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화. 살아남기 위하여(1)
제멋대로 나타난 시녀를 보는 순간, 오벨리아는 속으로 헛웃음을 지었다.
‘나를 얼마나 우습게 봤으면.’
오벨리아를 우습게 보지 않고서야, 이 야밤에 그녀의 허락도 없이 그녀의 방에 시녀가 들어서게 한다는 건 말이 되지 않는 일이었다.
그 말은 즉, 시녀를 보낸 원로가 진정으로 오벨리아를 제 윗사람으로 여기지 않는다는 의미였다.
물론, 그렇게 영리하지 않은 상대로 보이기 위하여 등장한 첫날부터 소란을 일으킨 것이기는 했다.
실제로 신중한 사람이라면 이제 막 힐켄테데의 저택에 왔는데 이곳의 주인인 에크하르트와 전면으로 대치하지는 않을 테니까.
“이거루트 님께서 보내….”
촤악.
오벨리아가 망설임 없이 자신이 마시던 찻물을 시녀에게 끼얹었다.
그녀는 차가 식었음을 확인하고 한 행동이지만, 시녀는 오벨리아가 자신에게 이럴 줄 전혀 몰랐던 듯 놀라 입을 다물었다.
“내가 언제 네게 들어와도 좋다고 허락했던가? 게다가 감히 내가 허락도 안 했는데 입을 열어? 누가 보냈는지 궁금하다고 묻지도 않았는데?”
오벨리아가 오만하고 냉한 어조로 시녀를 추궁했다.
그녀는 아주 똑똑해 보여서도 안 됐지만, 완전히 만만해 보여서도 안 됐다.
원로들이 오벨리아를 손에 쥐고 흔들기 좋은 패라고 인식한다면, 진실로 중요한 이야기 같은 것은 단 하나도 꺼내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손을 잡기 위해서는 어느 정도 살을 내어주어야 하지만 피를 내줄 필요는 없고, 가끔은 방심을 불러일으켜 필요 이상의 말을 하게 만들 수 있는 상대.
원로들에게 각인될 그녀의 이미지는 딱 그 정도가 좋았다.
“죄송합니다, 오벨리아 님. 무례를 범했습니다.”
시녀가 곧바로 무릎을 꿇었다.
원로가 아주 우매한 자를 보내진 않은 모양이었다.
“누가 보냈지?”
그제야 말하기를 허락한다는 듯, 오벨리아가 턱을 까닥였다.
오래도록 황궁 생활을 해 왔던 탓에 그녀에게서는 자연스러운 위압감이 흘렀다.
그 덕에 시녀가 더욱 고개를 조아리며 말을 이었다.
“원로 이거루트 님께서 보내셨습니다.”
오벨리아의 머릿속에는 힐켄테데에 관련된 모든 자의 정보가 들어 있었다.
앞으로 일을 도모하기 위하여 에크하르트에게 내어달라 말해 단 며칠 만에 모두 머릿속에 집어넣은 것들이었다.
그리고 이거루트라는 이름은 원로 중에서도 그다지 높지 않은 자였다.
‘일이 틀어질 경우 꼬리를 자를 심산이군.’
오벨리아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힐켄테데의 이 큰 저택에 불이 나는데 사람들이 달려오지 않게 하려면 원로들조차도 통제가 가능한 자여야만 했다.
그리고 에크하르트가 파악한 바에 의하면 지금 원로 중 가장 힘이 있는 자는 둘이었다.
‘프렐런트와 커티스 중 누가 이거루트를 움직였을까.’
단순히 보자면 커티스는 에크하르트를 지지했고 프렐런트는 사사건건 그에게 반기를 들었다.
그러나 상대는 이처럼 절대 쉽게 스스로를 드러내지 않는 자였다.
겉으로 에크하르트의 편을 든다고 해서 진짜로 그러리란 보장이 없었다.
“이거루트라면….”
오벨리아가 일부러 미간을 찌푸리며 잘 기억이 나지 않는 척했다.
우선은 그녀가 아직 원로들을 모두 외우지 못한 것처럼 굴기 위해서였다.
“이분이십니다.”
시녀가 초상화를 내밀었다. 이럴 때를 대비해 온 모양이었다.
“아, 본 것 같아.”
오벨리아가 그제야 고개를 끄덕였다. 적당히, 기억력은 나쁘지 않은 것처럼.
