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화. 시작도 되지 못할 무언가(1)
레베카의 모습은 전형적으로 사랑에 빠진 아가씨였다.
‘그는 네게 좋은 사람이 아니야, 비아.’
‘알렉을 사랑해. 난 그와 결혼하고 말 거야,’
오벨리아는 문득 제가 알렉산드로와 결혼하겠노라 했을 때, 현명한 첫째 오빠 일리어스만은 유독 반대했던 것을 떠올렸다.
어쩌면 그는 알렉산드로가 그녀를 사랑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을지도 몰랐다.
아마, 귀하디귀한 막냇동생에게 그 남자는 너를 사랑하지 않는다는 말을 차마 할 수 없었던 것이리라.
“그래? 에크하르트도 영애와 같은 마음이라던가?”
결국 겨우 이런 한마디에 깨어질 꿈일 뿐임에도 불구하고.
“그건….”
방금까지 호기롭던 레베카의 입술이 굳게 다물렸다.
그녀는 에크하르트를 사랑했고, 그는 레베카를 사랑하지 않는다.
레베카라고 한들 그 사실을 모를 리 없었다.
“어차피 에크하르트나 나 같은 사람들에게 사랑은 사치야. 에필로나 영애가 물러나든 말든 그와 나는 결국 결혼하게 될 거야.”
레베카는 이제 막 성인이 되었다.
아이까지 가졌었던 오벨리아가 보기에는 터무니없이 어린 영애였다.
오벨리아는 이 어린 영애에게 되도록 상처를 주지 않고 싶었다.
그러나 오벨리아는 그럴 방법이 없다는 것을 금방 깨달았다.
달콤한 꿈에서 깨어나는 대가는 아픈 법이었다.
혹은 오벨리아처럼 달콤한 꿈에서 깨어나지 못한 채로, 제게 사랑이 사치임을 모른 채 끝내 여기까지 오든가.
“…당신은 에크하르트 님을 사랑하는 것도 아니잖아요!”
“에크하르트가 날 필요로 하죠. 나와 결혼하면 그의 혈통 문제가 해결되니까요.”
“그렇지만…!”
레베카가 분한 듯 두 손을 꽉 말아 쥐었다.
그러나 별달리 대꾸할 말이 없었다.
결국 레베카는 제대로 자리에 앉지도 않고 등을 홱 돌렸다.
“두고 봐요, 그깟 혈통보다 내가 훨씬 도움이 된다는 걸 증명하고 말 테니까!”
레베카가 호기롭게 소리치며 응접실을 성큼성큼 나갔다.
사실적인 도망이었다.
***
애써 추측한 것들이 무색하게도, 전 힐켄테데 대공의 일기장은 아마 에크하르트를 데려올 시점의 이야기일 것이 분명한 부분들이 찢겨 있었다.
이로써 그의 출신을 추측할 수 있는 유력한 수단이 하나 사라져버린 셈이었다.
비록 에크하르트는 애초에 자신의 어머니는 한 분뿐이라는 말로 그것이 대단치 않은 일인 것처럼 넘겨버렸지만 말이다.
우선은 커티스를 위시한 원로 일파를 처리하는 것이 먼저였으니 어쩔 수 없는 일이긴 했다.
사실상 전 대공의 일기장에 이렇다 할 내용이 없었기도 했고, 죽은 분의 일기를 남의 손에 넘기고 싶지 않다는 에크하르트의 말에 따라 가짜 일기장이 준비되었다.
“…오늘 에필로나 영애가 찾아왔다지.”
그리하여 오벨리아가 가짜 일기장을 살펴보고 있을 때, 에크하르트가 문득 말을 꺼냈다.
그 또한 레베카의 성격을 알고 있을 테니 오벨리아가 불쾌한 일을 겪었을까, 신경 쓰이는 모양이었다.
오벨리아가 에크하르트틀 위로한 이후, 두 사람의 사이는 내내 이 모양이었다.
서로를 서로가 기묘하게 신경 쓰는 그런 사이.
물론 에크하르트의 성격상, 이유가 있었다고 해도 자신이 레베카를 불러들였으니 오벨리아가 겪은 상황을 나 몰라라 하지는 않았겠지만 말이다.
