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화. 죽어 봐, 오벨리아(3)
그 무거운 침묵을 깨는 누군가의 중얼거림이 선명하게 홀을 울렸다.
“황태자비…?”
그도 그럴 것이, 금발이 아니라 은발인 것을 제외한다면 그녀의 생김새는 불에 타 죽었다고 알려진 황태자비와 완벽히 똑같았기 때문이다.
당연한 일이었다.
동일 인물이었으니까.
그러나 오벨리아는 당황하지 않고 말을 이었다.
애초에 이름 하나 다르게 하지 않고 힐켄테데에 모습을 드러냈을 때부터 각오하지 않았던가.
게다가 바실리스크의 독을 오벨리아에게 건넨 것이 알렉산드로였다.
얼굴을 완전히 뒤바꾸지 않는 이상, 알렉산드로가 그녀와 다시 만나게 되면 오벨리아가 죽지 않고 살아 있었단 사실쯤은 금방 알게 될 것이다.
바실리스크의 독이 머리를 새하얗게 만들 수 있다는 것쯤, 알렉산드로도 알고 있을 테니까.
그러니까 결국 이름만 바꾸는 것은 하등 소용없는 일이었다.
어차피 알렉산드로가 카테리안느의 권력을 탐내, 공작가를 안고 가기로 한 이상 뒤늦게 오벨리아가 살아 있었음을 알아차린다고 해도 진실을 들춰낼 수는 없었다.
그렇게 되면 그는 잃을 것이 너무 많아진다.
알렉산드로는 절대 그것을 감수하지 않을 터였다.
그러니 같은 이름이 대수이겠는가.
오히려 오벨리아라는 이름으로 어떤 식으로든 그를 동요하게 만든다면, 그녀에겐 이득인 셈이다.
그러므로 지금 당장 오벨리아가 해야 할 것은 다른 걱정이 아니라 힐켄테데에 확실한 자신의 자리를 만드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러기 위해서는 반드시, 힐켄테데를 휘저어 놓을 필요가 있었다.
빈틈을 만들어 놓아야 그 자리를 비집고 들어갈 테니까.
“모두 3년 전, 이곳에서 일어난 변고를 기억하고 계시리라 믿습니다.”
그리하여 오벨리아는 거침없이 힐켄테데의 역린을 건드렸다.
그로 인해 사람들의 주의가 단번에 그녀에게서, 그녀가 내뱉은 말로 옮겨갔으니 완벽히 의도대로였다.
“제 어머니는 아마도… 오래전부터, 이런 일이 일어나리라 예상하고 계셨던 것 같군요.”
“지금, 우리가 대공 전하를 해하는 데 영향을 끼치기라도 했다는 말입니까?!”
오벨리아의 말에 가신들과 원로들에게서 즉각적인 반발이 터져 나왔다.
술렁임이 홀 전체를 메웠다.
“대공 전하…! 저희는 결백합니다!”
난데없이 전 대공의 시해혐의를 받게 된 이들 중 몇몇은 억울하다는 듯 에크하르트에게 자신들의 입장을 읍소했다.
그러나 그는 그 모습을 가만히 두고 봤다.
사실은 에크하르트도 늘 의심해 왔던 일이기 때문이다.
북부의 유일한 지배자, 힐켄테데의 저택.
그것은 차라리 성이라고 불리는 게 자연스러울 만큼 커다랬다.
그런 게 타오르는데 저택의 외부 사람은 아무도 달려오지 않았고, 오벨리아의 도움을 받아 살아남은 에크하르트를 제외한 저택 내부의 모든 이가 죽었다.
그게 과연 북부에서 힘을 가진 누군가가 눈을 감지 않고서 가능한 일인 걸까?
에크하르트는 단언할 수 있었다.
그럴 리가 없다고.
그리고 이게 그가 근 3년간 원로들과 거리를 좁히려 노력하지 않았던 이유기도 했다.
원로란, 대공의 세대 교차가 일어나면서 전 대공을 모시던 가신들이 차지하는 자리였다.
그러니 힐켄테데의 사변에 손을 쓴 자들이 당시에 죽은 대공의 가신으로 한 자리씩 차지하고 있던 지금의 원로들이 아니라고 어찌 장담할 수 있으랴.
