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화. 시작도 되지 못할 무언가(4)
“지금 당장 각지의 보육원으로 수하들을 보내 실상을 조사하도록 해야겠군.”
에크하르트는 그저 자신이 해야 할 일을 했다.
“황실을 통해서가 아니라, 직접 감독할 자를 보내 아이들에게 필요한 것들을 지원해 주면 현 황제도 수작을 부릴 수 없을 테지.”
이어지는 말들에 그제야 오벨리아가 고개를 들었다.
에크하르트가 길을 제시함으로써 이럴 때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자, 그제야 자책에서 빠져나온 모양이었다.
“이런 수작도 그만하게 만들어야지. 알렉산드로가 귀족들의 재산으로 농간을 부렸다는 걸 세상에 알려야겠어.”
오벨리아의 눈이 번뜩였다.
아무리 적은 재산일지라도, 귀족들은 자신들의 재산으로 황제가 배를 불렸다고 한다면 분노할 터였다.
에크하르트가 보육원을 지원하는 것은 영구적인 해결책이 아니었다.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알렉산드로의 악행을 끊는 것이었다.
“좋아, 그럼 우선 원로회를 소집하도록 하지.”
에크하르트가 오벨리아의 말에 맞장구를 치며 제 수하를 불러들였다.
알렉산드로가 귀족 가문의 명단으로만 장난을 쳤을 리 없었다.
에크하르트는 알렉산드로가 분명 각 가문에서 받은 후원금 또한 실제보다 적게 기입 했으리라 확신했다.
“커티스를 움직여야겠어.”
오벨리아가 고개를 끄덕이며 시녀에게 커티스를 불러들이라 명령했다.
황실과 손을 잡고 싶었던 커티스 무리는 이 보육원 증설 사업의 큰 투자자였다.
사실을 알면 그들의 분노 또한 적지 않을 것이다.
커티스를 당장 처리하지 않은 보람을 수확할 때였다.
***
그간 원로회를 노골적으로 멀리해 왔던 에크하르트가 아주 드물게 원로회를 소집했다.
그런데 그 자리의 분위기가 참으로 이상했다.
커티스와 그를 따르는 무리의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던 것이다.
물론, 오벨리아가 커티스로부터 들은 원로들의 약점을 가지고 그 무리를 협박한 탓이었다.
그녀의 책략으로 인해 커티스와 그를 따르던 무리는 서로가 서로를 배신자라고 여기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벨리아의 명에 의하여 커티스와 그 무리가 여전히 한편인 척 굴어야 한다는 사실이 더욱 그 이상한 분위기를 부추겼으나, 티 낼 수도 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그 분위기는 오벨리아와 에크하르트가 함께 등장함으로써 삽시간에 뒤바뀌었다.
왜냐하면, 앙숙으로 알려진 오벨리아와 에크하르트가 나란히 팔짱을 끼고 회의실로 들어왔기 때문이다.
커티스 일파는 당연히 놀라지 않았다.
그러나 그 외에 프렐런트를 따르던 자들과 중립을 지키던 자들은 놀라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거나 말거나 오벨리아와 에크하르트는 유유히 걸어가 회의실의 상석에 자리했다.
“모두 앉아. 이야기가 길어질 테니까.”
오벨리아가 원로들에게 명령했다.
그 어투가 지독하게 자연스러워서 원로들은 잠시 넋을 놓았다.
그녀가 힐켄테데에 처음 등장했을 때 마냥 물정 모르는 아가씨 같던 모습은 온데간데없었다.
오벨리아에게서 흘러나오는 군림하는 자 특유의 위압감이 순간적으로 원로들을 위축시켰다.
원로들에게 존대를 사용하지 않는 건 대공과 대공비뿐이었다.
아무리 힐켄테데의 핏줄이라고 할지라도 오벨리아는 아직 정식 대공비가 아니니 제멋대로 원로들에게 반말을 사용하는 것은 예절에 어긋나는 행동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무도 트집을 잡지 못할 만큼, 원로들은 오벨리아의 분위기에 휩쓸려 있었다.
“…저희를 소집하신 게 오벨리아 님이셨습니까?”