“미래의 대공비가 될지도 모르는 사람이잖아. 어차피 한 번쯤은 마주해야 했겠지.”
에크하르트가 묘하게 자신을 신경 쓴다는 사실도, 그의 성격상 오늘 일을 그냥 넘어갈 수 없었으리라는 점도 알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벨리아는 그 모든 것을 모른 척했다.
그녀가 전혀 신경 쓰지 않는 것처럼 굴어야만 에크하르트가 더는 아무 말도 하지 않으리라는 걸 알았기 때문이다.
“딱히 상관없어. 내가 진짜 당신 약혼녀인 것도 아니고.”
그래서 오벨리아는 한편으로는 냉정해 보일 만큼 더욱 담담히 굴었다.
실제로 어차피 에크하르트와 그녀가 할 결혼은 동맹일 뿐이었다.
심지어 오벨리아는 자신이 근시일 내로 영원히 퇴장하게 될 운명임을 똑똑히 기억했다.
그러니 레베카가 그녀를 불쑥 찾아왔다고 한들, 그게 무어 그리 대단한 의미를 지니겠는가.
“…그래.”
에크하르트가 단답형으로 대답하며 고개를 대충 끄덕였다.
오벨리아가 그렇게 나오니 그도 레베카와 관련된 주제에 대하여 더는 대화할 생각이 없는 모양이었다.
대화의 끝이 매끄럽지 않게 단절되자 두 사람 사이에 잠시 어색한 침묵이 맴돌았다.
그것을 느낀 오벨리아가 일부러 다른 주제를 꺼내 들었다.
“일기장은 준비됐으니까, 이제 커티스가 언제 어디서 황실과 접촉할지 알아야 할 텐데….”
“그건 걱정하지 않아도 돼. 커티스에게 실시간으로 감시를 붙이고 있으니까.”
그림자 기사들 또한 힐켄테데 사변에서 많은 수를 잃었다.
애초에 대인 감시나 침입 등의 임무는 위험도가 높았고, 그런 임무를 맡는 자들은 전쟁 중에도 비밀리에 움직일 수 있는 기사들이었다.
그런 이들이었으니 드러내놓고 키울 수도 없는 건 당연했다.
그렇기에 현재는 사변 전보다 적은 인원만이 에크하르트의 그림자 기사로 움직이고 있었다.
힐켄테데를 재건하는 동안 그림자 기사들이 해야 할 일은 턱없이 많았다.
만약 그 수가 지금처럼 한정적이지만 않았더라면, 에크하르트도 진작에 모든 원로에게 감시를 붙였을 터였다.
그런데 이번에 오벨리아가 다수의 원로 중 황실과 결탁한 특정인을 잡아냄으로써 감시를 붙일 수 있게 된 것이다.
그 사실이 새삼스러웠다.
“…오벨리아.”
에크하르트는 이 일에 오벨리아의 덕이 크다고 생각했다.
네 덕분이라고, 그 말 한마디라도 해야만 했다.
원래의 에크하르트라면 자신의 수하든 생판 남이든 분명 말했을 것이다.
“왜?”
그런데 오벨리아의 두 눈을 마주하는 순간 에크하르트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들은 감사 인사를 주고받을 사이 따위가 아니었으니까.
“아무것도 아니다. 쉬어.”
결국 에크하르트는 오벨리아를 두고 돌아섰다.
어차피 피차 할 말은 다 전한 터였다.
오벨리아는 그런 에크하르트를 모른 척했다.
그가 자신에게 할 말이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으나, 굳이 서로가 속에 담아 둔 말까지 물어볼 관계는 아니므로.
“그래. 커티스에게 연락이 오면 말할게.”
커티스는 제럴드가 자택에 구금당한 이후로 그 또한 자중하겠다며 한동안 힐켄테데 성에 발길을 끊은 터였다.
그러니 그에게 따로 연락이 올 때까지 기다려야만 했다.
에크하르트가 나가고 오벨리아의 방문이 닫혔다.
그래, 두 사람 간의 거리는 딱 그 정도였다.
***
커티스에게서 시녀를 통해 비밀리에 연락이 왔다.
