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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한부 폐태자비는 살아있다-22화 (22/136)

22화. 시작도 되지 못할 무언가(5)

이미 한 번 오갔던 논쟁이었다.

알렉산드로가 즉각적으로 반응했다.

“싫습니다. 제 아들을 사생아로 만들란 말씀이십니까!”

알렉산드로가 오벨리아의 죽음 이후 아그네스의 존재를 드러내자, 선황제는 그녀를 정부로 두라 말했다.

그러나 알렉산드로는 그것을 거부했고 그리하여 지금의 지경에 이르게 된 것이었다.

알렉산드로는 초조할 수밖에 없었다.

배가 눈에 띄게 부르지 않은 지금은 아직 아그네스의 회임 날짜를 속일 수 있었다.

하지만 출산일이 회임 날짜에서 지나치게 이를 테니 결국 끝까지 귀족들을 속일 수는 없을 터였다.

출산일까지 속이려면 방법은 아그네스를 황궁에서 떨어진 황실의 별장에 보내야만 했다.

그렇지만 당연하게도 황제의 정부인 아그네스는 공식적으로 그곳에 갈 수 없었다.

몰래 보내려고 해도 선황제가 가만히 두지 않을 테니, 진퇴양난인 셈이었다.

“아이야 새로 가지면 될 것 아니냐! 황제에게 결혼이 얼마나 중요한 정치적 수단인지 모르더냐! 7황자인 네 녀석이 황제를 꿈꿀 수 있게 된 게 카테리안느의 덕분인 것을!”

선황제가 어리석은 제 아들을 훈계했다.

그러나 그의 말은 알렉산드로의 분노를 북돋을 뿐이었다.

오벨리아 카테리안느의 선택을 받은 아무것도 없는 7황자.

그것은 알렉산드로 안의 크나큰 열등감을 말로 정의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카테리안느, 카테리안느, 카테리안느! 인제 그만 좀 하십시오!”

알렉산드로가 집무실이 울릴 만큼 쩌렁쩌렁한 목소리로 소리쳤다.

그의 얼굴이 붉으락푸르락 달아올라 있었다.

정말이지, 카테리안느의 위명에 가려지는 일은 지긋지긋했다.

쾅!

“그럼 네놈이 당장 들이닥칠 귀족들의 원성을 어떻게 하겠다는 말이야!”

그러나 선황제에게 제 아들의 분노가 와닿을 리 없었다.

그는 언제나 그런 아버지였으므로.

선황제는 도리어 제 아들의 건방진 작태에 책상을 내리치며 불호령을 내렸다.

하지만 이번만큼은 알렉산드로도 대꾸할 수 없었다.

보육원 사업에서 돈을 횡령한 사실을 들켰으니, 그곳에 투자한 귀족들이 가만히 있지 않을 터였다.

만약, 오벨리아가 살아 있었고 카테리안느가 건재했더라면 그들의 원성을 회유하든 찍어 누르든 방도를 찾아 주었을 것이다.

그러나 라이너스는 현재 카테리안느 공작 부인이 제 둘째 아들의 만행에 분노하여 공작의 인장을 꼭꼭 숨겨 둔 탓에 공작위에 오르지 못했다.

카테리안느의 원로와 가신들 역시 제 아비를 죽이고도 공작 위에 오르지 못한 라이너스를 인정하지 않았다.

그러니 알렉산드로는 카테리안느로부터 아무 도움도 받을 수 없는 상황이었다.

오벨리아의 죽음 이후, 실상 모든 것이 꼬여 버린 셈이었다.

똑똑똑.

“폐하, 큰일 났습니다.”

문밖에서 들려온 소리에 선황제와 알렉산드로의 고개가 휙 돌아갔다.

선황제의 시종장 제임스였다.

알렉산드로가 제 아비를 아직도 황제처럼 부르는 시종장의 행태에 이를 악물었다.

그러나 시종장이 다음 말을 내뱉는 순간, 그의 분노는 차마 내뱉지 못할 것이 되었다.

“무슨 일이냐!”

선황제가 묻자, 시종장이 대답했다.

“귀족원이 황실을 고소했습니다.”

***

오벨리아는 커티스를 움직여 그를 위시한 원로들이 제 말을 따르게 만들었다.

그 결과, 힐켄테데의 원로 회의는 아주 손쉽게 그녀의 뜻대로 끝났다.

