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화. 어떤 관계의 시작(3)
힐켄테데의 가주들이 원로나 가신들과 관계를 돈독히 하기 위하여 저녁 식사 자리를 가지는 것은 흔한 일이었다.
게다가 북부는 워낙 넓었고, 그래서 힐켄테데 대공이 북부의 영지들을 시찰하는 날이면 힐켄테데 성으로 돌아가지 못하는 날도 많았다.
그런 날 근처 원로나 가신의 저택에 초대받아 머무르는 것은 특별하지도 않았다.
그렇게 에크하르트와 오벨리아는 손쉽게 로웰스턴 저택에 진입했다.
“어서 오십시오, 대공 전하, 오벨리아 님.”
막 도착한 에크하르트와 오벨리아를 맞이한 것은 제럴드였다.
대공비가 아니라 오벨리아.
그 호칭에 에크하르트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그의 경고를 잊은 건지, 혹은 기억하면서도 저렇게 구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
“지나치게 격의가 없군, 로웰스턴 경.”
에크하르트가 서늘한 목소리로 그것을 지적했다.
“내가 그러라고 허락했어.”
그러나 오벨리아가 마치 그에게서 제럴드를 보호하듯이 앞으로 나섰다.
그로 인해 에크하르트의 표정이 굳은 것은 당연지사였다.
물론, 두 사람은 공식적으로 사이가 좋지 않다.
게다가 오벨리아는 제럴드와 각별해 보일 법한 관계를 맺어야 했으니 그녀의 행동은 틀리지 않았다.
그걸 알고 있음에도 에크하르트의 기분은 나아지지 않았다.
“오벨리아 님, 제가 에스코트를 해 드려도 되겠습니까?”
제럴드가 오벨리아의 앞에 정중히 손을 내밀었다.
언뜻 굉장히 예의 바르게 보였으나, 약혼자인 에크하르트의 앞에서 하기에는 터무니없는 행동이었다.
그야말로 오벨리아를 믿고 날뛰는 격이었다.
에크하르트는 그간 그녀와 제럴드가 얼마나 가까워지든 무시했다.
그 덕에 제럴드는 오벨리아와 자신이 그만큼의 사이라고 판단한 모양이었다.
“얼마든지.”
오벨리아가 제럴드의 손을 붙잡았다.
그 순간 제럴드가 아닌 척 그녀를 자신의 쪽으로 홱 끌어당겼다.
“아…!”
오벨리아의 몸이 휘청거리며 제럴드의 쪽으로 기울었다.
다행이라고 말할 수 있을는지는 모르겠지만, 제럴드가 그녀를 받친 덕에 넘어지지는 않았다.
그가 오벨리아의 균형이 무너지는 것을 노리고 힘을 썼으니 당연한 결과였다.
“지금-.”
“잡아 줘서 고마워, 제럴드.”
에크하르트가 자신도 모르게 목소리를 내었다가 이를 꽉 악물었다.
오벨리아가 재빠르게 말을 하지 않았더라면 화를 냈을 것이다.
제럴드는 에크하르트에게 일부러 한 행동임에도 불구하고 그를 믿어 순진하게 고맙다고 말하는 그녀를 보란 듯이 자신만만하게 미소했다.
제럴드는 오벨리아를 가지고 과시하고 있었다.
소유물 다루듯 하는 그 작태가 역겨웠다.
그리고 더 역겨운 것은 그런 제럴드에게 오벨리아를 밀어 넣은 에크하르트, 자신이었다.
“그럼 들어가실까요.”
그 앞에서 마치 승리한 듯 미소 짓고 있는 제럴드 따위는 중요하지 않았다.
어차피 진짜로 아무것도 모르는 건 제럴드 로웰스턴이니까.
그저 누군가가 밉다는 이유로 이렇게까지 해도 되는가, 그 사실이 에크하르트를 괴롭힐 따름이었다.
“그래.”
그러나 에크하르트는 끝내 오벨리아가 제럴드의 에스코트를 받아 안으로 들어가는 것을 막지 않았다.
그는 성인군자가 아니고, 자신의 어머니를 사랑했으며 자신을 따르던 고용인들을 아꼈다.
그 모든 이들의 끔찍한 최후에 발을 담근 여자를 위하는 모든 일을 에크하르트는 스스로 용납할 수 없었다.
그리하여 그는 차라리 자신의 안에 깃드는 것들을 외면하기로 했다.
