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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한부 폐태자비는 살아있다-14화 (14/136)

14화. 어떤 관계의 시작(4)

군대급에 해당하는 기사단을 가지고 있는 것은 당연히 힐켄테데나 공작쯤은 되어야 하는 일이었다.

후작일지라도 세가 어느 정도 있지 않고야 그 정도의 기사단을 가질 수 없었으니, 공식적으로 백작위를 가진 로웰스턴이라고 한들 다를 리가 없었다.

그래서 로웰스턴 저택에서 가장 뛰어난 기사는 황실 기사인 제럴드였다.

그리고 그 아래로 뛰어난 기사들은 커티스의 호위를 맡고 있다.

그러니까 두 사람만 묶어 둔다면 에크하르트의 수하들이 로웰스턴 저택을 몰래 뒤지는 일이 훨씬 수월할 거라는 의미였다.

그래서 만찬 후 에크하르트는 커티스를, 오벨리아는 제럴드를 맡게 된 것이었다.

두 사람을 붙여 놓으면 아무래도 둘 중 하나가 중간에 대화에서 빠져나갈 위험이 있을 수도 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결론적으로 에크하르트는 커티스와의 대화에 하나도 집중하지 못했다.

‘…무슨 일이 있는 건 아니겠지.’

이유는 하나였다.

제럴드와 단둘이 남은 오벨리아가 신경 쓰인 탓이었다.

“그래서….”

커티스가 에크하르트의 앞에서 끊임없이 무언가를 말했다.

그러나 그는 이야기를 듣는 내내 자리에서 일어날지 말지 그것 하나를 갈등했다.

그리고 끝내 에크하르트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고 말았다.

오벨리아 또한 그의 원수와 같다.

그 사실을 되새기고 되새겨도 제럴드와 그녀를 둘만 남겨 놓은 것은 에크하르트, 자신의 잘못 같았다.

“대공 전하?”

커티스가 갑자기 일어난 에크하르트를 의아하게 쳐다봤다.

그러나 에크하르트는 그 시선조차 신경 쓰지 못한 채로, 커티스의 집무실을 나섰다.

그렇게 해서 제럴드의 응접실에 와 보니 보이는 광경이 이 지경이었다.

“제게 증표를 주십시오.”

제럴드가 오벨리아에게 말도 안 되는 것을 요구하고 있는, 그딴 상황.

“지난번에 기껏 봐 주었더니- 못 하는 소리가 없군. 내 말이 경고 같지 않았나 보지?”

변명하자면, 에크하르트는 오벨리아가 아닌 그 누구라도 할지라도 이런 부당한 상황에 놓이도록 두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 그가 자처하여 이런 상황을 만들어놓았다,

이미 저질렀으나, 스스로 용납할 수 없는 일이었다.

에크하르트의 오만과 냉정은 스스로에 대한 자부심을 기반으로 했다.

지금, 그런 그의 자부심에 금이 가고 있었다.

“제럴드, 네 이놈…! 지금 감히 오벨리아 님께 무슨 무례를 저지르고 있는 게야!”

에크하르트를 분주히 쫓아온 커티스가 소리치지 않았더라면, 에크하르트는 금이 간 자부심을 위해서라도 검을 빼 들었을 것이다.

약혼녀를 모욕한 것은 분명 약혼자가 분노할 만한 일이기도 했으니까.

물론 그랬다면, 계획한 일들이 어그러질 수도 있었겠지만 말이다.

“죄송합니다, 대공 전하, 오벨리아 님. 제가 아들을 잘못 키운 탓입니다…!”

에크하르트가 뭐라고 입을 열기도 전에 커티스가 일부러 요란을 떨었다.

그렇게 해서라도 제 아들의 죄를 낮추어 보려는 속셈이 뻔했다.

그러나 커티스의 그 요란함이 다행이라면 다행이었다.

그로 인해 굳어 있던 오벨리아의 정신이 들었으니까.

“…소란 떨 것 없어.”

그리하여 정신을 차린 오벨리아가 한발 늦게 입을 열었다.

이대로라면 제럴드와의 사이가 완전히 틀어질 터였다.

그렇게 되면 커티스의 신뢰를 손쉽게 얻을 기회를 잃는 셈이었다.