애초에 오벨리아는 황실이 보육원 사업을 핑계로 귀족들의 돈을 횡령했음을 알렸을 뿐이니, 사실상 결과는 정해져 있는 셈이었다.

그리하여 회의가 잘 끝난 지금, 오벨리아와 에크하르트는 자리를 옮겨 대공의 집무실에 있었다.

“생각보다 원로들이 보육원 사업에 손을 많이 댔네.”

오벨리아가 말했다.

회의 중 알게 된 결과, 프렐런트 측과 중립을 지키던 원로 중 몇몇 또한 보육원 사업에 끼어든 모양이었다.

아마도 프렐런트와 뜻을 함께 하는 원로들은 그녀의 허락 없이 황실과 닿고자 한 모양인지, 프렐런트의 눈총을 샀지만.

“어떤 사업을 할지는 원로들의 자유니까.”

힐켄테데의 사람들이라고 해서 수도와 교류를 전혀 하지 않거나, 황실과 전혀 무관하게 사는 것은 아니었다.

그렇지 않고서야 어떻게 이 척박한 북부의 땅에서 살아남았겠는가.

대체로 그럼에도 불구하고 힐켄테데를 더욱 숭상했을 뿐이다.

사실 힐켄테데의 원로들이 어떤 사업에 참여했느냐는 중요한 게 아니었다.

게다가 황실이 주최한 보육원 사업은 황실뿐만 아니라, 거기에 모여든 다른 귀족들과의 관계도 쌓을 수 있으니 참여해서 손해 볼 것 없는 일이기도 했다.

물론, 힐켄테데야 굳이 그런 인맥을 쌓을 필요가 없기는 했지만.

“하긴, 커티스 측 인간들처럼 불순한 의도를 가진 게 문제지.”

“커티스야 나중에 처리하면 될 일이니….”

에크하르트의 말에 오벨리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어찌 됐든 힐켄테데의 원로들 사이에는 내로라하는 귀족들이 많았다.

중요한 것은 바로 그 점이었다.

그런 자들이 속아서 재산의 손해를 봤다는 것.

원로 가문들의 재산적으로 보면 그리 큰 티는 안 날지도 몰랐다.

그러나 모름지기 귀족들의 자존심이란 스스로 냈으면 몰라도, 속아서 당했다고 생각하면 결코 용납하지 않는 법이었다.

그리고 이게, 며칠 뒤 귀족원이 황실을 고소하게 된 일의 전말이었다.

은혜는 열 배로, 복수는 백 배로.

척박한 북부 땅의 시린 북풍을 맞고 자란 이들이 뼛속 깊이 새기고 사는 말이었다.

그곳에서 오랜 세월 대대손손 살아온 가문의 원로들은 그 누구도 참지 않았다.

힐켄테데를 포함하여, 척박한 땅 위의 것들로만 살 수 없던 북부의 사람들은 대체로 제국 각지에 손을 뻗어 두었다.

그런 그들이 발 빠르게 제국 각지로 움직였다.

백성들의 거리에 소문을 풀어 놓고 귀족원을 들쑤시니- 그 모든 것들이 황실로 돌아감은 당연한 일이었다.

일이 매우 순조롭게 돌아가고 있었다.

똑똑똑.

“대공 전하,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에크하르트의 그림자 기사가 불쑥 나타나지만 않았더라면, 오늘만큼은 계속 평온했을 터였다.

“잠시만 기다려 줘.”

에크하르트가 오벨리아에게 양해를 구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림자 기사가 이렇게 나타날 정도라면 빠르게 전달해야 할 정보가 있기 때문일 터였다.

“말해.”

에크하르트가 그림자 기사에게 말했다.

그런데 어쩐지 기사는 방 안쪽의 오벨리아를 힐끔 바라볼 뿐 머뭇거리며 입을 열지 않았다.

그 순간 아마, 오벨리아와 에크하르트 둘 다 눈치챘을 터다.

그림자 기사가 할 말이 오벨리아와 연관되어 있다는 것을 말이다.

“괜찮으니까 말해요.”

오벨리아가 말을 꺼내고도 잠시 망설이던 기사가 마침내 말을 이었다.

“로웰스턴 원로를 찾아왔던 기사의 뒤를 쫓는 데 성공했습니다만… 그자를 끌고 올 수는 없었습니다.”