가짜 일기장에는 에크하르트가 선황제의 사생아라는 사실을 추측할 수 있을 만한 내용이 적혔다.
커티스가 황실과 거래할 수 있을 만한 거리를 만들어 주기 위함이었다.
오벨리아는 그것을 들고 가 커티스에게 건넸다.
“자 여기, 원로가 바라던 어머니의 일기장이에요.”
“감사합니다, 오벨리아 님.”
그러나 커티스가 일기장을 받아들려고 하려던 때, 오벨리아가 갑작스럽게 일기장을 들고 있던 손을 거두었다.
“오벨리아 님…?”
“내가 원로한테 협조하겠다고는 했지만… 이 일기장을 그냥 넘겨줄 수는 없죠.”
오벨리아의 말에 커티스의 눈초리가 사나워졌다.
그러나 그녀는 그것을 전혀 모른 척 말을 이었다.
“무려 어머니의 일기장을 넘겨주는 짓인데, 이 일기가 왜 필요한지 정도는 나도 알아야 하지 않겠어요?”
그 말에 커티스가 멈칫했다.
그는 오벨리아에게 일기장을 가져오라고 하면서도 이유를 설명하지 않았다.
그녀를 얼마나 우습게 대하고 있는지 알 만한 부분이었다.
그런데 돌연 이런 질문을 받으리라고는 생각도 못했을 수밖에.
그래서인지 잠시 뜸을 들이던 커티스가 마침내 대답했다.
“좋습니다. 단, 그 일기장이 진짜라는 것을 확인한 뒤에 말해 드리죠.”
그 순간, 오벨리아의 머릿속으로 많은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커티스가 자신을 의심하는 것인가?
그에게 전 힐켄테데 대공의 일기장이 진짜인지 가짜인지 판별할 방법이 있을까?
괜히 그녀를 떠보는 것은 아닐까?
수많은 생각으로 오벨리아의 머릿속이 어지러웠다.
그러나 오랜 시간 황실의 권모술수 속에 단련되어 온 그녀의 입은 생각보다 더 빠른 반응을 보였다.
“그럼 내가 지금 어머니의 일기장으로 장난이라도 치고 있다는 말인가요?”
오벨리아의 미간이 대놓고 불쾌함을 표현하듯 찌푸려졌다.
그녀가 일기장을 품에 숨기며 까칠하게 말했다.
“그렇게 의심되면 말든가. 애써 힘들게 빼 왔더니….”
그 불쾌함을 강조하듯, 오벨리아가 커티스에게 애매하게 써 오던 존댓말도 사라진 채였다.
그러자 커티스가 그녀를 달래듯이 몸을 낮추었다.
“의심이라니요, 당치도 않습니다. 그저 에크하르트 님 쪽에서 어떤 흉계를 꾸몄을지 모르는 일이고, 워낙 중대한 사안이니 조심히 하고자 하는 것 외에 무슨 의도가 더 있겠습니까.”
결국 오벨리아를 완전히 못 믿는다는 건 매한가지인 말이었다.
하긴 커티스도 바보가 아닌 이상 당연한 일이었다.
그와 오벨리아는 서로의 이득을 위해 단기간에 뭉친 사이였다.
그런 관계에 무슨 믿음이 있겠느냔 말이다.
게다가 오벨리아가 자신의 능력을 명확히 증명해 보인 것도 아니었으니, 그녀가 에크하르트에게 속았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할 만도 했다.
“됐어요, 생각이 바뀌었어.”
그렇다고 한들, 오벨리아가 그런 커티스를 이해해 줄 필요는 없었다.
오히려 그녀는 잘됐다고 생각했다.
커티스가 방금, 오벨리아가 그에게서 꼬투리를 잡을 만한 부분을 완벽히 제공해 주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그녀는 대뜸 태도를 바꾸었다.
마치 커티스의 행동이 오벨리아를 자극한 듯, 그녀는 눈꼬리를 일부러 치켜떴다.
“원로도 날 완벽히 못 믿는데, 나라고 한들 어떻게 원로를 무조건 믿겠어요? 그러니까 원본은 못 넘겨주겠어요.”
오벨리아가 고개를 치켜들며 당당하게 선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