“이거루트 님께서 오벨리아 님을 개인적으로 뵙고 싶다고 하십니다.”
“나를? 흠… 왜? 에크하르트와 반목하는 거라도 도와주게?”
시녀가 움찔했다.
겨우 이 정도로 이런 반응을 보이는 것을 보아하니, 어지간히 오벨리아를 멍청하게 본 모양이었다.
“놀랄 것 없어. 원로가 에크하르트 모르게 나와 만나길 원하는 이유야 그것뿐일 테니까.”
오벨리아가 조곤조곤 말을 덧붙였다.
이정도야 아주 바보가 아니고서야 조금만 생각하면 알아챌 일이었다.
“좋아, 방법은 그쪽에서 알아서 생각해내라고 해.”
오벨리아가 고개를 끄덕이며 쉬이 승낙했다.
길게 생각하지 않고 약간은 경솔해 보이기 위해서였다.
“예, 그럼 이거루트님께 말씀 전달하겠습니다.”
“알았어. 이만 가 봐.”
오벨리아가 고개를 끄덕이며 손을 휘휘 저었다.
시녀가 인사를 하고는 빠르게 사라졌다.
그리고 잠시 뒤, 그녀의 방 책장이 소리도 없이 움직였다.
“원로들이 생각보다 늦게 움직였군.”
책장이 치워지자 그곳에는 통로가 나 있었다.
에크하르트가 그 통로에서 빠져나오며 말했다.
아무래도 오벨리아의 안전을 위해 곁을 지키던 그림자 호위가 그에게 말을 전한 모양이었다.
“그러게, 꼬리를 잡기 쉽지 않겠는걸.”
오벨리아의 표정이 진지해졌다.
그녀가 생각에 빠져들려던 찰나였다.
울컥.
오벨리아가 다급하게 제 입을 틀어막았다.
그러나 그녀는 터져 나오는 기침을 막지 못했다.
“쿨럭…!”
오벨리아가 피를 토해냈다.
그녀의 가느다란 손목을 타고 왈칵 붉은 피가 흘렀다.
“오벨리아…!”
에크하르트가 반사적으로 휘청거리는 오벨리아의 몸을 받쳐 주기 위하여 움찔했다가 그 자리에 멈춰 섰다.
‘살아나기는 하셨습니다만… 아마 그 어떤 장기도 제 기능을 못 할 겁니다.’
에크하르트의 머릿속을 의원이 했던 말이 스쳐 지나갔다.
바실리스크의 독을 마시고 살아남았으니, 각혈쯤이야 당연한 반응이었다.
게다가 북부는 타 왕국이나 변방의 민족들과 맞닿아 있어 전쟁을 심심치 않게 치르는 곳이었다.
그러니 에크하르트가 피를 보는 것도 처음이 아니었다는 소리다.
그런데 과민하게 굴고 싶지 않았다.
어찌 되었든- 오벨리아 카테리안느는 힐켄테데의 사변을 묵인한 여자가 아니던가.
“…의원을 부르겠다.”
에크하르트가 오벨리아에게서 홱 돌아섰다.
그는 이 정도면 인간으로서 할 도리는 충분히 하는 거라고 생각했다.
탁.
“안 돼.”
그러나 오벨리아가 그런 에크하르트를 붙잡았다.
“…뭐?”
에크하르트가 미간을 잔뜩 찌푸리며 잘못 들었다는 듯이 반문했다.
누가 봐도 오벨리아의 모습은 꼭 당장 죽을 것만 같았다.
그런데 의원을 부르지 말라고 한 것이다.
무슨 소리인가 싶은 게 당연했다.
“기껏 나타난 힐켄테데의 딸이 사실은 곧 죽게 생겼다는 이야기가 혹시라도 퍼지면 어떻게 되겠어?”
오벨리아가 담담한 표정으로 말을 덧붙였다.
그녀는 스스로 죽기로 했다.
오벨리아에게는 피를 토한 일과 자신의 건강 따위 더 이상 중요한 일이 아니었다.
“참을 수 있어.”
“너….”
에크하르트가 말 끝을 흐렸다.
오벨리아의 냉정한 태도를 보고 있자니, 마치 그가 호들갑을 떤 것처럼 느껴졌다.
“알아서 하든가.”
에크하르트의 입에서 반사적으로 까칠한 소리가 흘러나갔다.