한발 늦게 정신을 차린 프렐런트가 원로들을 대표하여 입을 열었다.
프렐런트의 입장에서는 어째서인지 커티스 일파가 내내 조용한 탓에 그녀가 나설 수밖에 없었다.
“프렐런트 엘루미나. 내가 그대에게 발언을 허락했던가?”
오벨리아가 서늘하게 웃으며 되물었다.
만약 오벨리아가 진짜로 이 회의를 주최했다면, 이 회의의 의장은 그녀인 셈이었다.
즉, 오벨리아를 무시하는 게 아니고서야 그녀를 통해서 발언권을 얻어야만 한다는 의미였다.
“…죄송합니다, 오벨리아 님.”
프렐런트의 입이 다물렸다.
북부에서 힐켄테데의 권위는 황제의 것에 뒤지지 않았다.
그러니 힐켄테데 내에서 회의가 열릴 때면 힐켄테데가 의장을 맡는 것이 당연했고, 그들의 권리는 당연히 보장되어야만 하는 것이었다.
회의를 주최한 것이 에크하르트라고 생각했더라면 프렐런트도 방금처럼 나서지 않았을 것이다.
왜냐하면 에크하르트는 그런 힐켄테데의 관습을 아주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프렐런트가 오벨리아의 허락도 없이 질문을 하고 원로들이 그것을 말리지 않은 건 오벨리아가 힐켄테데로서 누릴 수 있는 권리 또한 제대로 모르리라 여긴 탓이었다.
그러나 그들의 예상과 달리, 오벨리아는 정확히 자신이 행사할 수 있는 권리를 파악하고 있었다.
프렐런트의 입을 다물리게 만든 것은 바로 그 점이었다.
그제야 원로들은 오벨리아가 지금껏 어설픈 척 연기를 해 왔단 것을 깨달았다.
그렇지 않고서야 아무리 커티스에게 교육을 받았다고 한들, 단기간에 사람이 이토록 뒤바뀔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모두가 뒤늦은 상황 파악에 입을 다문 가운데, 그제야 오벨리아가 만족스레 미소하며 다시 말을 이었다.
“자, 그럼 회의를 시작해 볼까.”
***
며칠 뒤의 아침이었다.
쨍그랑!
“이게 지금 무슨 소리야!”
알렉산드로는 일어나자마자 분노를 참지 못하고 침대 협탁 위에 놓여있던 물잔을 집어 던졌다.
“죄송합니다, 폐하. 소문이 너무 삽시간에 일파만파 퍼져서…!”
황제의 분노에 기사가 황급히 고개를 조아렸다.
지금 저잣거리에는 황실이 불쌍한 고아들의 고혈을 빨아먹었다는 소문이 가득가득했다.
눈을 뜨자마자 이런 소문을 접해야했으니, 알렉산드로의 기분이 유쾌할 리가 없었다.
“죄송하다는 헛소리만 하지 말고 더 퍼지지 않도록 막으란 말이다!”
알렉산드로가 거칠게 소리쳤다.
1년간, 귀족들의 후원금을 빼돌려 쏠쏠히 그의 주머니를 채웠다.
그러면서도 거리의 아이들까지 놓지 않고 아끼는 성군이라는 이미지를 톡톡히 챙겨왔다.
그런데 지금 그것이 말짱 도루묵이 되게 생긴 것이다.
“그것이… 소문의 출처를 알 수가 없습니다. 심지어 이미 각 지방까지 퍼진 뒤라….”
기사가 말끝을 흐렸다.
소문의 시작점을 알아야 막든가 말든가 할 텐데, 소문의 근원지를 알 수가 없으니 막을 방도가 없었다.
게다가 숲에 불을 놓은 듯 퍼진 소문은 이미 아이들의 입에까지 담길 정도였다.
온 제국민의 입을 틀어막지 않는 이상, 소문이 퍼지는 것을 막는 건 사실상 불가능이었다.
“대체 소문이 이 지경으로 퍼질 때까지 네 놈들은 무얼 하고 있었단 말이냐!”
쨍그랑!