즉, 내부의 적이 누구인지 모르기에 곁에도 두지 않은 셈이었다.
그리고 에크하르트는 한순간에 주인을 잃어 무너진 힐켄테데를 재건하면서 늘 때를 기다려왔다.
오벨리아가 칼을 빼든 지금 이 순간은 실상 그가 늘 기다려 오던 순간이었다.
“그게 아니라면 어머니께서 저를 굳이 왜 숨기셨겠습니까.”
오벨리아의 표정은 자신이 숨죽여온 세월을 토해내듯 절박해 보였다.
정치는 결국 한 편의 연극과 같다.
오랜 세월 황태자비로 살아온 그녀에게 그런 얼굴을 꾸며내는 것쯤은 아무 일도 아니었다.
“그건….”
오벨리아에게 선수 치기를 당한 가신들과 원로들이 말끝을 흐렸다.
상식적으로 오벨리아만 한 친자식이 있었다면, 전 힐켄테데 대공이 굳이 그녀를 숨길 이유가 없었다.
오벨리아가 먼저 입 밖으로 꺼내지 않았어도 누군가는 의심하였을 만한 내용이었다.
그러나 전 대공이 이미 오래전부터 힐켄테데를 위협하는 자들이 있다고 여겼고, 그래서 친자식을 숨겼으며 진짜로 사변이 일어나, 에크하르트에게 힐켄테데가 안전해질 때까지 제 자식을 숨기도록 했다면?
전혀 불가능한 일은 아니었다.
황실은 물론이고, 오랜 세월 명맥을 유지해 온 가문들이 그 후계의 안전을 위하여 입양아나 가짜를 내세우는 것은 종종 있었던 일이니까.
“설마, 제가 가짜라고 의심하시는 건 아니겠지요.”
오벨리아가 눈을 가늘게 뜨며 힐켄테데의 가신과 원로들을 떠보듯 바라봤다.
보란 듯 머리칼을 쓸어 올리는 그녀의 손에 힐켄테데의 인장 반지가 끼워져 있었다.
물론, 좌중에게 보라고 한 행동이었다.
“크흠… 그게, 아니라.”
은발에 붉은 눈은 제국에서 대대로 힐켄테데만이 유일했다.
게다가 그 손에 힐켄테데의 인장 반지까지 끼워져 있었으니 반발을 하려야 할 수가 없었다.
힐켄테데의 인장 반지는 하나를 만들 때마다 가주뿐 아니라 원로들의 인가 또한 필요했다.
그리고 힐켄테데의 모든 것이 불타 버린 이후, 인장 반지는 에크하르트가 가주의 자리에 오를 때 딱 한 번 만들어졌을 뿐이었다.
그러니 인장 반지의 출처를 의심할 수 있을 리 없었다.
그 누가 그 인장 반지가 불 속에서 살아남은 것이리라 생각하겠는가.
“그럼, 내가 밖에서 왔다고 하여 힐켄테데의 예절도 제대로 모를 거라 업신여기는 겁니까?”
오벨리아가 좌중을 압박하듯 눈을 가늘게 떴다.
힐켄테데는 북부의 지배자다.
그렇기에 북부에 터전을 잡은 모든 이들은 그들이 태어난 순간, 경의를 표한다.
그녀는 힐켄테데의 이름으로 좌중의 앞에 나섰고 원로들과 가신들이 해야 할 일은 정해져 있었다.
“오벨리아 힐켄테데 님에게 봄의 축복이 가득하시기를.”
가신 중 누군가가 무릎을 꿇으며 말했다.
곧이어 눈치를 보던 원로들과 가신들이 하나, 둘 연달아 오벨리아의 앞에 무릎을 꿇었다.
“오벨리아 힐켄테데 님에게 봄의 축복이 가득하시기를!”
오벨리아가 비로소 힐켄테데가 되는 순간이었다.
***
힐켄테데가 둘이 되었다.
이제 원로들과 가신들의 관심사는 하나였다.
오벨리아와 에크하르트가 과연 협력할 것인가, 적대할 것인가.
에크하르트는 오벨리아의 존재를 부정하지 않고 힐켄테데로 받아들였다.
그렇다고 해서 그녀 또한 그에게 호의적일지는 다들 장담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그도 그럴 것이… 힐켄테데의 주인이 가질 수 있는 권력이란 황제조차 쉬이 건드리지 못하는 것이 아니던가.
