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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한부 폐태자비는 살아있다-16화 (16/136)

16화. 어떤 관계의 시작(6)

에크하르트에게서 폭언들이 쏟아질 때마다 오벨리아는 안도했다.

그가 자신을 미워하는 한, 그와 그녀는 어떤 관계로 묶일 일 따위 없었다.

아무 사이도 아닌 관계.

오벨리아는 그런 것을 원했다.

그래야만 기대도 실망도, 믿음도 배신도 없을 테니까.

“알아.”

그래서 자신이 싫다는 에크하르트의 말에도 오벨리아는 아무렇지 않았다.

그녀는 그에게 미움 받아 마땅한 사람이었으니까.

정말로 아무렇지 않았다.

그냥 문득 조금 더 외로워졌을 뿐이다.

그녀가 죽길 바라고, 그녀를 싫어하는 사람들만이 남은 세상이라서.

오벨리아를 사랑해 주던 사람들은 모두 돌아올 수 없는 길을 떠나 버린 세상이라서.

그래서 외로웠다.

안도와 고독 속에서 오벨리아는 창밖을 바라봤다.

오벨리아의 싱거운 대답 탓인지, 에크하르트 또한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힐켄테데 성에 도착할 때까지 두 사람 사이에는 그런 침묵만이 맴돌았다.

***

제럴드가 그렇게 구금당한 며칠 뒤, 커티스가 비밀스럽게 오벨리아를 찾아왔다.

그는 얼마나 다급했던지, 제 아들을 구명해 달라는 말도 없이 본론을 꺼내 들었다.

“오벨리아 님, 에크하르트 님께서 레베카 에필로나를 힐켄테데 성으로 불러들이셨다는 걸 알고 계셨습니까?”

레베카 에필로나.

그 이름을 듣는 순간 오벨리아는 이게 에크하르트가 말하던 수라는 것을 알아차렸다.

“레베카 에필로나라면…?”

오벨리아가 모른 척 커티스에게 물었다.

그러나 실은 그녀도 알고 있는 이름이었다.

“에필로나 가는 암암리에 에크하르트 님을 지지해 온 원로 가문입니다. 그 이유는 레베카 에필로나가 에크하르트 님을 흠모해 왔기 때문이고요.”

커티스는 초조해 보였다.

사실 오벨리아가 아니었더라면 대공비의 자리를 차지할 가장 유력한 이는 레베카였을 것이다.

“이 이상 에크하르트 님에게 힘이 실려서는 곤란합니다.”

그리고 그게 커티스가 이토록 레베카를 경계하는 이유였다.

에필로나는 현재 대놓고 나서지 않았을 뿐, 대공비의 가문으로 손색이 없을 만큼 영향력을 가진 가문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보고 어쩌란 거죠?”

그렇지만 오벨리아는 이번에도 그 모든 사실을 모른 척했다.

그녀는 도리어 신경질적인 어조로 커티스에게 쏘아붙였다.

“제럴드가 섣불리 행동한 탓에 그 날 일로 나까지 에크하르트의 눈치를 보고 있다고요.”

에크하르트는 그날 분명히 제럴드만을 탓했으나, 남들이 보기에는 오벨리아와 제럴드가 밀회를 즐겼다고 오해할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그녀는 그것을 노리고 자신이 에크하르트에게 책잡힌 것처럼 말을 내뱉었다.

“그래서 드리는 말씀입니다. 레베카 에필로나가 에크하르트 님을 포기하게 만들어 주십시오. 그때까지는 무슨 수를 쓰셔서라도 이 약혼을 유지하셔야만 합니다.”

어떻게든 제 아들을 오벨리아에게 붙여 주려던 커티스의 말이 뒤바뀌었다.

“오벨리아 님께서는 아무것도 모른 척하시고, 모든 것을 제 아들이 혼자 오벨리아 님을 마음에 두어 벌인 일로 하세요.”

본인의 아들을 두고 말하기에는 커티스의 발언이 퍽 냉정했다.

그러나 에크하르트에 의해 제럴드가 구금당한 이상, 제럴드는 버리는 패였다.

커티스의 판단은 가히 상당수의 원로를 이끄는 그 수장다웠다.

“그럼 제럴드는요? 그를 그냥 그렇게 둘 건가요?”

