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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한부 폐태자비는 살아있다-19화 (19/136)

19화. 시작도 되지 못할 무언가(2)

커티스의 안색이 대번에 나빠진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가 입꼬리를 파르르 떨며 애써 침착한 목소리로 물었다.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그러나 눈빛만은 그 속내를 채 숨기지 못하여 흉흉했다.

물론, 그러거나 말거나 오벨리아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어차피 커티스가 이 자리에서 그녀를 해치고 일기장을 강탈해 갈 가능성은 없었다.

현재, 힐켄테데의 유일한 핏줄인 오벨리아가 돌연 사라진다면 당연히 힐켄테데의 모든 기사가 범인을 색출하려 들 터였다.

아무리 난다 긴다 하는 북부의 원로일지라도 커티스조차 수습할 수 없는 사건이 될 터였다.

“원로가 이 원본을 언제 돌려줄지 내가 어떻게 알겠어요?”

오벨리아의 말에 커티스가 낭패 어린 표정을 지었다.

그녀가 이런 문제를 정확히 지적할 줄 몰랐던 모양새였다.

“원본은 들키기 전에 제 자리에 가져다 둬야죠.”

전 가주의 가짜 일기장은 단기간에 만든 것치고는 매우 정교하게 공을 들였다.

그러니 커티스라고 할지라도 당장 이 자리에서 일기장이 진짜인지 가짜인지는 알 수 없으리라.

그러나 가져가서 두고두고 보다 보면 무언가 다르다는 사실을 알아차릴지도 몰랐다.

그렇다면 차라리 필사본을 건네주는 게 나았다.

“이 자리에서 원본을 확인한 후에 필사해서 가져가도록 해요.”

“이건 처음과 말씀이 다르십니다.”

“이 일기장을 외부로 반출할 사람은 나나 에크하르트뿐이고, 결국 없어진 게 들통 나면 내가 범인으로 몰릴 게 뻔하죠. 지금 나보고 그런 위험까지 감수하라는 거예요?”

오벨리아가 따지고 들자 커티스가 침묵했다.

역시나 혹시라도 일기장이 사라진 것을 들킨 뒤 그녀가 어떻게 될지 따위는 신경 쓰지 않은 모양이었다.

하긴, 커티스가 황실과 손을 잡았다면 그는 이미 힐켄테데를 등진 것이었다.

그러니 이제 와 커티스에게 힐켄테데의 핏줄 따위가 뭐 얼마나 중요하겠는가.

“…알겠습니다, 그러면 우선 일기장을 확인하게 해 주시지요.”

한동안 길게 침묵하던 커티스가 손을 내밀었다.

오벨리아가 일기장과 필사본을 함께 건네주었다.

그 안에 적혀 있는 게 원하던 내용이 맞았는지 커티스의 두 눈에 이채가 돌았다.

그가 만족스러운 얼굴로 필사본을 소맷자락 안에 넣었다.

“…좋습니다. 어차피 일기장이 없어진 것을 에크하르트 님께서 모르고 계시는 게 더 좋을 테니까요.”

커티스가 오벨리아에게 순순히 일기장을 돌려주었다.

아무래도 일기장에 적힌 내용이 대단히 만족스러웠던 모양이었다.

“그럼 이제 말해 봐요, 그 일기장을 어디에 쓸 거죠?”

“일기장을 필사하셨다면 에크하르트 님의 출신도 알게 되셨겠군요. 그 분의 신분은 힐켄테데를 넘어 제국에 위협이 될 겁니다. 현재의 황제 폐하께서는 당연히 그것을 바라지 않으십니다.”

무슨 생각인지 커티스는 계획을 술술 털어놓았다.

알렉산드로가 거론되자 오벨리아의 시선이 어두워졌다.

역시 힐켄테데의 일에 그녀의 전남편이 관여되어 있던 것이다.

“…에크하르트를 황실에 넘기겠다는 뜻인가요? 힐켄테데는 황실과 연관되는 걸 지양하지 않나요?”

오벨리아가 짐짓 우려되는 것처럼 물었다.

“에크하르트 님은 현재 힐켄테데 대부분의 것을 손에 쥐고 계십니다. 그런 분을 밀어내고 오벨리아 님께서 힐켄테데 대공위에 오르시려면 어쩔 수 없는 선택이지요.”

