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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한부 폐태자비는 살아있다-11화 (11/136)

11화. 어떤 관계의 시작(1)

“제럴드 로웰스턴은 황제의 사람이야. 말도 안 되는 소리 마.”

에크하르트가 단호하게 오벨리아를 만류했다.

커티스의 아들, 제럴드 로웰스턴은 현재 황실 기사단에 속한 자였다.

당연히 황태자비인 오벨리아를 가까이서 본 적도 있었다.

그런 자와 가까워진다는 건 그녀의 안위를 담보로 하는 짓이었다.

그렇지 않아도 원로들을 정리하는 일에 오벨리아를 내세운 게 탐탁지 않은 판에, 아예 그녀를 미끼로 내걸고 싶지는 않았다.

그건 에크하르트의 자존심이 용납하지 않는 일이었다.

“마침, 제럴드 로웰스턴이 휴가를 맞아 북부에 와 있다지. 그러니까….”

“안 된다고 했어.”

“에크하르트, 당신 대체 뭐가 문제야?”

이번에는 오벨리아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그녀는 저번부터 제 계획마다 불만이 있어 보이는 에크하르트를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내가 무얼.”

“내가 세우는 계획들이 마음에 안 든다는 티를 팍팍 내잖아. 당신한테 손해가 되는 것도 없는데!”

아니, 오히려 득이 될 일들뿐이었다.

오벨리아는 에크하르트와의 계약대로 착실히 일을 수행하는 중이었다.

그런데 그가 왜 저런 반응인지, 그녀는 도통 이해할 수 없었다.

“나는 최대한 쉽고 빠른 길을….”

“그놈의 쉬운 길!”

에크하르트가 또 다시 오벨리아의 말을 끊었다.

에크하르트의 속에서 그가 차마 무어라고 정의하지 못한 감정들이 끓어올랐다.

“오벨리아, 너의 계획들이 마음에 들지 않느냐고? 그래! 마음에 안 들어. 하나부터 열까지 다!”

에크하르트가 눈을 부릅뜨고 오벨리아를 쳐다봤다.

그의 눈에 여러 날 동안 계속해서 커티스를 쫓아다니느라 제대로 쉬지도 못하여 눈 밑이 거뭇하고 얼굴이 새하얗게 질린 오벨리아가 들어왔다.

막 죽었다 살아난 여자가 또다시 거침없이 제 생을 불태우는 모습이 적나라하게 보였다.

그 모습이 에크하르트로 하여금, 오벨리아에게 독약을 건넨 자신과 그 약을 먹고 죽어가던 그녀를 떠오르게 했다.

그래, 스스로 아무리 부정해도 그는 죽어가는 여자를 더욱 벼랑 끝으로 내몰기가 꺼려졌다.

“약혼에 대한 핑계는 내가 만들도록 하지. 그러니까 커티스의 아들과 얽히겠다는 생각은 그만둬.”

그래서 에크하르트는 오벨리아의 행동을 두고 볼 수 없었다.

게다가 오벨리아는 바실리스크의 독을 마신 이후, 점점 스러져가는 몸을 막기 위하여 매일 같이 독한 해독제를 마셨다.

그녀가 정상적인 몸이었다면 오히려 신체를 상하게 한다고 하여 의원이 절대 권하지 않았을 약이었다.

처음 각혈한 이후에도 종종 피를 토했고 장기가 상해 밥도 제대로 먹지 못한다고 들었다.

오벨리아는 그런 몸을 이끌고, 밤늦게 돌아온 날에도 원로들의 대화 내용을 기록해두는 일을 게을리하지 않았다.

에크하르트가 아무리 그녀를 미워한대도, 오벨리아가 자기 자신에게 하는 것만큼 가혹하게 굴 수는 없으리라.

그는 이미 스스로에게 지나치게 가혹한 여자를 괴롭히는 불한당이 되고 싶진 않았다.

“당신, 내게 독약을 건네준 걸 후회해?”

그러나 애석하게도, 오벨리아는 그런 에크하르트의 속내를 정확히 알아차려 버렸다.

“그래서 날 동정하는 건가?”

그리고 그것은 오벨리아를 견딜 수 없게 했다.

그녀는 더 이상 누군가 자신에게 마음을 쓰지 않길 바랐다.

설령 그게 자신을 미워하는 남자가 보이는 알량한 동정심이라고 할지라도 마찬가지였다.