“별일 아니었으니까.”

에크하르트의 난입으로 인해 얼어붙었던 제럴드의 얼굴이 피어나는 순간이었다.

오벨리아의 담담한 반응이 싸늘해지게 한 것은 에크하르트였다.

달아올랐던 그의 정신은 순식간에 식어 내렸다.

“…로웰스턴 장로, 그대도 그렇게 생각하나?”

에크하르트가 휙 돌아서 커티스를 마주했다.

그 행동이 마치 오벨리아를 상대하지 않겠다는 것처럼 보였다.

“그대의 아들이 내 약혼녀에게 지나치게 가까이 있는데 말이야.”

에크하르트가 불쾌감을 표했다.

확실히 그 말의 내용은 둘째치고서라도 약혼자가 있는 여자를 상대로 제럴드의 행동은 도를 넘었다.

증표라는 단어로 명확히 표현하지 않은 속 내용은 아닌 척하더라도, 제럴드가 오벨리아에게 과도하게 밀착하고 있음은 부정할 수 없었다.

게다가 공식적으로 커티스는 에크하르트에게 우호적인 측이었다.

커티스가 뒤로 오벨리아와 무슨 작당을 하고 있든, 그는 현재 에크하르트의 편을 들어야 하는 입장이란 의미였다.

“죄송합니다, 대공 전하.”

결국 커티스의 대답은 정해져 있었다.

“뭐 하고 있어, 제럴드! 당장 두 분께 사죄드리지 않고!”

커티스가 제럴드를 자신의 쪽으로 홱 잡아당기며 호통을 쳤다.

오벨리아의 표정이 굳었다.

에크하르트가 저렇게까지 나온 데다, 커티스가 그에 동조하는 이상 그녀도 더는 제럴드를 옹호할 수 없었다.

“죄송합니다. 제가 실수를….”

제럴드 또한 그 사실을 깨달았는지 나아졌던 안색이 도로 나빠졌다.

에크하르트는 때를 놓치지 않고 제럴드의 말을 끊었다.

“실수에 두 번은 없다고 했을 텐데.”

에크하르트의 낮은 목소리가 묵직하게 공간을 울렸다.

그의 시선이 제럴드는 완전히 무시한 채 커티스를 천천히 짓누르듯 훑었다.

쿵!

그 순간 온몸에 소름이 쫙 돋은 커티스가 큰 소리와 함께 무릎을 꿇었다.

“전하, 자식 잘못 가르친 제 탓이라 여기시고 한 번만… 한 번만 더 아량을 베풀어 주십시오. 이놈이 오벨리아 님의 근처에 두 번 다시는 얼씬도 하지 못하도록 하겠습니다!”

에크하르트는 필요하다면 그 손속이 얼마든지 무자비하고 단호해질 수 있는 자다.

커티스가 아는 대공은 그랬다.

커티스가 에크하르트 몰래 다른 짓을 하면서도, 결국 대놓고 반목하지는 못하는 이유였다.

커티스는 에크하르트가 두려웠다.

“아버지!”

제럴드가 놀라 소리쳤다.

단언컨대 그로서는 처음 보는 커티스의 모습이었을 것이다.

젊은 날에는 힐켄테데의 가신으로, 나이가 지긋해져서는 원로가 되어 북부에서 대접받아 온 커티스였다.

그런 그가 무릎 꿇을 일이 무엇이 있었겠는가.

“제럴드, 당장 꿇지 못해!”

그러나 제럴드 또한 여유로울 수는 없었다.

에크하르트가 가만히 입을 다물고 있자, 커티스가 제럴드를 확 끌어당겨 주저앉게 만들었다.

에크하르트는 힐켄테데 대공이다

그리고 대공의 권한은 북부에서 절대적이다.

3년 전 힐켄테데의 사변 이후 가문을 재건하느라 바쁘지만 않았더라면, 그에게 반기를 들던 장로들 따위 진즉에 내쫓겼을 것이다.

그런데 심지어 그런 에크하르트가 오벨리아와의 약혼으로 정통성마저 확보했다.

완전무결해진 그가 제럴드 하나를 북부에서 내쫓는 건 일도 아니었다.

그것도 이처럼 제럴드의 잘못이 명백하게 있는 상황에서는 더더욱 그랬다.