에크하르트는 이 이상 나서지 않기로 했다.
오벨리아를 걱정하는 것처럼 보이고 싶지 않았다.
그가 그녀에게서 휙 등을 돌렸다.
피를 토하고도 꼿꼿한 그 꼴이 자꾸만 거슬려서 두고 볼 수가 없었다.
“어디 가? 원로들에 대해 의논하기 위해 온 거 아니었어?”
오벨리아가 반쯤 몸을 일으켰다.
복수를 결정한 이후, 그녀의 마음은 시종일관 시급했다.
그러나 방금 피를 토한 오벨리아의 몸은 휘청거리다가 콰당 하고 기어코 넘어져 버렸다.
그로 인해 일부러 오벨리아를 외면하고 있던 에크하르트의 시선이 다시 그녀에게 향한 것은 반사적인 일이었다.
“넌, 대체…!”
에크하르트가 화를 내며 한걸음에 오벨리아에게 다가갔다.
그러자 그녀의 미간이 미미하게 찌푸려졌다.
“미안해, 거추장스럽게 굴려던 건 아니었는데….”
오벨리아가 한숨을 삼켰다.
에크하르트가 일전에 말한 대로, 자신의 건강은 스스로 챙기는 게 맞았다.
그런데 벌써부터 독에 당한 허약한 몸이 짐이 되고 있으니, 스스로 한심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
오벨리아의 사과에 에크하르트가 순간적으로 확 얼굴을 찌푸렸다.
그는 무언가 대단히 짜증스러운 듯 제 머리칼을 흐트러트리며 넘어진 그녀를 내려다봤다.
그럴수록 오벨리아는 빠르게 일어나려고 했으나, 이미 한 번 무너진 몸을 일으키기가 좀처럼 쉽지 않았다.
자신이 짐이 되는 것 같아 점차 오벨리아의 표정이 굳어졌다.
“입은 뒀다 뭐할 거지?”
그 순간 에크하르트의 손이 오벨리아의 몸을 쑥 일으켰다.
그는 한 팔만으로도 그녀의 몸무게를 쉽게 지탱하여 침대 위에 앉혀 놓았다.
“도와달란 말 하나 하기가 그렇게 자존심이 상하나?”
에크하르트가 치미는 짜증을 굳이 삼키지 않고 토해냈다.
오벨리아가 그에게 손만 뻗어도 쉽게 해결될 일이었다.
그런데 아무리 카펫이 깔려 있다지만 말 한마디 않고 방바닥에 주저앉아 있는 그녀의 꼴이 거슬렸다.
“그게 아니라….”
오벨리아가 입술을 달싹이다가 입을 다물었다.
그녀가 이제 와 에크하르트의 앞에서 세울 자존심이 어디 있겠는가.
사랑.
겨우 그 하나에 어리석게도 모든 것을 잃고 혈혈단신으로 이곳에 있고, 그는 그 수치스러운 사실 전부를 알고 있는데.
그저 감히 그에게 도움을 청해도 된다고 생각하지 않았을 뿐이었다.
그러나 오벨리아는 그것을 굳이 입 밖으로 내지 않았다.
그녀는 그런 식으로 에크하르트에게 동정심을 살 자격이 없다는 것쯤은 인지하고 있었다.
에크하르트가 또 다시 미간을 확 찌푸렸다.
오벨리아는 그에게 힐켄테데 사변의 진실을 숨긴 것에 대하여 변명 하나 하지 않았다.
그리고 이번에도 마찬가지였다.
이해하려야 할 수가 없는 여자였다.
“네 건강은 알아서 챙기라고 했을 텐데?”
그것이 다시금 에크하르트를 울컥하게 만들었다.
황궁에서 다시 만난 순간부터 두 사람의 관계는 일방적이었다.
그는 자신이 오벨리아에게 쭉 흔들리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게 대단히 거슬렸다.
“난 괜찮아.”
괜찮다는 말은 반사적인 것이었다.
오벨리아는 괜찮아야만 했다.
그녀의 잘못된 선택으로 죽은 이가 몇이던가.
오벨리아는 자신이 겨우 이런 것 따위에 아플 자격 따위 없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 아픔을 에크하르트의 앞에서 티 낼 자격은 더더욱 없었다.
그러나 오벨리아의 담담함은 에크하르트를 자극할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