왜냐하면 오벨리아는 이미 자신의 전부를 잃어서 텅 비어 버렸기 때문이다.

그런 텅 빈 속에 무언가 비집고 드는 순간, 그것이 그녀에게 얼마나 크게 작용할지는 스스로도 장담할 수 없는 일이었다.

오벨리아는 새삼스레 깨달았다.

그녀는 사람이 두려웠다.

정확히는 또다시 사랑과 신의를 믿다가 돌이킬 수 없는 결과를 불러올 자신이 무서웠다.

‘대공, 누군가를 사랑하고 믿는 것이 죄인가?’

우스운 일이었다.

에크하르트에게 그렇게 당당하게 말한 주제에, 오벨리아는 더 이상 사랑과 신의를 믿을 수 없었다.

“정신 차려.”

그래서 오벨리아는 에크하르트의 속을 일부러 뒤집으려 들었다.

그래야만 그가 제게 일말의 마음을 보이는 것조차 가치가 없다고 여길 테니까.

“내가 힐켄테데의 사변에 대해 3년간 침묵했다는 사실을 당신도 알고 있을 텐데?”

쾅!

“그걸 지금 감히 네 입으로…!”

에크하르트가 거세게 테이블을 내리쳤다.

그 힘에 테이블이 넘어질 뻔한 것을 그가 빠르게 잡아 막았으나, 화가 치민 탓인지 그의 어깨가 들썩이고 있었다.

에크하르트가 매섭게 오벨리아를 노려봤다.

에크하르트에게 알렉산드로가 가해자라면 오벨리아는 방관자다.

그것은 그가 이 불쌍한 여자를 온전히 안타깝게 여기지 못하도록 만드는 가장 큰 죄악이었다.

그런데 그걸 오벨리아가 자신의 입으로 저렇게 대놓고 이야기할 줄이야.

“너, 뻔뻔한 것도 정도가 있지…! 내가 지금 당장 네 목숨을 거둬도 모자랄 판이란 걸 잊어버린 건가?”

에크하르트가 상처 입은 짐승이 으르렁거리듯 고통 어린 분노를 토해냈다.

힐켄테데의 사변에서 유일하게 살아남은, 가짜 힐켄테데.

그건 힐켄테데 성을 휩쓸었던 화마에서 홀로 빠져나온 그의 흉 지고 덧난 상처였다.

“그러니까…!”

오벨리아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그녀가 에크하르트에게서 한 발짝 물러서며 말했다.

오벨리아는 방금 스스로가 더욱 혐오스러워졌다.

스스로가 상처 입지 않기 위해서 타인의 상처를 헤집었음을 그녀는 알고 있었다.

그러나 오벨리아는 진심으로 바랐다.

“그러니까, 그냥 마음 편하게 날 미워해. 나도 알렉산드로랑 별반 다를 바 없는 당신 원수잖아.”

차라리 에크하르트가 자신을 소모품으로 대하기를.

“날 신경 쓸 필요 전혀 없다고.”

오벨리아가 일부러 에크하르트와 시선을 똑바로 마주쳤다.

그녀는 그에게 죄인이다.

그렇지만 자신이 죄를 지었음을, 그로 인한 수치조차 모르는 것처럼 그렇게 고개를 빳빳이 들었다.

그 시선을 마주한 에크하르트의 입매가 비틀렸다.

일순간이나마 저런 여자를 동정했다니.

힐켄테데의 사변으로 죽은 모든 이들에게 잘못을 저지른 것 같았다.

“그래. 그깟 약혼, 하지.”

그깟.

에크하르트는 일부러 그런 단어를 골라, 오벨리아와의 약혼이 아무 의미 없음을 강조했다.

“커티스의 아들과도 네가 알아서 해.”

에크하르트의 목소리가 한없이 쌀쌀맞았다.

“알겠어.”

그러나 우습게도 그런 에크하르트의 모습에 오벨리아는 안도하고 말았다.

***

“에크하르트 님께서 오벨리아 님과의 약혼을 추진할 계획이시라더군요.”

며칠 뒤, 커티스가 오벨리아에게 말을 꺼냈다.

그녀가 일부러 에크하르트의 수하를 시켜 말을 흘린 보람이 있었다.

커티스는 늘 에크하르트를 대공 전하라고 부르지 않았는데, 그 속에서 그를 인정하기 싫은 커티스의 저의가 드러났다.