오히려 미련을 보인 것은 오벨리아였다.

그간 제럴드와 사이가 좋아 보이게 행동했으니 일부러 그런 것이었다.

“제럴드를 위해서라도 오벨리아 님이 빨리 힘을 키우셔야 합니다. 그래야만 제 아들을 자택 구금 상태에서 풀어 주실 테니까요.”

커티스가 오벨리아를 달래듯이 말했다.

그녀는 못마땅한 듯, 불만스러운 듯 느릿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어요.”

오벨리아가 대충 넘어온 것 같자, 커티스가 조금 더 목소리를 낮추어 다음 말을 꺼냈다.

“그래서 말씀입니다만… 오벨리아 님께서 도와주셔야 할 일이 있습니다.”

***

그날 밤, 오벨리아는 커티스가 했던 말을 에크하르트에게 전했다.

두 사람은 로웰스턴 저택에서 성으로 돌아오던 날 마차에서 나누었던 대화가 마치 없었던 것처럼 행동했다.

“커티스가 내게 전 가주의 일기장을 찾아다 달라고 했어.”

힐켄테데에서 대대로 내려오는 가주의 방에는 가주와 그 반려만이 들어갈 수 있다.

오벨리아가 아직 에크하르트와 혼인을 한 것은 아니었으나, 현재 힐켄테데에는 안주인이 없었다.

게다가 그녀는 힐켄테데의 핏줄로 인정받았기에 이번만큼은 예외로 인정되어 가주의 반려로서 그 자격을 인정받게 되었다.

그리하여 오벨리아에게는 가주의 방에 들어갈 수 있는 자격이 생겼다.

커티스는 그걸 이용하고자 한 것이다.

“지금까지 나한테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았는데, 태도를 바꾼 걸 보면 당신이 제럴드를 자택에 구금시킨 게 커티스를 자극한 모양이야.”

커티스가 제 아들에게조차 냉정하게 굴었다고 해서, 아들이 갇혔는데 분노하지 않을 리가 없었다.

게다가 기껏 아들을 힐켄테데의 옆자리에 앉힐 생각에 들떠 있었는데 계획이 어그러졌으니 초조해질 만도 했다.

오벨리아는 아마 그런 것들이 커티스의 침착함을 앗아갔으리라 짐작했다.

“…힐켄테데의 세부 자산이나 수익 구조, 협력 가문 명단 등이 아니라?”

에크하르트에게서 의아함을 가득 담은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아무리 가문의 원로라고 할지라도 힐켄테데의 모든 것을 알 수는 없었다.

왜냐하면 힐켄테데는 가지고 있는 작위만도 대공 위 외에 백작부터 남작까지 아주 다양했기 때문이다.

힐켄테데의 이름뿐 아니라, 그 다양한 작위들로 많은 사업과 거래가 이루어졌다.

그러니 결국 힐켄테데의 모든 것을 알고 있는 사람은 오직 그 주인 되는 자, 가주뿐이었다.

힐켄테데 대공이 오랜 세월 원로와 가신들로부터 절대적인 권력을 누릴 수 있던 이유이기도 했다.

“그래서 말인데 에크하르트, 당신 혹시… 과거에 선황제 폐하를 만난 적 없어?”

“…선황제를?”

오벨리아의 질문은 뜬금없었다.

그러나 거기에서 무언가 깨달았는지, 에크하르트가 물었다.

“혹시 황실에서 내 출신을 황가와 연관 있다고 의심하는 건가?”

“내 생각에는 그래.”

오벨리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그녀가 오래전부터 어렴풋이 추측해 온 일이었다.

“힐켄테데의 사변 때, 선황제 폐하께서는 당신을 구하라고 하셨어. 사변에서 오직 당신만이 살아남았으니 그날의 일을 지시한 자들은 분명 그 점을 의아하게 여겼을 거야.”

에크하르트가 그에 동조하듯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런데도 두 번 일을 시도하지 않았다는 건, 계획을 방해한 이가 자신들이 감당할 수 없는 상대임을 알았기 때문이겠지.”

황족들이 일을 벌이는 데 주저하게 할 자는 황제뿐이었다.

에크하르트가 말을 이었다.