알렉산드로가 분을 이기지 못하고 이번에는 화병을 집어 던졌다.
황위에 오른 후, 그는 하루하루를 평온하게 보낸 적이 없었다.
그러다 보니 알렉산드로의 신경은 칼날보다도 더 날카로워져 있었다.
그런데 전혀 예고도 없이 갑작스럽게 이런 소문까지 퍼진 것이다.
그러니 그는 분노하지 않을 수 없었다.
“죄송합니다, 그렇지만….”
“그놈의 변명, 변명, 변명!”
그런 상황에서 기사의 죄송하다는 말은 그저 변명 같았고, 알렉산드로는 더욱 화가 치밀었다.
그러나 알렉산드로가 또다시 분노를 토해내기 전에, 누군가 감히 그의 말을 막았다.
“황제 폐하, 선황 폐하께서 찾으십니다.”
선황제의 시종장, 제임스였다.
***
알렉산드로에게 황위를 넘겨준 뒤에도, 선황제는 자신이 쥔 실권들을 놓지 않고 있었다.
선황제는 본래 양위 후 황궁이 아닌 남부 지역의 황실 소유 별장으로 요양을 가기로 되어 있었다.
그러나 알렉산드로의 즉위 후, 선황제는 돌연 말을 바꾸어 황궁에 남았다.
그로 인해 알렉산드로는 황제가 되었음에도 그 권위를 온전히 누릴 수 없었다.
“선황 폐하께서는 안에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이렇게 선황제의 시종장으로 하여금 여전히 불려 다니는 알렉산드로의 모습이 그 사실을 증명했다.
“알렉산드로, 네 이놈! 대체 무슨 짓을 하고 다니는 게냐!”
알렉산드로가 선황제의 집무실로 들어서자마자 불호령이 들려왔다.
선황제는 어지간히 화가 난 모양인지 어깨를 들썩이며 씩씩거리고 있었다.
“네 놈이 감히 황실의 이름에 오물을 끼얹어! 황실의 이름으로 사업을 벌여 놓고, 그것을 착복하다니 제정신이냐!”
쾅! 쾅!
선황제의 손이 분노를 담아 연이어 책상을 내리쳤다.
그가 거칠게 제 아들을 비난했다.
“네놈이 시원찮은 건 오벨리아 대신 그깟 것을 선택할 때부터 알아봤다! 대체 네가 제대로 하는 게 뭐야!”
연이은 아버지의 비난에 알렉산드로의 얼굴이 매섭게 굳었다.
아그네스는 오벨리아가 죽었음에도 불구하고 여태껏 황후의 자리에 오르지 못했다.
선황제가 아그네스를 인정해 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는 아그네스를 자신의 며느리로 취급하지조차 않았다.
여전히 실권을 손에 쥐고 놓지 않는 선황제가 아그네스를 무시하니, 대신들 또한 그녀를 있는 둥 없는 둥 취급했다.
‘오벨리아만 없으면 될 거라고 여겼거늘…!’
알렉산드로가 이를 악물었다.
원래부터 부정이라고는 딱히 찾아볼 수 없던 제 아버지라지만, 아그네스의 뱃속에 손주가 자라고 있는데도 이럴 줄은 예상하지 못했다.
“…그깟 것이라고 하지 마십시오. 그녀의 뱃속에는 제 아이가 자라고 있습니다.”
알렉산드로가 부글부글 들끓는 속을 애써 가라앉히며 대꾸했다.
“하, 아주 아비한테 이러다 대들겠구나! 그럼, 전쟁터에서 데려온 약소국의 왕녀 따위를 내가 인정할 줄 알았더냐!”
물론, 제 아들이 그러든 말든 선황제는 신경도 쓰지 않았다.
“네가 오벨리아를 죽이려던 걸 내가 모를 줄 알았더냐! 내 허락도 받지 않고 그런 일을 벌이더니….”
선황제는 도리어 다시 한번 알렉산드로를 압박했다.
“너를 위한 말이다. 오벨리아가 이미 죽었으니 어쩔 수 없다만, 네 아들이 굳건한 지위를 갖길 바란다면 고위 귀족의 딸을 황후로 맞아들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