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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한부 폐태자비는 살아있다-15화 (15/136)

15화. 어떤 관계의 시작(5)

‘가짜 주제에…!’

제럴드의 그 말을 듣는 순간, 오벨리아는 에크하르트의 정통성을 가지고 거래했던 자신의 잘못을 깨달았다.

너무 무심했다.

전 힐켄테데 대공이 사변으로 죽지 않았다면, 그녀는 살아서 에크하르트의 뒷배가 되어 주었을 것이다.

그렇게 해서 시간의 흐름에 따라 자연스레 승계 작업을 모두 마쳤다면, 에크하르트는 안정적으로 자리를 잡은 채 대공 자리에 오를 수 있었을 터다.

그러면 원로들은 그에게 감히 반기를 들 생각조차 하지 못했으리라.

그러니까 에크하르트가 아직까지도 제럴드 따위에게 가짜라는 말을 듣는 것은 힐켄테데 사변의 탓이 크다는 말이었다.

“당신의 혈통 문제를 그렇게 쉽게 입에 담아서는 안 되는 거였는데.”

그래서 계획이 틀어진 것과는 별개로 오벨리아는 에크하르트에게 사과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고 단언컨대 그는 그녀가 이런 식으로 사과할 줄은 몰랐다.

그리하여 에크하르트는 할 말을 찾지 못하고 완전히 벙 져 버렸다.

당연했다.

누구도 이런 일로 그에게 사과한 적이 없었으니까.

힐켄테데의 사변에서 살아남은 에크하르트는 그 시절 아직 소년이었다.

후계로서 수업을 받기는 했으나, 본격적인 승계 작업은 보통 그 후계가 성인이 되고 나서야 시작된다.

제국의 관습상 성인이 되기 전의 아이들은 아직 배울 나이라고 여겨지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갑작스럽게 전 힐켄테데 대공이 죽었을 때, 힐켄테데는 그야말로 주인 없는 커다란 빵 덩어리가 된 셈이었다.

모두가 그것을 뜯어 먹고 싶어 했고, 소년은 다 가리지도 못할 커다란 빵 덩이를 지켜야만 했다.

그러니 피라냐 같은 자들이 소년의 가장 큰 약점이라고 할 수 있을 만한 것을 마구 물어뜯는 건 당연한 수순이었다.

가짜.

그 말은 피라냐들의 가장 날카로운 이빨이었다.

에크하르트에게는 여전히 그 이빨 자국들이 남아 있었다.

그가 아무리 냉정하고 오만하게 굴어도 쓰라린 것은 어쩔 수 없는 것처럼.

“그리고 또, 제럴드 같은 자와 마주하게 해서 미안해.”

오벨리아가 에크하르트와 가까워질 마음이 없는 것은 여전했다.

그러나 그녀에게 사죄란 용서를 받으려고 하는 행동이 아니었다.

오벨리아는 진심으로 자신이 말한 것들이 제 잘못이라고 생각했다.

에크하르트의 아린 곳을 찌르고, 그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제럴드를 곁에 둔 것은 그녀니까.

오벨리아는 그런 사람이었다.

단 한 번도 자신의 책임이라고 여긴 것을 피한 적이 없는 사람.

그래서 에크하르트는 할 말을 잃었다.

따지자면 제럴드와 단둘이 있게 만든 것은 그가 아니던가.

“…오벨리아, 넌.”

아무렇지 않은 건가?

에크하르트가 마른세수하며 묻고 싶은 말을 삼켰다.

방금 제럴드와 있었던 일이 괜찮을 리가 없었다.

그러나 오벨리아를 달래는 건 그의 몫이 아니었다.

그들은 그런 사이니까.

“아니, 됐다. 앞으로 이런 일은 없을 거야. 제럴드와도 더는 어울리지 마.”

“그렇지만….”

“네가 아니어도, 커티스는 너와 내 약혼이 깨지길 바라지 않을 거다. 내가 그렇게 만들 거니까.”

에크하르트가 단호하게 대답했다.

그리고 오벨리아가 또 다른 반박을 하기 전에, 그가 말을 덧붙였다.

“나는 더 이상 비겁자가 되고 싶지 않다. 사람을 그런 식으로 이용해서 이득을 얻는 건 내 방식이 아니야.”

