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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한부 폐태자비는 살아있다-17화 (17/136)

17화. 어떤 관계의 시작(7)

얼마 전 마차 안에서 굳이 에크하르트를 밀어내놓고는, 퍽 이중적인 태도였다.

오벨리아도 그 사실을 알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어쩔 수 없었다.

에크하르트가 고심하고 있던 것이 그의 출신 따위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설령 당신이 선황제 폐하의 아들이었다고 할지라도, 힐켄테데의 사변이 왜 당신 탓이야.”

제 신분이 선황제의 아들이든 아니든 그런 건 그에게 중요하지 않았다.

그저, 힐켄테데의 사변이 에크하르트를 노린 것이었고, 애먼 사람들이 죽어 나갔다는 것만이 그의 마음을 뒤흔들었을 뿐이었다.

그런 에크하르트는 올곧은 사람이었다.

오벨리아는 에크하르트의 올곧음조차 밀어내면서도, 그런 그가 지켜지길 바랐다.

왜냐하면 그녀는 한때 사랑과 신의를 믿었고, 가진 만큼 베풀어야 한다고 여겼으며, 남에게 부끄럽지 않은 생을 살아가고자 했던 사람이었으니까.

비록 배신당했을지라도.

그리하여 오벨리아는 에크하르트를 멀리해야 한다는 스스로의 다짐을 배반했다.

“힐켄테데의 사변에서 죽은 사람들 모두 황가의 권력 놀음에 희생당했을 뿐이야.”

오벨리아는 황실의 암투와 음모 속에 살며 그에 맞서면서도, 사랑과 신의를 믿었다.

자신이 바라는 스스로의 모습을 잃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만약 오벨리아의 삶이 어느 날 나락으로 떨어지지만 않았더라면, 그녀는 쭉 제가 동경하는 삶을 살아가고 있었을 것이다.

그래서 에크하르트가 자신의 잘못도 아닌 일로 저러고 있는 게, 그녀는 신경이 쓰이지 않을 수 없었다.

때로는 본인이 제대로 된 길을 가고자 해도 타의에 의해 삶이 송두리째 바뀔 수도 있다는 것을 이제는 오벨리아도 알기 때문이다.

“그때 어머니와 아끼던 이들을 잃어야 했던 에크하르트, 당신 역시도 마찬가지야.”

에크하르트가 물끄러미 오벨리아를 바라봤다.

그로서는 당연하게도, 언제나 저와 거리를 두고자 했던 그녀가 이런 말을 해줄 줄은 몰랐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게 우습게도… 어쩌면 힐켄테데가 무너지고 가문을 다시 일으키는 3년 동안, 에크하르트가 처음으로 받은 위로였다.

“…그러니까 당신도 그냥 피해자라고.”

에크하르트가 자신을 빤히 바라보자, 그 두 눈이 부담스러웠던 오벨리아가 괜스레 말을 덧붙였다.

그는 그런 그녀를 알아차린 듯 그제야 시선을 거두어 주었다.

두 사람이 사이에 어색한 기운이 흘렀다.

오벨리아는 계산 없이 내뱉은 스스로의 말이 당황스러웠고, 에크하르트는 그런 그녀에게 무슨 말을 해 주어야 할지 몰랐다.

“…그럼, 나는 우선 가서 어머니의 일기장을 찾아 보겠다.”

결국 에크하르트가 자리를 비켜주었다.

오벨리아는 그가 자리를 뜨고 난 후에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내가 왜 그랬담.”

오벨리아가 스스로를 자책했다.

그러나 제 말을 듣기 전보다 나아진 그의 표정을 떠올리니, 후회는 들지 않았다.

그래서는 안 됐다고 여기면서도… 그녀는 에크하르트에게 그렇게 말해 주기를 잘했다고 어렴풋이 생각하고 말았다.

***

며칠 후, 레베카가 오벨리아를 찾아왔다.

“레베카 에필로나라고 합니다.”

힐켄테데 성에 도착한 뒤로 며칠간 오벨리아의 앞에는 코빼기도 보이지 않더니, 불쑥 찾아온 것이었다.

오벨리아의 시녀는 레베카의 무례를 꼬집어 들이지 않고자 했으나, 오벨리아는 레베카를 제 방 안으로 들여놓았다.

