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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한부 폐태자비는 살아있다-12화 (12/136)

12화. 어떤 관계의 시작(2)

“반가워. 내가 도와줄 사람이 필요하다고 했는데, 커티스가 보냈나 보네.”

오벨리아가 제럴드의 손을 잡아 악수했다.

일부러 그의 허락도 구하지 않고 말을 낮추기까지 한 오만한 행동이었다.

커티스가 처음 시녀를 보내 연락을 취했을 때도 그러했듯이, 둘 사이의 신분 격차를 확인시키려는 것처럼 굴기 위하여.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오벨리아 님.”

그러나 제럴드는 도리어 고개를 숙여 오벨리아의 손등에 정중히 입을 맞췄다.

그에게서 불쾌한 기색은 단 하나도 찾아 볼 수 없었다.

“앞으로 오벨리아 님을 성심성의껏 보좌해 드리겠습니다.”

커티스가 오벨리아에게 제럴드를 보낸 목적은 그녀도 알고 제럴드도 알았다.

그런데 제럴드는 마치 그런 사실이 없었던 양 참으로 아무렇지 않게 굴었다.

“만나서 반가워.”

오벨리아가 고개를 치켜들었다.

자신을 떠받드는 제럴드의 이런 태도가 당연하다는 것처럼 콧대 높은 태도였다.

“오벨리아 님을 모실 수 있게 돼서 기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럴드는 여전히 미소하고 있었다.

오벨리아가 대충 고개를 끄덕이며 제 손을 빼려던 찰나였다.

“제럴드?”

제럴드가 오벨리아의 손을 잡고 놓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더 꽉 잡아 왔다.

“…손이 정말 고우십니다, 오벨리아님.”

제럴드의 손가락이 은근히 오벨리아의 손등을 문질렀다.

오벨리아가 손을 움찔했다.

그 행동이 기묘하게 기분이 나빴다.

그리고 그 순간 깨달았다.

아, 이 남자는 자신을 ‘전리품’이라 여기는구나.

“칭찬 고마워.”

오벨리아가 막 깨달은 것을 모른 척 웃으며 손을 빼냈다.

전리품.

그것은 얻기 힘들면 힘들수록, 아름답고 희귀할수록 그 가치가 드높다.

오벨리아는 아름답고 현재 힐켄테데의 딸이었다.

그러니 그녀의 성격쯤은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을 터였다.

어차피 전리품을 얻기 위한 힘든 과정 중 일부일 뿐일 테니까.

‘나는 아무것도 가진 게 없어, 카테리안느 영애.’

오벨리아의 시선이 가라앉았다.

아름답고 고귀한 혈통을 가진 여자.

그녀를 트로피 보듯 하는 남자는 무수히도 많았다.

그리고 그 속에서 알렉산드로만큼은 달랐다.

그는 오벨리아를 쟁취하고 싶어 하는 게 아니라, 그녀에게 미안해하는 사람이었다.

그러니까 변명하자면, 그래서 사랑하지 않을 수 없었다.

오벨리아의 기분은 순식간에 바닥을 내리찍었다.

대단히 불유쾌하게도 알렉산드로란 그녀에게 그런 존재였다.

“…오벨리아 님?”

오벨리아가 잠시 생각에 빠져 있자, 제럴드가 의아한 기색을 표했다.

그제야 그녀에게서 뒤늦게 반응이 돌아왔다.

“아, 그러니까….”

오벨리아가 애써 불유쾌한 생각을 지워내고 미소했다.

알렉산드로 같은 사람도 겪어 봤다.

그러니 이미 그녀가 무수히 상대해 본 제럴드 같은 유형의 남자 따위 전혀 어려울 게 없었다.

“앞으로 잘 부탁해.”

“저야말로 잘 부탁드립니다, 오벨리아 님.”

제럴드가 장단을 맞추듯 마주 미소했다.

그날의 대면은 다행인지 아닌지 그렇게 약간의 불쾌함만을 남기고 끝났다.

***

당연한 말이지만 그 후 오벨리아는 제럴드와 함께 있는 시간이 길어졌다.

에크하르트는 그 모습을 볼 때마다 일부러 모른 척 고개를 돌려 버렸다.

그렇게 하지 않아도 된다고 했는데 굳이 제럴드를 끌어들인 것은 오벨리아의 선택이었다.