그 사실을 보여 주듯이, 에크하르트는 제럴드가 형편없이 바닥에 꿇어앉은 것을 보고서야 입을 열었다.

“로웰스턴 장로, 그대를 봐서 제럴드 로웰스턴을 북부에서 추방하지는 않겠다.”

제럴드의 고개가 홱 들렸다.

추방이라니!

그의 얼굴에 경악이 어렸다가 곧 분노로 바뀌었다.

그리고 자신을 바라보는 오벨리아와 눈이 마주친 순간, 제럴드의 얼굴이 수치심으로 달아올랐다.

그는 참을 수 없었다.

제럴드는 오벨리아를 낮잡아 보아 왔다.

그런 상대 앞에서 무릎까지 꿇린 상황이 자존심을 엉망진창으로 구겨놓았다.

“가짜 주제에…!”

제럴드가 화를 참지 못하고 소리쳤다.

에크하르트는 힐켄테데의 피가 한 점도 섞이지 않은 가짜였다!

그에 반해 그는 오랜 전통을 이어 온 북부의 대가문을 이을 장자가 아니던가.

그런데 겨우 가짜 따위에게 이런 수모를 당하다니!

그토록 억울하지 않을 수 없었다.

“제럴드!”

그러나 커티스가 아연실색하여 소리침과 동시에 제럴드의 몸도 완전히 얼어 버렸다.

언제 꺼냈는지 보지도 못한 에크하르트의 검이 제럴드의 목에 드리워져 있었기 때문이다.

“내가 진짜인지, 가짜인지는 네 목을 베어보면 알 일 아닌가?”

황족 모독죄를 지으면 즉결처분이 가능하듯이, 북부에서는 힐켄테데 대공에게 북부의 귀족들을 처분할 수 있는 권한이 있었다.

그러므로 에크하르트가 이 상황에서 제럴드를 죽인다고 한들 아무런 문제도 되지 않는다.

그건 아무리 핏줄 따위로 에크하르트를 깎아내려도, 오직 그만이 진짜 힐켄테데 대공임을 명확히 입증하는 증거였다.

제럴드는 고개를 조아리거나 사죄의 말도 할 수 없었다.

조금만 움직였다가는 에크하르트의 검에 목이 베일 것이 자명했기 때문이다.

“황실 기사도 별거 아니군.”

에크하르트가 그렇게 말하며 비웃음을 띄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번에는 제럴드도 분노하지 못했다.

에크하르트가 검을 뽑는 게 눈에 보이지도 않았다.

제럴드를 베는 것도 순식간일 게 뻔했다.

아무리 뻗대봤자, 제럴드는 두려움 앞에 무릎 꿇는 평범한 인간이었다.

“벨 가치도 없어.”

제럴드의 몸이 덜덜 떨리자, 마침내 에크하르트가 검을 거둬냈다.

더없이 하찮은 것을 대하듯 에크하르트가 제럴드를 툭 발로 치자, 제럴드의 몸이 그대로 허물어졌다.

정말이지 우스운 꼴이 아닐 수 없었다.

“지금부터 제럴드 로웰스턴은 내 허락이 있을 때까지 로웰스턴 저택을 한 발짝도 나설 수 없다. 의의는 없겠지?”

에크하르트가 검을 칼집에 넣지 않은 채로 말했다.

그것은 명령이었다.

그렇게 되면 제럴드의 황실 기사직은 자진해서 반납하라는 것과 다를 바 없었다.

그러나 누구도 그 말에 이견을 표하지 못했다.

***

에크하르트의 행동은 독단적이었다.

오벨리아와 그가 세운 계획을 완전히 어그러트려 놓은 셈이었다.

심지어 그녀에게 단둘이 남아 제럴드를 붙잡아 놓으라고 한 것은 에크하르트가 아니던가.

그런데 그가 인제 와서 말을 바꾼 셈이었다.

“미안해.”

그렇지만 두 사람이 마차에 오르고 마차의 문이 닫히자마자, 오벨리아가 한 말은 사과였다.

그건 에크하르트가 예상해 본 적이 전혀 없던 전개였다.

“…뭐?”

그래서 에크하르트는 조금 멍청해 보이리만큼, 멍하니 반문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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