레베카가 어떤 사람인지 직접 보고 판단해야, 그녀를 앞으로 어떻게 대할지 또한 알 수 있기 때문이었다.

“내 방문자 목록에 에필로나 영애는 없었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오벨리아는 자리에서 일어나지도 않고 레베카를 올려다봤다.

레베카가 먼저 무례하게 굴었으니 굳이 먼저 예의를 차리지 않겠다는 의미였다.

“에크하르트 님께 이야기는 들었어요. 두 분의 ‘가짜’ 약혼을 유지하기 위해서 제가 필요하시다고요.”

그러나 레베카는 개의치 않고 다짜고짜 말을 꺼냈다.

그녀는 노골적으로 오벨리아와 에크하르트의 약혼이 가짜임을 강조했다.

오벨리아에 대한 적의를 최소한으로 숨길 마음조차 없는 모양이었다.

레베카는 마치 무언가 알고 있는 것처럼 당당해 보였다.

오벨리아가 눈매를 가늘게 뜨며 레베카를 바라봤다.

참, 당돌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에크하르트가 그렇게 이야기하던가요? 이 약혼이 가짜라고?”

오벨리아는 에크하르트가 그렇게 경솔하리라 생각하지 않았다.

오벨리아에 대한 적의조차 숨기지 못하는 레베카였다.

레베카가 조금만 약았더라면, 지금 당장 오벨리아에게 적의를 드러내 좋을 편이 없다는 판단을 내렸을 것이다.

그러나 레베카는 굳이 자신의 감정을 드러냈다.

그런 그녀가 오벨리아와 에크하르트의 약혼이 가짜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 외부에 완벽히 숨길 수 있으리라는 보장이 어디 있겠는가.

“…그럼요, 그러니까 에크하르트 님께서 제게 도움을 요청하신 거죠.”

레베카가 턱을 치켜들며 말했다.

그러나 오벨리아는 레베카가 잠시 망설였던 그 간극을 놓치지 않았다.

“그럼 지금 당장 에크하르트에게 가서 확인해 보죠.”

오벨리아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에크하르트가 레베카에게 도움을 요청한 것은 맞을 터다.

이 부분은 그가 알아서 하겠다고 해서 대화 내용을 정확히 알 수는 없으나, 레베카의 말이 진실 섞인 거짓이라는 것쯤은 오벨리아도 알 수 있었다.

“…그게!”

역시나, 오벨리아가 즉시 행동을 취하자 레베카는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레베카가 오벨리아를 따라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 모습이 제법 다급했다.

오벨리아의 시선이 지긋이 레베카를 향하자, 입술을 질끈 깨문 채 드레스 자락을 틀어쥐며 분한 얼굴을 하던 레베카가 그제야 사실을 시인했다.

“…에크하르트 님은 그런 말씀 한 적 없으세요. 다른 원로님들께 오벨리아 님과의 약혼이 견제를 받지 않으려면 제 도움이 필요하다고 하셨을 뿐이죠.”

“알고 있어요.”

오벨리아가 여유로운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며 자리에 앉았다.

“자, 그럼 이렇게 불쑥 나를 찾아온 이유를 들어 봐야겠는데.”

오벨리아가 오만하게 턱을 까닥였다.

레베카에게 앉으라는 의미였으나, 그 태도가 가히 곱지 않았다.

“제가 오벨리아 님의 약혼을 축하드리고 싶어서 급하게 찾아오느라 작은 실수를 했네요. 그래도 축하드리고 싶은 마음만은 진심이랍니다.”

레베카가 자리에 앉으며 테이블 위에 하녀를 시키지 않고 직접 들고 온 선물을 올려놓았다.

불쑥 찾아와 놓고 하기에는 참으로 노력 하나 없는 변명이었다.

사과의 말 한마디 없었으면서 제 나름의 성의 표시를 보였으니 더는 쪼잔하게 굴지 말라는 뜻이기도 했다.

“그래요. 선물, 풀어 봐도 되겠지?”

오벨리아가 개의치 않는 듯한 태도로 제 앞에 놓인 선물을 집어 들었다.

“…네, 그럼요.”