***
저녁 만찬 이후 에크하르트는 커티스와 단둘이 대화할 것이 있다며 자리를 비웠다.
오벨리아는 자연스럽게 제럴드와 남게 됐다.
그녀가 제럴드를 붙잡아놓기로 했으니 맡은 바 역할을 하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오벨리아와 제럴드는 만찬 이후 티타임을 가지는 중이었다.
“오벨리아 님.”
제럴드가 문득 오벨리아를 불렀다.
그녀가 물끄러미 그 시선을 마주했다.
오벨리아가 로웰스턴 저택에 들어서던 그 순간부터, 그의 시선 안에는 어떤 열망이 맴돌고 있었다.
끈적끈적하고, 제멋대로의 기대에 물들어 부푸는 열망이.
“굳이 로웰스턴 저택을 찾아 주신 것은 저를 만나러 오신 것이라고 여겨도 되겠습니까?”
그리고 오벨리아의 판단은 틀리지 않아서, 그녀에게 묻는 제럴드의 목소리는 어느덧 분명하게 들떠 있었다.
오벨리아와 에크하르트가 어느 정도 의도한 것이기는 했다.
로웰스턴 저택 근처에는 코넬리아 장로의 저택도 있었다.
오벨리아가 요즘 내내 제럴드를 옆에 뒀으니, 남들이 보기에 약혼자인 에크하르트로서는 로웰스턴 저택에 오기 껄끄러울 법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와 그는 로웰스턴 저택에서 하루를 지내기로 결정했다.
그 결정에 누구의 의견이 차지하는 비중이 컸겠는가.
제럴드가 오해하는 것도 아주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제럴드, 네 뜻대로 생각해.”
오벨리아는 그런 오해에 불을 붙이듯 명확한 대답을 내놓지 않았다.
그러자 제럴드가 맞은편 자리에서 일어나 그녀의 옆으로 다가왔다.
그가 오벨리아의 옆에 나란히 앉아 목소리를 낮추었다.
“앞으로도 이렇게 계속 오벨리아 님의 옆에 있을 수 있다면 좋겠습니다.”
제럴드가 부드럽게 미소했다.
그 얼굴이 제법 순수해 보였다.
그러나 오벨리아가 그가 말하는 ‘옆’이 어떤 의미인지 모를 턱이 없었다.
“제럴드가 계속 나를 보좌해 준다면 나야 좋지.”
그래서 오벨리아는 모른 척 대꾸했다.
나중을 대비해서라도 괜히 트집 잡힐 일 없게 확답은 피하는 것이 좋았다.
“저는 단순히 보좌만 하고 싶진 않습니다.”
순간 제럴드가 오벨리아에게로 훅 가까워졌다.
지금까지 그녀의 옆자리를 노리지 않는 것처럼 아닌 척 애매한 거리를 지켜 오던 것과는 매우 다른 태도였다.
오벨리아가 자신도 모르게 주춤거리며 상체를 뒤로 뺐다.
제럴드가 왜 갑자기 선을 넘어오는지 당황스러웠다.
힐켄테데 저택이 아닌 곳에서 단둘만 남으면 무슨 일이 있을지도 모른다.
그런 것은 머릿속에 확률이 낮은 가정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제럴드?”
오벨리아가 일부러 당황스러운 기색을 내비쳤다.
그가 제게 왜 이러는지 모르겠다는 것처럼.
두 사람의 갑을 관계는 명확했다.
제럴드가 그녀에게 일방적으로 잘 보여야만 했다.
그러니 굳이 당장 밀어내지 않아도 오벨리아를 난감하게 하지 않을 거라는 판단 하에서였다.
“에크하르트 님께서 생각보다 오벨리아 님께 관심이 많으신 모양입니다.”
그러나 제럴드는 오벨리아가 멀어진 만큼 가까이 다가왔다.
그의 손이 그녀의 손등 위로 겹쳐졌다.
제럴드의 눈을 마주한 오벨리아의 등골에 오소소 소름이 돋았다.
그 두 눈이 너무나 집요해 보이는 탓이었다.
오벨리아가 평소 항상 제럴드에게 자신의 옆을 줄 것처럼 굴었기 때문에, 그는 마음 놓고 그녀가 자신의 것인 양 굴었다.
그런데 뭐가 수틀려 제 전리품을 빼앗길까 봐 전전긍긍하고 있는지 알 수 없었다.