커티스의 대답이 참으로 매끄러웠다.

그는 모든 것이 오벨리아를 위한 것인 양 굴었다.

그러나 커티스가 힐켄테데 사변에 개입되어 있으리라는 것을 짐작하면, 이번 일 또한 당연히 그녀를 위한 것일 리 없었다.

“…알겠어요.”

그렇지만 오벨리아는 커티스가 대공 자리를 들먹이니 어쩔 수 없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래야만 현재 시점에서 그녀가 의지할 사람이 커티스뿐인 것처럼 보이지 않겠는가.

그러자 커티스가 기다렸다는 듯 다음 말을 꺼냈다.

“그래서 말씀인데… 이 필사본이 거짓된 내용이 아니라는 것을 오벨리아 님께서 증명해 주셨으면 합니다. 황실의 도움을 받는데 출처가 불분명한 증거를 가져가는 건 안 될 테니까요.”

오벨리아는 직감적으로 알아차렸다.

이게 커티스가 자신의 계획을 그녀에게 순순히 털어놓은 이유라는 것을.

“어떻게요?”

“이 필사본에 오벨리아 님의 인장을 찍어 주십시오.”

커티스는 이 일에 오벨리아를 끌어들일 모양이었다.

설령 훗날 그가 황실과 손을 잡은 일을 다른 원로와 가신들에게 질책받더라도, 그녀가 관여되어 있다면 면책을 받게 될 테니 말이다.

오벨리아가 잠시 망설였다.

그렇게 될 경우, 커티스가 황실과 결탁한 사실이 드러났을 때 그녀도 곤란해질 터였다.

오벨리아는 자신이 홀로 손해 보는 것쯤은 아무렇지 않았다.

다만, 그러면 그녀가 에크하르트를 돕는 데에 지장이 생길지도 몰랐다.

“…확실히 에크하르트를 끌어내릴 수 있는 거겠죠?”

한동안의 침묵 끝에 오벨리아가 자신까지 깊게 얽히는 것이 불안한 티를 팍팍 드러내며 말을 꺼냈다.

커티스가 고개를 끄덕이며 자신했다.

“반드시 오벨리아 님을 힐켄테데 대공으로 만들어 드리겠습니다.”

그 말에도 불구하고 오벨리아는 일부러 잠시간 주저했다.

그러나 끝내 그녀가 인장을 찍어 줄 수밖에 없음을 알고 있다는 듯이, 커티스는 여유로웠다.

만약 오벨리아가 진정으로 원하는 것이 힐켄테데 대공 작위라면 그의 말을 거부할 수 없을 테니까.

결국 그녀가 자리에서 일어나 필사할 종이를 가져왔다.

오벨리아의 인장 반지에 잉크가 찍히고, 그녀가 인장을 종이에 내리눌렀다.

커티스의 입가에 만족스러운 미소가 내걸렸다.

***

당연하게도 커티스의 그 웃음은 오래갈 수 없었다.

그가 황실의 사람과 접촉하여 필사본을 넘기려던 순간, 에크하르트가 그 현장을 덮쳤기 때문이다.

“이 무슨…!”

커티스가 당황하여 필사본을 황급히 숨겼다.

그러나 그를 둘러싼 에크하르트의 기사들에게서 벗어날 수는 없었다.

“커티스 로웰스턴, 감히 힐켄테데의 일을 외부로 발설한 죄를 물어 원로직을 박탈한다.”

에크하르트가 고대하던 순간이었다.

그때, 황실의 사람일 것이 분명한 남자가 커티스에게로 달려들었다.

“어딜…!”

에크하르트가 발 빠르게 움직여 남자가 커티스에게 들이민 검을 쳐냈다.

순식간에 죽임당할 뻔한 커티스가 놀라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그리고 동시에 커티스에게 달려들었던 남자의 육신 또한 허물어졌다.

커티스에게 했던 공격이 실패하자마자, 입 안의 독을 짓씹은 모양이었다.

단언컨대 남자의 목숨을 살려볼 새도 없이 일어난 일이었다.

아마도 일이 실패하면 커티스를 죽이고 자결하라고 알렉산드로에게 미리 명령을 받았으리라.