“선황제를 개인적으로 만난 기억은 없지만, 들은 적이 있는 것 같다. 어머니께서 선황제의 오랜 친우셨다고 했어. 그러나 그런 친구라기에는 서로 간 그 어떤 왕래도 없으셨지.”

에크하르트가 뚜렷한 기억을 가지기 시작한 나이부터 전 가주는 단 한 번도 북부를 벗어난 적이 없었다.

오랜 친우 사이라면 서로의 소식이 궁금할 법도 한데, 그의 어머니는 수도에 올라가지 않았고 황제도 그녀를 부르지 않았다.

누가 봐도 이상한 일이었다.

마치, 황제와 힐켄테데 전 가주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던 것처럼.

그리고 하필, 에크하르트의 머리칼은 황가의 것과 같은 흑발이었다.

“선황제가 자신의 사생아인 나를 힐켄테데에 숨겨 두었다고 생각한 거군.”

에크하르트가 진실에 가까울 추측을 꺼냈다.

에크하르트를 선황제의 사생이라고 생각했다면 황족들이 경쟁자를 하나라도 제거하기 위하여 그를 죽이려 했을 가능성은 얼마든지 있었다.

심지어 선황제가 그것을 직접 막기까지 했으니, 황족들의 의심에는 더욱 불을 붙인 셈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모든 황족을 물리치고 황제가 된 지금, 알렉산드로에게 가장 눈에 거슬릴 존재는 단연코 어쩌면 황가의 핏줄일지도 모를 에크하르트였다.

심지어 에크하르트는 힐켄테데라는 커다란 권력을 손에 쥐고 있었다.

그러니 그를 선황제의 사생아라고 여기고 있는 알렉산드로의 입장에서는 당연히 거슬릴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생각하면 황실에서 커티스에게 힐켄테데 전 가주의 일기장을 요구하는 것도 납득이 되는 일이었다.

왜냐하면, 에크하르트가 황제의 사생아라는 확신이 필요할 터이기 때문이다.

“힐켄테데의 핏줄은 반드시 은발과 적안을 지니고 태어나지. 그러니까 에크하르트, 당신은 절대 힐켄테데의 사람이라고 할 수 없어. 그런데도 전 가주께서 당신을 데려왔으니, 의심을 할 만도 하지.”

힐켄테데의 전 가주가 가문을 이어받지 않으려고 했던 것은 유명한 일화였다.

그런 그녀가 갑자기 대공 자리를 이어받은 후, 생판 남일 에크하르트를 입적시켰다.

황제의 사생아를 지키기 위해 힐켄테데 대공의 자리가 필요했다고 한다면 어느 정도 말이 들어맞았다.

“…아무래도 어머니의 일기장을 봐야겠다.”

에크하르트가 잠시간의 고뇌 후 대답했다.

그는 지금껏 단 한 번도 자신의 출신을 궁금해한 적이 없었다.

‘누가 뭐래도 너는 내 아들이란다, 카른.’

힐켄테데의 전 대공이자, 에크하르트의 양어머니는 언제나 그를 진짜로 제 아들이라 여겨주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번만큼은 에크하르트도 자신의 출신을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심지어 어쩌면 일의 실마리가 거기 있을지도 몰랐으므로 더더욱.

“알겠어, 커티스 쪽을 어떻게 할지는 그 후에 정하자.”

오벨리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의 시선이 힐끗, 에크하르트의 얼굴을 향했다.

그의 표정이 평소와 달리 매우 복잡해 보이는 것이 신경 쓰였다.

아무래도 지금껏 잊고 살던 본인의 출신을 갑작스레 알아야 하는 시점이 되었으니 심란할 만도 했다.

오벨리아는 무엇이라도 말하고자 입을 벙긋거리다가, 두 입술을 꽉 다물었다.

‘…괜한 참견하지 말자.’

오벨리아는 에크하르트와 복수를 위한 거래, 그 이상으로 더는 얽히고 싶지 않았다.

그러기 위해서는 신경이 쓰인다고 할지라도 외면하는 게 맞았다.

“어찌 되었든 어머니는 나 때문에 돌아가신 거군. 그날, 죽은 사람들 역시….”

그러나 에크하르트의 중얼거림을 듣는 순간, 오벨리아는 자신도 모르게 그의 팔을 붙잡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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