에크하르트가 책임질 일이 아니란 말이다.

“대공 전하를 뵙습니다.”

제럴드의 손에는 오벨리아에게 주기 위한 것인 듯 꽃다발이 들려 있었다.

“요즘 들어서 내 성에 자주 드나드는군.”

에크하르트가 눈을 가늘게 뜨며 말했다.

스스로는 인지하지 못했으나, 그것은 일종의 경고 같았다.

자신의 약혼녀 주변을 지나치게 맴도는 남자에 대한 경고.

“오벨리아 님께서 제 도움을 많이 필요로 하셔서요.”

그러나 에크하르트가 그런 뉘앙스를 의도했던 간에, 아니었던 간에 상관없이 제럴드의 대답은 오만했다.

오벨리아가 원하니 자신도 어쩔 수 없다는 변명이 아니었다.

그녀가 원하는데, 넌들 어쩌겠냐는 건방짐이었다.

그것을 알아차린 에크하르트의 표정이 굳었다.

“힐켄테데에게 네 도움 따위가 필요하던가?”

에크하르트의 음성이 서늘했다.

제럴드는 등골이 쭈뼛 서는 기분에 그대로 얼어 버렸다.

제럴드가 아무리 황실 기사라고 해도, 북부의 수많은 전쟁을 치러낸 에크하르트에게는 풋내기에 불과했다.

위압감이 제럴드를 짓눌렀다.

그가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숙였다.

“대답.”

에크하르트가 제럴드를 내려다봤다.

제럴드는 방금 전과 달리 에크하르트와 차마 시선을 마주치지도 못했다.

에크하르트가 다시 한 번 대답을 종용했다.

“대답, 안 할 건가?”

“죄… 죄송합니다! 제가, 실언했습니다!”

그제야 얼어 있던 상태에서 강제로 깨어난 제럴드가 황급히 허리를 숙였다.

“실수에 두 번은 없네, 제럴드 로웰스턴.”

그 다음에는 봐주지 않겠다는 뜻이었다.

제럴드는 숨조차 제대로 쉬지 못하고 굳어 허리를 숙이고 있었다.

에크하르트가 제럴드를 지나쳐 갔다.

에크하르트야말로 오만, 그 자체였다.

한낱 시건방짐 따위가 흉내 낼 수 없는.

***

제럴드와 마주친 이후로 에크하르트는 생각이 많아졌다.

원로들조차 에크하르트를 대적하면서도 그에게 오만방자하게 굴지는 못했다.

그런데 제럴드는 에크하르트에게 뻗대던 자다.

‘오벨리아 님께서 제 도움을 많이 필요로 하셔서요.’

그런 자가 오벨리아는 대체 어떻게 대하겠는가?

에크하르트는 오벨리아를 언급하던 때의 제럴드를 상기했다.

제럴드의 말투에는 그녀를 향한 무시가 들어 있었다.

굳이 숨기려고도 하지 않았기 때문에 알아차리기에는 어렵지 않았다.

제럴드는 오벨리아가 자신의 손아귀에 있음을 자랑하고 싶어 했다.

그건 한 인간을 대하는 태도가 아니었다.

제럴드에게 오벨리아는 전리품이다.

에크하르트는 그 사실을 알아차려 버렸다.

“…할 말 있어?”

오벨리아가 떨떠름한 표정으로 자신에게 시선이 박혀 있는 에크하르트를 쳐다봤다.

그제야 그는 자신의 생각에서 빠져나왔다.

지금은 오벨리아와 회의를 하던 중이었다.

“별로.”

에크하르트가 미간을 찌푸렸다.

자신이 오벨리아와 제럴드에 대하여 이렇게까지 깊게 생각에 빠졌었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제럴드 로웰스턴은 어떤 자지?”

그럼에도 불구하고 에크하르트의 입에서는 그의 이성을 배반한 말이 흘러나왔다.

에크하르트는 표정이 일그러지려는 것을 애써 참았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말을 취소하지 않았다.

변명하자면 말을 번복하여 구차해지고 싶지 않았고 좀 더 솔직해지자면 대답이 궁금한 탓이었다.

“그저 그런 남자.”

제럴드를 그렇게 평가하는 오벨리아의 얼굴은 지극히 평온했다.

에크하르트는 직감적으로 그녀가 제럴드의 실체를 인지하고 있음을 알아차렸다.

