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화. 시작도 되지 못할 무언가(3)
짝!
오벨리아가 양 손바닥을 부딪치며 웃었다.
“아, 그거.”
정말로, 대수롭지 않다는 듯이.
오벨리아가 아까 기사가 커티스에게서 압수한 필사본을 꺼내 들었다.
그녀가 인장을 찍고 커티스에게 일기장의 내용을 옮겨 적게 한 뒤에, 다시 한번 촛농을 녹여 그 위에 인장을 새겨 줬기 때문에 필사본은 봉해져 있었다.
그리고 그것을 떼어내 필사본을 펼치자 놀랍게도 그 안에는 오벨리아의 인장이 아주 많이 흐려져 있었다.
“이게 무슨…?”
커티스가 멍하니 눈을 깜박였다.
분명 제 눈으로 선명한 인장이 찍히는 것을 확인했는데 왜 저토록 흐려져 있는지 모를 노릇이었다.
“잘 봐.”
그리고 오벨리아가 필사본에 찍힌 인장 위로 옆에 두었던 향수를 부었다.
그 위를 몇 번 문지르자, 그곳에는 잉크가 조금 남았을 뿐 인장의 형태는 알아볼 수 없게 되었다.
“말도 안 돼!”
커티스가 경악하여 소리쳤다.
필사본에는 이제 온전히 그의 필체만이 남아 있었다.
“설마 내가 이런 것도 생각하지 않고 당신에게 인장을 찍어 줬을까.”
오벨리아가 여유롭게 미소했다.
커티스가 자신이 파 놓은 함정을 모르리라고 생각했다.
왜냐하면 그녀 또한 우연히 알게 된 방법이었기 때문이다.
향을 종이에 입히는 것은 귀족들이 종종 쓰는 방법이었다.
오벨리아와 알렉산드로가 연애편지를 주고받을 때도 당연히 써먹었다.
그녀는 그 편지를 단 하나도 버리지 않고 모아 뒀고, 종종 다시 꺼내보고는 했다.
그래서 알게 됐다.
향수는 양피지를 빠르게 삭게 하고, 그게 잉크를 바래게 만든다는 것을.
그 후로 호기심에 향수 속의 알콜 성분이 잉크를 지우는데 큰 역할을 한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그래서 오벨리아는 자신이 인장을 찍을 자리에 커티스 몰래 미리 향수를 적셔 뒀던 것이었다.
하고 많은 종이 중에 양피지를 택한 것도 그 때문이었다.
가죽류가 유독 향수에 약했던 것이다.
“자, 이제 당신에게 남은 패는 없어. 어떻게 할래?”
궁지에 몰린 사람을 쥐고 뒤흔드는 건 오벨리아에게 쉽디쉬운 일이었다.
완전히 속았다는 사실에 잔뜩 흥분하여 곧 날뛰기라도 할 듯한 커티스를 두고 오벨리아가 느긋하게 다리를 꼬며 말을 이었다.
“난 내 필요에 따라 누구와도 손잡을 수 있어. 그게 에크하르트든… 혹은 커티스, 당신이든.”
오벨리아의 말에 커티스의 발버둥이 뚝 멎었다.
그가 잔뜩 불신 어린 얼굴로 그녀를 쳐다봤다.
그러나 오벨리아는 알고 있었다.
“그러니 커티스, 나랑 한 번 더 손을 잡지 않겠어?”
지금 이 순간, 커티스에게 동아줄이 되어 줄 존재는 자신뿐이라는 사실을.
한 번 속았던 사람에게 또 속겠어?
그런 건 궁지에 몰려 보지 않고는 모를 일이다.
지금의 커티스가 자신을 이미 한 번 속인 오벨리아의 말에 흔들리는 것처럼 말이다.
“…내가 네 말에 또 속을 줄 알고?”
커티스가 괜스레 고개를 빳빳이 들며 대꾸했다.
그러나 그 목소리에는 힘이 없었다.
그는 분명히 오벨리아의 말에 갈등하고 있었다.
“이걸 보고도 그렇게 말할까?”
오벨리아가 커티스의 앞에 서류 하나를 들이밀었다.
그가 저지른 비리들이 꽤 상세하게 적혀있었다.