“오벨리아 님께서는 어떻게 하실 생각이십니까?”

커티스가 오벨리아를 떠보듯 물었다.

“힐켄테데에서 힘을 얻기 위해서는 나한테도 나쁜 방법이 아닌 거 같은데. 약혼으로 에크하르트만 이득을 보리란 법도 없잖아요?”

물론, 오벨리아의 말은 얼마든지 일리가 있었다.

오벨리아가 힐켄테데의 딸로 인정받았다지만, 그녀에게는 아직 실질적인 권한이 없었다.

오벨리아가 첫날부터 에크하르트와 반목한 이상 쉬이 권한을 내어주지 않을 게 뻔했다.

그러나 오벨리아가 안주인이 없는 성에 힐켄테데의 딸로서 예비 대공비가 되면 자연스럽게 권한이 그녀에게 올 수밖에 없었다.

오벨리아의 말은 그것을 노리고 있었다.

“…그건 그렇지요.”

커티스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오벨리아가 에크하르트의 편으로 넘어가는 게 아닐지 의심하는 모양새였다.

“원로, 나는 약혼쯤이야 언제든 깰 수 있다고 생각하는데. 원로는 어떤가요?”

커티스와 눈을 마주친 오벨리아가 비밀을 속닥이듯 목소리를 낮추었다.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뜬금없는 오벨리아의 말에 커티스가 눈에 띄게 멈칫했다.

오랜 세월 북부에서 주요 역할을 해 온 자였으니, 그녀가 무슨 말을 할지 대략 눈치를 챘으리라.

“커티스, 아들이 있다죠.”

오벨리아가 넌지시 운을 띄웠다.

“…예, 그렇습니다만.”

커티스가 조심히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의 안에 내재된 욕망을 최대한 드러내지 않으려는 모양새였다.

평소 같았으면 노련한 원로로서 그는 기꺼이 그렇게 할 수 있었을 터다.

“내가 생각하기에, 나는 힐켄테데에 돌아온 지 얼마 되지 않았으니 도와줄 사람이 필요할 것 같은데….”

그렇지만, 아마도… 커티스는 오벨리아와 거래를 하는 순간부터 내도록 이런 욕망을 가졌을 것이다.

예를 들어 제 아들을 대공 혹은 대공의 부서(夫壻) 자리에 앉힐 수 있다는 그런 욕망을.

그러니 어찌 기쁘지 않겠는가.

“나는 그게 원로의 아들이면 어떨까 싶어요.”

오벨리아가 커티스의 아들을 먼저 제 옆에 두겠다는 말을 꺼낼 때까지, 그 이상의 말을 더하지 않고 입을 다물고 있는 것이 커티스로서는 최선의 노력이었으리라.

이렇듯, 그녀의 말이 끝나자마자 커티스의 얼굴이 밝아진 것을 보면 말이다.

“그것이 오벨리아 님의 뜻이라면 기꺼이 따르겠습니다.”

커티스가 숨기고 숨겨도 결국 드러나 버리는 환한 표정으로 고개를 숙였다.

오벨리아는 빤히 보이는 그 모습을 그저 모른 척했다.

며칠 뒤, 에크하르트는 오벨리아와의 약혼을 주장했다.

커티스 일파는 그에 관하여 언제나 그랬듯이 대공의 뜻을 따르는 척 약혼에 찬성했다.

프렐런트는 에크하르트의 혈통을 늘 못마땅하게 여겼으니, 그 혈통을 보완할 좋은 방법을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그리하여 그녀와 에크하르트의 약혼은 아주 손쉽게 성사되었다.

***

오벨리아와 에크하르트는 약혼식을 생략하기로 했다.

아직은 그녀의 모습을 보다 더 많은 이에게 드러낼 때가 아니었기 때문이었으나, 표면상의 이유는 두 사람의 사이가 좋지 않은 탓으로 갈무리되었다.

그러나 오벨리아와 에크하르트의 약혼을 축하한다는 핑계로 찾아드는 사람들까지는 말릴 수 없었다.

그 탓에 두 사람은 며칠간 피곤함에 시달려야만 했다.

그러나 마지막 방문자가 응접실에 들어왔을 때, 오벨리아는 자신의 피로가 이제부터 시작되리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제럴드 로웰스턴이라고 합니다.”

왜냐하면 오벨리아가 노렸던 대로, 커티스의 아들이 그녀를 찾아왔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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