에크하르트는 죽은 이에게 미련 두지 않았다.

어차피 저런 종자는 심문이나 고문을 한들, 무언가를 발설할 리 없었기 때문이다.

“커티스 로웰스턴은 내가 직접 데려가도록 하지. 너희들은 주변을 쉴 틈 없이 경계하도록.”

에크하르트가 오늘 데려온 사람들은 모두 믿을 수 있는 그의 수하였다.

그러나 알렉산드로가 무슨 짓을 해놨을지 모르므로, 주변 경계는 물론이고 에크하르트가 커티스를 직접 심문하는 것이 가장 나았다.

그 누구보다 에크하르트의 무력이 가장 뛰어났으니 돌발 상황에 대비하기 좋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커티스는 지하 감옥에 구금되지 않았다.

물론… 커티스를 마주해야 할 사람이 차디찬 지하 감옥으로 내려오기에는 그 몸 상태가 좋지 않은 까닭이 컸지만.

“너…!”

커티스는 오벨리아를 보자마자 분노하여 소리쳤다.

당연하게도 힐켄테데 저택에서 가장 경비가 삼엄한 곳은 대공과 대공비의 방이었다.

그러나 여인의 침실에 함부로 무뢰한을 들일 수는 없다는 에크하르트의 말에 의하여, 오벨리아는 대공의 방에서 커티스를 기다리고 있었다.

“원로, 자중하라.”

“윽…!”

그러나 커티스가 분노를 표현하기 무섭게, 에크하르트가 커티스의 무릎 뒤쪽을 차 그를 무릎 꿇렸다.

커티스의 오른쪽 어깨를 짓누르는 에크하르트의 아귀힘이 무거웠다.

그리하여 커티스는 차마 고개를 들지 못했다.

자신의 옆에 굳건하게 서 있는 에크하르트가 두려웠기 때문이다.

“에크하르트, 잠깐 나가 있어 줘.”

그것을 알아차린 오벨리아가 요구했다.

그녀는 커티스 같은 자들을 잘 알았다.

이런 얍삽한 이들은 강자 앞에서는 찍소리도 못할 만큼 기가 죽어있으면서도, 그렇기에 빈틈 하나 보이지 않으려 들었다.

저보다 강한 자들에게 물리면 곧바로 제 숨통이 끊어질 줄 알고 있는 탓이었다.

커티스에게서 어떤 이야기를 끌어내기 위해서는 그를 방심시켜야만 했다.

그러나 에크하르트는 곧바로 나가지 않고 주저했다.

아무래도 무력이 없는 오벨리아와 커티스만 남겨 두기가 내키지 않는 모양이었다.

“…무슨 일 있으면 불러라.”

하지만 오벨리아가 아는 것을 에크하르트가 모를 리 없었다.

그도 커티스를 심문할 사람으로는 그녀가 훨씬 낫다는 것을 알았다.

혹시라도 무슨 일이 벌어지지 않게, 에크하르트는 커티스의 팔을 뒤로 묶은 매듭을 더 단단히 조인 후 방을 나섰다.

그가 나가고도 커티스는 말이 없었다.

아무래도 문밖에 있을 에크하르트의 눈치를 보는 듯했다.

“그래… 우습게 보던 계집 앞에 무릎 꿇고 있는 기분은 어때?”

그 주의를 돌려놓는 오벨리아의 한마디에 커티스의 고개가 휙 돌아갔다.

노골적인 도발이었다.

그렇지만 순식간에 모든 것을 잃게 생긴 커티스에게는 그보다 효율적일 수 없었다.

이미 그를 이루는 모든 것들이 흔들리는 위태로운 상태에 직면한 덕이었다.

“네가 감히 날 배신해!”

커티스가 울컥하여 소리쳤다.

그러자 오벨리아가 또 다시 노골적으로 비웃었다.

“배신은 서로 믿는 사이에나 하는 거지. 원로, 당신과 내가 언제부터 서로에게 신뢰가 있었다고 그래?”

“오벨리아!”

커티스의 얼굴이 붉으락푸르락 달아올랐다.

“내가 나 혼자 죽을 거 같아! 네 인장이 찍힌 필사본이 있다는 사실을 잊은 모양이지!”

커티스가 곧 잔뜩 분노에 차 소리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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