그제야 에크하르트는 조금쯤 후련한 모양이었다.

오벨리아는 그런 그를 보며 묘한 기분에 사로잡혔다.

제럴드와 있었던 일은 당연히 그녀로서도 유쾌하지 않았다.

에크하르트가 막아서지 않았어도 제럴드가 요구했던 일은 일어나지 않았겠지만, 자신을 원수로 여겨도 부족하지 않은 남자에게 보호를 받는 것은 기묘한 느낌이었다.

객관적으로 말하자면 오벨리아는 에크하르트가 진짜로 오늘 겪을 뻔했던 일을 요구했어도 놀라지 않았을 것이다.

그만큼 그에게는 그녀를 미워할 자격이 있었다.

그리고 꼭 그 자격이 아니더라도, 정치에서 그런 수단은 꽤 빈번한 일이었다.

알렉산드로는 오벨리아가 유산했을 때마다 그것을 정치적으로 이용했다.

겪은 일이 마음은 아팠으나, 그녀도 반대하지 않았다.

황족을 해친 것은 같은 황족이라고 할지라도 중죄다.

정적을 처리하기에 그만큼 좋은 핑계가 없었다.

자기 자신과 그 자식의 안위조차 수단으로 써야 하는 것.

그런 게 황위 전쟁이었다.

‘그러고 보니까… 두 번째로 유산했을 때, 알렉산드로가 어땠더라?’

오벨리아가 문득 멈칫했다.

오벨리아가 첫 번째로 유산했을 때는 알렉산드로와 그녀 모두 정신이 없었다.

결혼한 지 5년 만에 가진 아이였으니 회임 사실을 알고 둘 다 들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아이를 잃었으니, 한동안은 오벨리아와 알렉산드로 둘 다 아무것도 하지 못핲 지경이었다.

한 달을 넘게 그렇게 끔찍한 시간을 보낸 뒤에야, 두 사람은 알렉산드로를 노렸던 2황자의 계략이 오벨리아에게 미친 것임을 알아차렸다.

그 당시 얼마나 분노했던가.

오죽하면 사실을 알게 된 알렉산드로가 검을 들고 2황자를 죽이려던 것을 다 같이 매달려 뜯어말릴 정도였다.

그렇지만 오벨리아가 두 번째로 유산했을 때, 알렉산드로는 기다렸다는 듯이 3황녀를 공격했다.

그 당시에는 그녀가 알렉산드로를 지극히 사랑하고 믿었기에 눈치채지 못했으나, 생각해 보면 이상한 일이었다.

지금에서야 그 사실을 인지한 오벨리아의 안색이 새하얗게 질렸다.

순간 그녀의 안에서 문득 분노가 치솟았다.

알렉산드로에 대한 분노는 이렇듯 불쑥불쑥 오벨리아를 지배하려 들었다.

“오벨리아?”

갑자기 조용해진 오벨리아가 이상하여 에크하르트가 말을 걸지 않았더라면, 그 자리에서 속된 말을 짓씹었을지도 몰랐다.

허공을 보고 있던 그녀의 시선이 그를 향했다.

그런 삶을 살았던 오벨리아에게 에크하르트란 존재는 특이할 수밖에 없었다.

“…알았어, 당신 뜻대로 해.”

그래서 오벨리아는 에크하르트의 뜻에 수긍하고 말았다.

그의 뜻이 저렇게 굳건하다면 막을 수 없음을 알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에크하르트와 같은 사람들을 잘 알고 있었다.

오벨리아의 눈길이 가는 사람들은 언제나 그와 비슷한 자들이었기 때문이다.

어떤 상황에서도 자신의 신념만큼은 잃지 않는, 그런 굳건한 자들.

그리하여 오벨리아가 인간적으로 끌리고야 마는-.

거기까지 생각하자마자 그녀의 안색이 어두워졌다.

오늘따라 감정이 널을 뛰었다.

제럴드에게서 자신을 보호하던 에크하르트가 오벨리아의 마음을 헤집어놓은 자리를 돌연 끼어든 알렉산드로를 향한 의심이 뒤집어놓았다.

그 자리를 다시 에크하르트가 비집고 들어왔다.