그림자 기사의 말에 오벨리아가 흠칫했다.

에크하르트의 기사가 데려올 수 없었다는 말은 그 상대의 실력이 생각보다 뛰어나거나, 혹은 갑자기 사라지면 난감한 신분을 가지고 있다는 의미일 터였다.

알렉산드로가 부릴 수 있는 사람 중 그 두 가지 조건을 모두 충족할 만한 자를 그녀는 알고 있었다.

“그자의 정체는 황실 제 2기사단의 부기사단장이었습니다.”

그 순간, 에크하르트의 등이 굳는 것이 오벨리아의 눈에도 들어왔다.

그녀 또한 안색이 순식간에 나빠졌다.

오벨리아가 자신도 모르게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불쑥 말했다.

“아니야.”

“뭐가 아니라는 말이지?”

오벨리아의 부정에 에크하르트가 휙 뒤를 돌았다.

그녀에게 묻는 그의 목소리는 이미 사나워져 있었다.

“일리어스 오빠는 힐켄테데의 사변 같은 걸 방관하거나, 일으키는 데 동조할 사람이 아니야…!”

그 싸늘함에 오벨리아는 더욱 다급해졌다.

그러거나 말거나 손짓 한 번으로 제 수하를 내보낸 에크하르트가 성큼성큼 그녀에게 다가왔다.

“그러니까 지금, 나보고 황실 제 2기사단장으로 있던 네 오라비가 멍청하게 직속 수하가 무엇을 하는지 아무것도 몰랐다고 믿어라?”

에크하르트가 오벨리아를 향해 빈정거렸다.

그럴수록 그녀의 안색은 새하얗게 질렸다.

아무리 오벨리아가 그에게 죄를 지었다지만, 그녀는 자신의 오빠조차 이런 오해를 받게 두고 싶지 않았다.

“일리어스 오빠는 4년 전부터 공작 작위를 물려받기 위해 황실 기사단의 일에서 점점 손을 뗐어. 실질적으로 기사단을 움직인 것은 알렉산드로야. 그러니까….”

“오벨리아! 날 기만할 생각이라면 그만두는 게 좋을 거다!”

그러나 에크하르트는 오벨리아의 말을 날카롭게 끊어냈다.

“현 황실 2기사단의 부기사단장, 아이리스 캐트샤를 평민일 때 거둔 것이 일리어스 카테리안느라는 사실을 내가 모를 거 같아?!”

일리어스는 만인에게 평등한 기회를 주던 사람이었다.

그는 아이리스를 특별하게 여겨서가 아니라, 정말로 그녀의 실력이 뛰어났기 때문에 기회를 주었을 뿐이다.

그러나 오벨리아도 알고 있었다.

일리어스를 모르는 사람의 눈에는 충분히 그와 아이리스가 특별한 사이로 보일 수도 있다는 사실을.

“…일리어스 오빠와 캐트샤 경은 아무 사이도 아니었어.”

그 사실을 알고 있는 오벨리아의 목소리에는 전혀 힘이 없었다.

“두 사람이 특별한 사이라는 소문이 기사단 내 암암리에 퍼져 있었다지. 내가 네 말을 믿어야 하나?”

그리고 에크하르트 또한 오벨리아의 예상대로 그녀의 말을 믿지 않았다.

“하, 나는 여태까지 네가 힐켄테데에 있었던 일을 방관했다고만 생각했는데.”

에크하르트가 배신감 어린 얼굴로 오벨리아를 쳐다봤다.

방관이 아무리 큰 죄라고 해도 동조와는 또 다른 법이었다.

그제야 그녀는 그가 또 다른 오해를 하고 있음을 알아차렸다.

오벨리아와 일리어스는 소문날 만큼 각별한 남매 사이였다.

일리어스는 제 여동생이 해 달라는 것은 대체로 무엇이든 들어주었다.

알렉산드로에게 제 2기사단을 넘긴 것 또한 여동생을 위해서가 아니던가.

그러니까 지금 에크하르트는 2기사단이 힐켄테데의 원로들과 결탁하여 사변이 벌어지도록 만든 것에 오벨리아의 뜻도 있을지 모른다고 생각하고 있는 것이었다.

“또 날 가지고 놀았어, 너.”

오벨리아의 그 추측을 증명하듯, 에크하르트가 이를 악물며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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