“…너를 전리품처럼 여기는 것을 알면서도 그자를 곁에 두겠다고?”

에크하르트는 이번만큼은 미간이 찌푸려지는 것을 막지 못했다.

보통 자신을 그딴 식으로 여긴다는 사실을 알면 불쾌해하는 것이 정상이 아니던가?

그런데 오벨리아는 너무나 태연했다.

그쯤이야 상관없다는 듯이.

그래서 오히려 에크하르트의 기분이 불쾌해졌다.

“그러니까 더 옆에 두는 거지. 그런 자일수록 이용하기가 수월하니까.”

그른 말은 아니다.

‘그럼 제럴드 로웰스턴 때문에 네가 느낄 것들은?’

그러나 에크하르트는 치밀 뻔한 말을 입 안쪽 살을 깨물어가며 삼켰다.

제럴드를 이용하는 것과 별개로, 자신을 물건처럼 다루는 사람과 가깝게 지내는 일이 누구에겐들 달갑겠는가?

심지어 에크하르트에게는 제럴드를 불러들이지 않고도 오벨리아와 약혼할 방법이 있었다.

그런데도 그는 그녀의 행동을 방관했다.

오벨리아가 자처한 일이니까, 그녀는 에크하르트의 원수와 같으므로 굳이 그가 신경 써 줄 필요는 없으니까.

에크하르트가 거칠게 제 머리칼을 쓸어 올렸다.

그는 제 손에 사람의 피를 묻히고 살아온 자다.

오벨리아가 뭐라고.

저 원수 같은 여자가 이토록이나 신경 쓰이는가.

또 다른 불쾌감이 에크하르트의 안에 차올랐다.

‘그러니까, 그냥 마음 편하게 날 미워해. 나도 알렉산드로랑 별반 다를 바 없는 당신 원수잖아.’

그래, 에크하르트는 오벨리아를 미워해야 한다.

그게 정상이다.

실제로 그는 지금도 그녀가 미웠다.

어떻게 밉지 않겠는가.

3년을 사건의 진상만을 쫓아왔는데, 그것에 관하여 내내 입을 다물고 있던 사람이 눈앞에 있는데.

“좋아, 그렇다면 나도 제럴드 로웰스턴을 좀 이용해야겠는데.”

순간 에크하르트의 입매가 비틀렸다.

그래, 그는 오벨리아 카테리안느가 밉다.

미워서 견딜 수 없다.

그러니까 자신은 그녀의 사정을 봐줄 이유 따위 전혀 없었다.

오벨리아의 뜻대로, 그는 복수를 위해 그녀를 이용하면 그만이었다.

“네가 해 줘야 할 게 있어. 며칠 뒤, 로웰스턴가의 저택에서 초대가 올 거다.”

에크하르트는 그렇게라도 자신이 얼마나 오벨리아를 미워하는지 증명하고 싶었다.

“그날, 어떻게든 제럴드 로웰스턴을 붙잡아 놔.”

에크하르트의 말은 오벨리아가 제럴드와 단둘이 남을 수도 있는 상황을 내포하고 있었다.

아무리 그가 그녀에게 호위를 붙여 주었어도, 단둘만 있는 공간에서 제럴드가 오벨리아에게 어떤 손을 쓰는 게 더 빠를 수도 있었다.

물론, 에크하르트는 그것을 알면서도 내뱉은 말이었다.

나는 네가 불행하길 바란다.

나는 네가 미우니까.

그러니 너 따위쯤은 얼마든지 이용할 수 있다.

그런 것들을 증명하기 위하여.

“알겠어.”

오벨리아는 똑똑하다.

그녀를 이용하고자 하는 에크하르트의 이런 뜻을 모르지 않을 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벨리아는 쉽게 고개를 끄덕였다.

마치 그가 자신을 이용하는 게 아주 당연한 것처럼.

그 모습을 보고 있는 에크하르트의 안에서 또 다시 불쾌감이 치밀었다.

그는 꾸역꾸역 그것을 삼켜냈다.

정말이지, 알게 뭐란 말인가.

저딴 여자가 어떻게 행동하든 간에 말든 간에.

에크하르트는 제 속을 휘젓는 감정들을 기꺼이 모른 척했다.

그리고 며칠 뒤, 그의 말대로 에크하르트와 오벨리아는 로웰스턴 저택에 초대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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