“이걸 어떻게…!”
“커티스, 당신이 잡혔다고 하니- 지금껏 당신을 따르던 자들이 너나 할 것 없이 살겠다고 술술 불던걸.”
물론, 거짓말이었다.
이건 에크하르트가 그간 원로들의 비리에 대해 모아 놓은 것 중 하나일 뿐이었다.
“…거짓말이다!”
“거짓말이라면 내가 당신이 저지른 비리들을 어떻게 알고 있겠어?”
오벨리아는 결코 에크하르트가 모아놓은 원로들의 비리를 이번에 사용할 생각이 없었다.
그렇지 않고서야 그녀가 왜 애써 커티스를 속여 함정에 빠트리는 고생을 하고 있겠는가.
원로들의 비리는 그가 진실로 필요할 때, 공개적으로 가장 크게 휘두를 수 있는 무기가 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벨리아가 오늘 커티스의 비리를 들고 온 것은 두 가지 이유가 있었다.
첫째는 커티스도 에크하르트가 이런 비리를 알고 있으면서도 무려 3년을 참아 왔다고는 생각하지 못할 것이며, 둘째는 이정도 내용쯤이야 에크하르트가 아니라 다른 원로들의 입으로도 알아낼 수 있는 내용이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마지막으로 지금 오벨리아와 커티스의 대화는 누가 엿들을 리도 없으니, 여전히 원로들은 자신들의 비리가 들통 났음을 모르지 않겠는가.
에크하르트가 사용할 무기를 남겨 두면서도 커티스를 위시한 무리를 이간질하기에는 최적의 방법이었다.
“이제 알겠어? 당신이 구제받을 방법은 내 손을 잡는 것뿐이라는 걸.”
커티스가 아무 말도 못 하고 있자, 오벨리아가 시기 좋게 말을 이었다.
힐켄테데 내부의 일을 외부로 빼돌리다가 걸렸고 심지어는 비리까지 저질렀다.
어느 구석을 봐도 커티스가 탈출할 방면이 없었다.
“어차피 이대로 망하나, 내 손을 잡고 망하나. 한 번 살 시도는 해 봐야 하지 않겠어?”
그녀의 말대로, 오벨리아는 지금 커티스의 유일한 구명줄 같아 보였다.
“…내가 무엇을 하면 되지?”
결국 커티스는 굴복했다.
***
당연하게도 오벨리아와 에크하르트는 커티스를 믿을 생각 따위 없었다.
한 번 배신을 한 자가 두 번 배신하는 게 어렵겠는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가 커티스를 회유한 것은 그 무리가 저지른 일들을 명명백백하게 파악하기 위해서였다.
이미 수세에 몰린 커티스는 손쉽게 자신을 따르던 원로들의 만행을 털어놓았다.
그리고 그 속에서 오벨리아와 에크하르트는 알렉산드로가 벌인 일이 생각보다 크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러니까, 현 황제가 각 귀족 가문의 재산을 빼돌리고 있다는 말이군.”
에크하르트가 기가 막힌다는 듯 커티스가 건네준 서류들을 늘어놓았다.
1년 전, 제국의 황실은 대대적으로 보육원을 증설하는 사업을 시작했다.
카테리안느 가의 둘째인 라이너스가 주축이 된 사업이었다.
황실도 카테리안느도 전혀 압박을 넣지 않았지만, 그 당시 황태자였던 알렉산드로와 그 처가이자 개국공신인 카테리안느가 벌이는 사업이었다.
당연히 황태자와 카테리안느 쪽에 줄을 대기 위해서라도 후원을 하겠다는 자들이 자발적으로 줄을 섰다.
커티스도 그중의 하나였다.
로웰스턴은 힐켄테데의 가신 가문이었으나, 엄연히 백작 작위를 가진 가문이었으므로 제국 어디에 가서 빠질 가문은 아니었다.
그러니 로웰스턴의 이름으로 사업에 참여하는 것은 그리 어려울 게 없었다.
그리고 그런 식으로 참여한 원로들의 가문이 한둘이 아니었다.
에크하르트도 그들이 보육원 증설 사업에 참여했다는 것 정도는 알고 있었다.