순순한 오벨리아의 대답에 레베카가 떨떠름한 얼굴이 되어 고개를 끄덕였다.

선물의 포장을 풀자, 금으로 섬세하게 무늬가 세공된 다기 세트가 드러났다.

두 사람분의 것으로, 약혼 선물로 꽤 적절한 물건이었다.

쨍그랑!

“지금 뭐 하는 짓이에요…!”

레베카가 얼굴을 찌푸리며 소리쳤다.

오벨리아의 손에 들려 있던 찻잔 하나가 누가 봐도 고의적인 행동에 의해 바닥으로 곤두박질쳐 산산이 조각났기 때문이다.

“이런- 내가 작은 실수를 했네. 그래도 선물은 정말 마음에 들었어, 에필로나 영애.”

오벨리아가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

그러나 그 말속에는 고맙다는 말 한마디 들어 있지 않았다.

심지어 어느덧 말투조차 명백히 아래 사람을 대하는 어조로 바뀌어 있었다.

불쑥 찾아온 것과 최소한의 사과도 하지 않은 것.

오벨리아는 두 번이나 반복된 무례를 더는 참아 줄 생각이 전혀 없었다.

레베카의 행동들에 대한 대가를 고스란히 돌려준 셈이었다.

오벨리아가 이런 식으로 바로 되갚을 줄은 몰랐던지, 레베카는 그대로 굳어 있었다.

그동안 오벨리아는 시녀를 불러들여 느긋하게 명령했다.

“찻잔이 깨졌어. 가져다 버리도록 해.”

산산이 부서진 찻잔은 그저 쓰레기일 뿐이었다.

귀족가에서 짝이 맞지 않는 다기를 사용할 리도 없었으니, 레베카가 선물한 다른 것들 또한 아무리 멀쩡하다고 한들 영원히 구석에나 틀어박혀 있게 될 터였다.

레베카의 눈꼬리가 치켜 올라갔다.

북부의 고위 가문에는 젊은 영애들이 많지 않았다.

그녀는 그중에서도 원로의 손녀였으니 그 위치는 독보적이라고 할 수 있었다.

그러니까 단언컨대 지금껏 레베카를 이런 취급한 사람이 있을 리 없었다.

오벨리아는 분한 감정으로 가득한 레베카의 얼굴을 신기하게 바라봤다.

나름 오벨리아를 약 올리겠다고 하는 레베카의 행동은 참 어설프기 그지없었다.

제 속내를 완벽히 숨기지도 못하는 순진함은 오벨리아가 살던 세계에서는 아주 오래전 사라진 것이었다.

“일단 왔으니 앉아. 그냥 왔을 리는 없고, 할 말이 있던 거 아닌가?”

그래서일까, 오벨리아는 그런 면모를 가진 레베카가 밉지 않았다.

그녀가 고운 심보를 가지고 오벨리아의 앞에 나타난 게 아닌데도 그러했다.

사실 레베카가 한 행동은 오벨리아의 입장에서 수작이라고 할 것도 못 되었다.

수도의 사교계에서는 대체로 일을 당하는 당사자가 알지 못하도록 조용히 뒷공작이 이루어지기 일쑤다.

레베카처럼 이렇게 대놓고 불만을 드러내는 건 오히려 솔직하다고 할 수 있었다.

레베카의 행동들은 수작이라기에는 어설프고, 악의 어렸다기에는 그 농도가 옅었다.

그러니 오히려 귀여울 지경이랄까.

오벨리아가 레베카를 굳이 내쫓거나, 그녀의 기를 더 죽이지 않고 얌전히 자리를 권한 이유였다.

“지금… 날 놀려요?”

그러나 레베카에게는 그게 그녀를 약이라도 올리는 것처럼 느껴진 모양이었다.

레베카의 몸이 부들부들 떨렸다.

그녀가 호기롭게 쳐들어온 것과 달리 오벨리아의 반응이 돌연 미적지근해지니 자존심이 상한 모양이었다.

“날 우습게 보지 말아요! 당신이 힐켄테데의 핏줄이라는 이유로 대공 전하의 옆자리를 차지했지만, 난 이대로 물러나지 않을 테니까!”

레베카가 패기롭게 소리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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