그리고 오벨리아와 에크하르트는 그런 생각들을 이용할 예정이었다.
“우리의 결혼은 최대한 늦게 발표할 거다.”
“좋은 생각이야. 당분간은 내가 당신을 못마땅하게 여기는 것처럼 보이는 게 좋겠어.”
에크하르트의 말에 오벨리아가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를 표했다.
지금의 가신들이야 에크하르트가 직접 뽑아 3년 동안 함께 구르며 힐켄테데를 재건해 왔으니 당연히 그를 지지했다.
그렇지만 원로들은 달랐다.
그들은 자신들이 모셨던 전 대공과 그 핏줄에 대한 자부심이 대단했다.
에크하르트가 아무리 후계자로서 뛰어난 자격을 보이고 힐켄테데를 훌륭히 재건해 왔어도 종종 힐켄테데의 핏줄이 사라진 것에 대한 아쉬움을 저버리지 못한 자들이었다.
그러니 오벨리아가 힐켄테데의 진짜 핏줄이라며 나타난 지금, 원로들이 어떻게 행동할지는 뻔한 일이었다.
오벨리아가 에크하르트를 적대하는 모습을 보인다면 그 행동들에 불을 붙이는 일이 될 것이다.
“원로들이 배신한 게 힐켄테데인지, 나인지도 알아봐야겠지.”
에크하르트가 말했다.
황제는 오벨리아에게 에크하르트를 구하라고 말했다.
그 말은 힐켄테데의 사변에서 가장 중요한 인물이 전 대공이 아니라 에크하르트라는 말이었다.
즉 아마도 힐켄테데의 사변을 일으킨 원인부터가 그를 제거하는 데에 있었을 것이다.
황족들에게 협조한 자들의 목적이 힐켄테데에 반기를 들기 위해서였는지, 오직 에크하르트를 제거하기 위해서였는지에 따라 그가 내릴 처벌 수위가 달라질 터였다.
“좋아, 그럼 일단… 소란을 일으켜 볼까.”
쨍그랑!
오벨리아가 말을 내뱉음과 동시에 에크하르트의 책상에 잘 놓여 있던 화병을 집어 던졌다.
외부에 소리가 들리지 않도록 두껍게 제작된 문도 넘어설 수 있게, 그녀의 목소리가 커졌다.
“그래서 지금 내 어머니의 방을 내놓지 못하겠다는 거야?!”
분명 누군가는 말을 전달하기 위해 집무실 밖에서 에크하르트와 오벨리아의 대화를 엿듣고 있을 터였다.
두 사람은 이 기회에 힐켄테데의 주인이 아니라, 다른 자들을 따르는 고용인들까지 전부 걸러낼 참이었다.
“힐켄테데의 대공은 나다, 오벨리아 힐켄테데!”
에크하르트도 마침내 화가 난 사람처럼 목소리를 드높였다.
물론, 서로 목소리를 높이는 것과 상반되게 오벨리아와 에크하르트의 표정은 지나치게 평온했지만.
오벨리아가 뒤를 돌아 성큼성큼 문으로 걸어갔다.
타다다닥.
문 가까이 가자, 누군가가 다급히 집무실의 문에서 멀어지는 발걸음 소리가 들렸다.
그녀는 방금까지 평온하던 표정을 뒤바뀌어 잔뜩 화가 난 것처럼 꾸며냈다.
그리고 문을 연 순간, 오벨리아가 소리쳤다.
“그래 봤자 가짜 주제에!”
쾅.
그녀가 화가 난 걸음으로 성큼성큼 집무실을 나서며 거세게 문을 닫았다.
그날, 오벨리아가 첫날 힐켄테데에 오자마자 에크하르트와 크게 다투었더란 이야기가 저택 내에 퍼진 것은 순식간의 일이었다.
***
확실히 무려 힐켄테데의 원로가 되는 자들이라 그런지 그들은 신중했다.
오벨리아와 에크하르트가 다투기 시작한 지 무려 일주일 만에 원로 하나가 그녀에게 비밀리에 연락을 취해 왔으니까.
그것도 늦은 밤, 평범한 시녀로 보이는 이가 기척도 없이 오벨리아의 방 안에 숨어드는 형식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