 있던 일이었을 텐데.”
오벨리아의 말은 옳았다. 에크하르트도 황실을 의심해 보지 않았을 리 없었다. 그러나 명확한 증거가 없으니 움직이지 못했을 뿐이었다.
“말 돌리지 마.”
에크하르트는 여지없이 단호했다.
오벨리아는 대단히 고단했으므로, 그에 별다른 반박 없이 말을 이어갔다.
“그날 당신을 구한 거, 선황 폐하께서 내게 따로 명령하신 일이었어.”
“…뭐?”
“당신을 구하면 알렉산드로에게 황태자위를 주신다고 약속하지 않으셨다면 나도 죽을지 모를 위험한 자리에 가지 않았을 거야.”
3년 전 그날, 황제는 힐켄테데 대공저의 모두가 죽으리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황위 계승 싸움이 끝을 향해 달려가던 시기였다.
‘힐켄테데의 씨를 남겨 놓거라. 그렇게 하면 알렉산드로에게 황태자위를 주마.’
황태자 자리에 누가 오를지 황제의 결정만이 남아 있던 그때, 황제가 오벨리아에게 비밀스럽게 명령을 내렸다.
‘송구하오나 폐하, 누군가 힐켄테데를 노린다면 제게는 힐켄테데를 구할 방도가 없습니다.’
처음에는 오벨리아도 황제가 그런 명령을 내리는 이유를 알아차리지 못했다.
힐켄테데의 성을 가진 자는 대공과 영식 둘이지만, 실질적으로 힐켄테데의 씨라 일컬을 상대는 대공뿐이었다.
만약 침입자들이 힐켄테데를 노린다면 대공이 그들의 척살 1순위일 것일 터였다.
그런데 오벨리아가 어떻게 홀로 그 수많은 눈에서 대공을 가린다는 말인가.
‘나는 힐켄테데의 씨를 남겨 놓으라 하였다.’
황제가 재차 한 말에 오벨리아는 의아해질 수밖에 없었다.
황제의 말은 대공이 아닌 영식을 살리라는 말 같았다.
그게 이상했다.
왜냐하면… 힐켄테데 영식, 에크하르트는 힐켄테데의 친혈육이 아니었으니까.
그러나 굳이 같은 말을 두 번 한 황제의 의도는 분명했다.
에크하르트 힐켄테데도 표면적으로는 힐켄테데이지 않던가.
그래서 오벨리아는 황제가 구하라는 대상이 에크하르트라 확신했다.
그녀는 그를 구했고 알렉산드로는 황태자가 되었다.
그러나 오벨리아는 이 일을 추후 두고두고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그래서였다.
아무에게도 말할 수 없는 이 비밀에 관하여 손을 대기 시작한 것은.
“선황 폐하께서 비밀리에 명령을 내리시고 이유도 설명해 주시지 않았는데, 여간 찜찜하지 않을 수 없었지.”
알렉산드로를 황태자위에 올려놓기 위한 선택이었으나, 그 점을 제외하고 나면 사실 오벨리아는 아무것도 모르고 선황의 명을 따른 것이나 다름없었다.
선황에게는 딸과 아들이 있고, 유능한 신하와 기사가 있다. 그런데도 굳이 그녀를 비밀리에 불러 명을 내렸다.
선황이 그런 행동을 한 이유가 자신의 자식이나 유능한 신하를 희생시키기 싫어서인 건지, 아니면 그들에게조차 비밀로 해야 하기 때문인지, 오벨리아는 그것을 알아야만 했다.
그래야 설령 선황의 명으로 위험한 일에 발을 담갔다고 할지라도 대책을 세울 게 아닌가.
“그래서 비밀리에 카테리안느의 힘을 동원해서 알아봤어. 그런데 이상하게도- 꼬리가 여러 개야.”
그러나 일은 오벨리아가 생각했던 거보다 훨씬 더 복잡하고 위험했다.
“그게 무슨 소리지?”
“그날, 힐켄테데에 보내진 살수는 한 사람이 보낸 게 아니야.”
“무슨 소리를 하는 건가. 그들의 움직임은 깔끔하고 완벽했어. 다 함께 훈련받은 자들이 아니고서야 그토록 합이 맞을 수는….”
반박하던 에크하르트가 갑자기 입을 다물었다. 하나의 단체로서 많은 이들이 함께 훈련을 받지만 실상 그 안에서 섬기는 주인은 다른 집단. 딱 하나, 그런 곳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황실이 있지.”
오벨리아가 정답을 내뱉었다.
본디 황실 기사단은 황제의 것이나, 8년 전부터 황위 싸움이 심해지면서 점차 그 세력이 각자 지지하는 황자를 따라 이쪽저쪽으로 갈라졌다.
그리하여 얼마 전까지만 해도 같은 기사단 내에서도 파벌이 갈리는 경우가 허다했다.