오벨리아의 삶이 송두리째 바뀐 순간부터, 그녀는 작은 변화 하나하나에 지나치게 예민한 사람이 되어 버렸다.

오벨리아는 자신이 모든 것을 잃기 전과 너무나 달라졌다는 것을 다시 한번 지독하게 인식해 버렸다.

어떤 상황에서도 냉철함을 관철할 수 있던 자신은 더 이상 없었다.

애지중지하는 막내딸을 언제나 지지해 주던 가문, 자신을 아주 많이 사랑해 주는 남편, 만백성이 우러러보는 황태자비로서의 본인.

그 모든 것은 오벨리아가 어떠한 상황에서도 스스로를 유지할 수 있게 해 주는 원동력이었다.

그것들을 모조리 잃어버린 지금, 그녀의 감정은 시시때때로 스스로조차 통제할 수 없을 지경에 이르렀다.

“다만.”

그래서 오벨리아는 말을 덧붙였다.

본능적인 방어기제였다.

“앞으로는 그렇게 도와주지 않아도 돼.”

어떻게 해야 조금이라도 당신이 내게서 멀어질까 하는 그런 절박한 고민이 담긴.

에크하르트가 자신과 그다지 가까워질 생각이 없고, 최소한의 도리를 한 것뿐이라고 해도 마찬가지였다.

오벨리아는 사소하고 당연한 호의나 도리라고 하여 그냥 넘길 수 있을 만큼의 여유조차 없었다.

“설령 내가 죽게 생겼더라고 해도 마찬가지야. 내 일은 내가 알아서 할게.”

극단적인 오벨리아의 말에 에크하르트의 표정이 굳었다.

그는 순간 자신이 대단한 무언가를 했던가 헷갈렸다.

딱히 그녀와 무언가를 할 생각도 없었지만, 별다른 행동도 하지 않았는데 밀려난 기분이 퍽 더러웠다.

심지어- 쓸데없는 사과로 갑작스럽게 에크하르트를 뒤흔들어놓은 것은 오벨리아가 아니던가.

“누가 보면 오늘 내가 너와 뭐라도 한 줄 알겠군.”

그래서인지 에크하르트의 목소리가 빈정거리듯 흘러나왔다.

오벨리아가 계획이 어그러진 것에 대하여 불만을 토로할 줄은 예상했으나, 이런 식으로 말을 들을 줄은 전혀 몰랐다.

그는 순간적으로 동요했던 스스로가 멍청하게 여겨졌다.

“착각하나 본데, 오벨리아. 나는 네가 죽든 말든 상관없어.”

에크하르트는 자신이 오벨리아에게 독약 병을 건넸던 일을 단 한 번도 신경 쓴 적이 없는 양 고개를 빳빳이 들었다.

“네가 굳이 그렇게 혼자 과장해서 말하지 않아도 필요하다면 기꺼이 널 버릴 거다.”

오벨리아는 에크하르트의 원수와 다를 바가 없다.

그러니까 그가 그렇게 행동하지 못할 이유가 없었다.

“오늘 제럴드 로웰스턴을 네게서 떼어 놓은 건….”

에크하르트는 순간 고심했다.

그는 오벨리아와의 사이에 명확한 선을 긋고 싶었다.

그녀의 말에 동요한 적 없는 것처럼.

오벨리아가 자신을 밀어내든 말든 전혀 상관없는 것처럼.

“네 쓸모를 거기에 소모할 생각이 없었을 뿐이다.”

말을 내뱉자마자 에크하르트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그는 오벨리아가 표정을 보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 고개를 홱 돌려 버렸다.

소모라니.

사람을 두고 도구 다루듯 하는 말이 순간 제럴드가 오벨리아를 두고 물건 다루듯 했던 것과 별반 다를 바 없어 보였다.

스스로 내뱉은 말이 에크하르트의 속을 긁어댔다.

그는 본디 이런 말을 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런데 오벨리아만 마주하고 있자면 하지도 않던 말을 내뱉게 됐다.

에크하르트가 짜증스럽게 제 머리칼을 흐트러트렸다.

그가 홱 오벨리아를 쳐다보며 굳이 말을 덧붙였다.

“난 네가 끔찍하게 싫어, 오벨리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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