그리고 그 답은 어렵지 않게 제럴드의 입에서 나왔다.
“얼마 전에 에크하르트 님께서 제게 경고를 하시더군요.”
제럴드의 입매가 비틀렸다.
에크하르트가 그에게 경고했던 날 제대로 대처도 못 했다는 것이 대단히 자존심 상했다.
“제게 오벨리아 님과 거리를 두라고요. 그리고….”
일러바치듯 말을 잇던 제럴드가 잠시 말을 끊었다.
‘힐켄테데에게 네 도움 따위가 필요하던가?’
에크하르트의 그 말은 오벨리아를 우습게 보지 말라는 경고였다.
“제가 오벨리아 님에게 필요 없다는 식으로 말씀하셨습니다.”
제럴드가 교묘하게 말을 꼬았다.
그는 에크하르트가 오벨리아를 위한 말을 했다는 사실을 일부러 숨겼다.
“오늘도 그렇습니다. 넘어지려는 오벨리아 님을 붙잡아 드린 것뿐인데, 저를 매섭게 노려보시더군요.”
오벨리아가 낭패 어린 표정을 애써 숨겼다.
왜 티 나게 그녀를 휘청거리게 해 놓고 잡아 주는 쇼를 벌이나 했더니, 에크하르트의 반응을 확인하기 위함이었나보다.
오벨리아는 빠르게 상황을 파악했다.
제럴드가 한 말을 모두 믿을 생각 따위 없었으나, 에크하르트가 한 어떤 행동이 제럴드를 자극한 모양이었다.
‘쓸데없이….’
오벨리아가 입 안의 살을 깨물었다.
하여간에 에크하르트는 너무 우직하고 정의롭다.
자신을 마음 편히 미워하면 될 텐데, 어차피 마실 독약병을 건넸다는 이유 따위로 그녀를 계속해서 신경 쓰고 있지 않은가.
“제가 오벨리아 님을 열심히 보좌하던 이유를 전혀 모르지는 않으시리라고 생각합니다.”
열심히.
그렇게 말하기에는 오벨리아의 신뢰를 얻기 위해 약간의 정보를 물어 오던 초반을 제외하면, 제럴드는 그녀와 웃고 떠들었을 뿐이므로 퍽 우스운 말이었다.
그렇지만 여기서 네가 언제 열심히 했느냐고 묻거나, 전혀 모른다고 대답할 수는 없었다.
“오벨리아 님을 사랑합니다.”
제럴드가 호소하는 눈으로 오벨리아를 바라보며 말했다.
그는 진심으로 그녀를 사랑하는 것처럼 보였다.
하긴, 그것도 사랑이라면 사랑이었다.
전리품 중에 가장 아름다운 것을 가장 아끼는 것과 같이.
오벨리아는 이제 완전히 말을 잃어버렸다.
제럴드가 저렇게 대놓고 나온 이상, 그녀가 말을 돌리거나 모른 척하기도 난감해졌다.
“조금만 기다려 줘, 제럴드. 너도 알다시피 지금은 에크하르트가 힐켄테데에 행사하는 힘이 막강해서….”
그래서 오벨리아는 대신 변명했다.
평소라면 제럴드도 이 정도에서 만족했을 터였다.
그는 타인에게는 오만한 오벨리아 힐켄테데가 자신에게만 약하게 구는 것을 대단히 만족스러워했다.
그러나 제럴드는 보통 때와 달리 오늘은 그것으로 만족할 수 없는 모양이었다.
그가 그녀의 말을 끊어냈다.
“저는 얼마든지 기다려 드릴 수 있습니다. 다만….”
제럴드의 두 눈이 번뜩였다.
오벨리아가 불길함을 느끼고 일어서려던 찰나였다.
“제게 증표를 주십시오.”
제럴드가 반쯤 일어난 오벨리아의 팔을 홱 잡아당겼다.
여자를 소유물 취급하는 남자들이 의례 그렇듯, ‘증표’가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너무 뻔하고 진부한 일이었다.
탁.
그러나 오벨리아의 몸은 쓰러지지 않았다.
잡힌 팔목을 타고 오르는 불쾌감에 두 눈을 질끈 감았던 오벨리아가 눈을 떴다.
누군가의 손이 그녀의 양어깨를 붙잡아 지탱하고 있었다.
“지난번에 기껏 봐 주었더니- 못 하는 소리가 없군. 내 말이 경고 같지 않았나 보지?”
에크하르트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