그래서 제 2기사단을 통으로 흡수한 알렉산드로가 승기를 잡은 것이기도 했고.
‘참, 배은망덕하기도 하지.’
오벨리아가 입매를 비틀었다. 알렉산드로가 제 2기사단의 신뢰를 얻은 것은 그들의 단장인 일리어스의 도움이 있었기 때문이다.
알렉산드로가 이룬 것들은 대체로 그랬다. 그는 홀로 완벽해지지 않았다. 모든 이들이 물심양면으로 도와 지금의 자리에 오른 것이었다.
그런데 이제 와 사랑 하나에 그 많은 것들을 배반하다니, 어리석기 그지없었다.
4년 전, 일리어스가 공작가를 물려받기 위해 차츰 기사단 일에서 손을 떼기 시작한 이후로 제 2기사단은 알렉산드로의 아래로 완벽히 들어갔다.
그게 온전히 본인 능력인 줄 아는 모양이었다.
‘겨우 그런 남자를 택하고 믿은 나도 어리석기는 매한가지지만.’
오벨리아가 자조했다. 그러나 에크하르트는 그녀를 가만히 두지 않았다.
“그렇다면 네 남편도 관여되었을지도 모른다는 이야기가 아닌가?”
“…아마 높은 확률로 알렉산드로가 관련되어 있겠지.”
오벨리아가 담담히 인정했다. 황제의 뜻이 에크하르트를 살리는 데 있음에도 불구하고 황제는 전면에 나설 수 없었다.
그 사실을 에크하르트는 몰랐으나 오벨리아는 알고 있었으므로, 그녀는 그와 다른 시작점에서 일을 조사할 수 있었다.
그러니 알아내는 것도 빨랐다. 힐켄테데 사변에 황제의 자식들이 다수 관여되어 황제도 어쩔 수 없는 게 당연했다. 에크하르트를 살리자고 관련된 자식을 죄다 치죄할 수는 없는 일이었으니까.
그 당시 황위 싸움으로 여럿 패배하여 죽어 나갔으니 비밀리에 그 많은 살수를 움직일 자들은 많지 않았다.
게다가 힐켄테데는 무려 이 나라의 대공이다. 그런 가문을 단독으로 건드리기에는 들키면 잃을 게 너무 많았다.
그러니 어느 한 사람이 건드렸다기보다는, 다 같이 손을 잡았을 가능성이 컸다. 즉, 알렉산드로가 무관할 확률은 극도로 낮다는 의미였다.
쾅!
“알면서도 그간 내게 모두 침묵한 주제에 지금 내 저택 내에 있는 건가!”
에크하르트가 거센 손길로 테이블을 내리쳤다.
알렉산드로가 오벨리아의 남편이었건 말건, 그녀는 에크하르트에게 진실을 묵인한 방관자였다.
3년, 에크하르트가 진실을 알아내기 위해 그 세월을 얼마나 미친놈처럼 매달렸던가. 분노가 치밀었다.
“그 진실을 은폐하는 데 분명 너도 한 수 거들었겠지, 카테리안느!”
에크하르트의 몸이 부들부들 떨렸다. 이미 드러난 진실도 모르고 3년을 헤맸다. 누군가 기를 쓰고 숨겼기 때문이다.
8년간 오벨리아가 알렉산드로를 위해 무엇이든 했다는 건 이 나라의 모두가 안다. 그녀가 남편의 위기가 될지도 모를 일을 방관하진 않았으리라.
“네게 빚을 갚을 거야, 어떻게든.”
오벨리아가 품에서 바실리스크의 독을 꺼냈다. 알렉산드로가 주었던 것이다.
변명은 없다. 이미 저지른 일은 돌이킬 수 없으니까.
“하! 죄다 잃은 네게 무엇이 있어서!”
에크하르트가 노골적으로 빈정거렸다. 그의 혀끝에서 칼날이 쏟아졌다.
“내가 지금 당장 너를 현 황제에게 내던져도 네가 할 수 있는 게 있기나 한가!”
에크하르트는 당장이라도 저 여자의 목을 꺾고만 싶었다. 그러나 오벨리아에게서는 조금도 겁먹은 기색이 보이지 않았다.
“붉은 눈에 은발. 이 대륙 위에서 오로지 힐켄테데만이 그 상징을 가졌지. 그러나 대공, 당신은 검은 머리고- 그로 인해 몇몇 원로들이 당신을 힐켄테데의 가주로 여태껏 받아들이지 않고 있다지.”
당연했다. 오벨리아는 이미 죽을 준비를 모두 끝냈으니까.
“내 목숨을 당신에게 줄게. 대공, 당신이 진짜가 되게 해 줄 수 있어.”
오벨리아의 손 안에는 바실리스크의 독이 담긴 병이 불길하게 빛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