아무리 가신 가문이라고들 하지만, 그 가문의 내밀한 일에까지 끼어드는 것은 도리가 아니었기에, 그는 초기 사업이 제대로 진행된다는 것 정도만 파악하고 손을 뗐었다.
실질적으로 1년이 지난 지금, 보육원은 1년 전에 비해 아주 많이 늘어났고 그리하여 거리를 헤매는 아이들도 훨씬 줄게 되었다.
겉으로만 보자면 아주 훌륭하게 성공한 사업인 셈이었다.
그러나 여기서 황실 사람이었던 오벨리아만이 알고 있는 사실들이 끼어들면 말이 달라졌다.
“그런 거 같아. 나도 토씨 하나 틀리지 않고 기억하는 건 아니지만, 황실에 후원한 몇몇 가문이 누락되었어.”
믿고 사랑하는 남편과 둘째 오빠가 하는 사업이었다.
그렇기에 오벨리아는 큰 참견을 하지 않았으나, 황태자비였고 카테리안느의 딸이었기에 서류를 접할 기회는 있었다.
커티스가 건네준 정보에는 원로들이 황실과 엮이고자 했듯이, 원로 가문들에 줄을 대고자 했던 작은 가문들도 여럿 적혀 있었다.
힐켄테데 사변을 겪은 이후, 오벨리아는 늘 힐켄테데 쪽을 신경을 써 왔다.
그 때문에 사업 관련 서류를 접했던 당시, 그녀는 사업에 참여한 이 중 힐켄테데의 사람들만은 눈여겨봤었다.
그리고 단언컨대 황실에서 봤던 서류보다 커티스가 건네준 서류에 표기된 가문의 이름이 월등히 많았다.
두 가지 서류를 비교하면 금방 알 일이지만, 사실상 황실에서 황태자에게 올라오는 서류를 건드릴 수 있는 사람은 그의 수족들뿐이었으니 그 허점을 노린 행동이었다.
결론은 귀족들에게서 황실이 받은 돈보다 사용된 돈이 월등히 적다는 이야기였다.
그러니 그 차액이 누구의 주머니로 들어갔겠는가.
“당시에 보육원 증설 사업 관련 서류를 봤을 때, 세간에 알려진 것보다 진행되는 사업의 규모가 작아서 의아하게 여기긴 했지만….”
오벨리아가 침음했다.
귀족들이 전부 바보이지 않은 이상, 사업에 참여한 규모와 그 결과물이 다르면 무언가 이상함을 눈치채기 마련이다.
그런데 1년이 지나도록 아무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단 것은 두 가지 가능성을 가진다.
사업이 속 빈 강정이거나 혹은 의문을 가진 모든 자들이 영원히 입을 열 수 없도록 묻어 버렸거나.
“아이들을 위해 하는 일에까지 이렇게 손을 댔을 줄이야.”
오벨리아는 아마도 둘 다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녀의 얼굴에 자괴감이 가득했다.
사업이 속 빈 강정일 경우, 아마도 겉모습만 번지르르한 보육원이 다수 지어졌을 확률이 높았다.
건물의 상태가 엉망일 것은 물론, 보육원으로 보내진 아이들이 성장하는 데 제대로 지원이 되었을지조차 의문이었다.
“…내가 가 봤어야 했는데.”
변명하자면 할 수도 있었다.
오벨리아는 남편의 황위 싸움 중 일어나는 권모술수에 맞서야 했고, 동시에 황후가 없으니 황실의 모든 내정을 맡아야만 했다.
황태자비가 된 후 그녀는 제대로 잘 시간조차 가질 수 없었다.
그런 그녀가 제국의 모든 일을 살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벨리아는 자신이 어쩌면 막을 수도 있었던 일에 대하여 죄책감을 덜어낼 수 없었다.
오벨리아가 생각하기에 이 일의 가장 큰 피해자는 아이들이기에 더욱 그러했다.
차고 넘치도록 가진 게 많은 귀족이야 돈 조금 잃으면 그만이라지만, 안온한 생활을 할 줄 알았던 보육원에서 아이들이 겪었을 일은 누가 보상한단 말인가.
에크하르트는 그런 오벨리아를 위로하지 않았다.
그가 무심한 얼굴로 말을 꺼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