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화. 시작도 되지 못할 무언가(6)
“아냐, 나는 정말….”
변명하려던 오벨리아의 입이 다물렸다.
방관만 했다고? 선황제가 말해 주기 전까지는 자신도 힐켄테데에 일어날 사건을 몰랐으며, 진짜로 동조만큼은 하지 않았다고?
그것을 변명이라고 하다니.
스스로가 생각해도 구차하고 염치없었다.
“일리어스 카테리안느는 현재 실종 상태라지. 만약 네 오라비가 힐켄테데에 있었던 사변에 대해 조금이라도 동조했다면… 차라리 그대로 죽는 편이 나을 거야.”
에크하르트가 흉흉한 눈으로 오벨리아를 내려다봤다.
그는 만약 일리어스가 눈앞에 있다면 당장이라도 베어 버릴 듯 살기등등했다.
“에크하르트!”
오벨리아가 자신도 모르게 에크하르트에게 매달렸다.
일리어스가 죽었는지 살았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녀는 더 이상 누군가를 잃는다는 생각만으로도 더는 견딜 수 없었다.
“진짜 아니야. 일리어스 오빠가 그랬을 리가 없어…!”
탁.
그러나 에크하르트는 제 팔을 붙잡은 오벨리아를 냉정하게 밀어냈다.
제법 강한 힘에 그녀의 몸이 휘청거리다가 바닥으로 힘없이 넘어졌다.
그에 잠시 멈칫했던 에크하르트가 휙 고개를 돌려 오벨리아를 외면했다.
“진짜로 아니길 바라야 할 거야. 물론, 일리어스 카테리안느뿐만 아니라 오벨리아 너 또한.”
에크하르트가 오벨리아에게 홱 돌아섰다.
그 걸음이 어느 때보다 매정해 보였다.
그의 등이 단호히 말하고 있었다.
그녀를 믿지 않는다고.
오벨리아는 에크하르트를 붙잡지 않았다.
아니, 그러지 못했다.
그들은 그런 사이였다.
그녀가 아무리 변명한다고 한들 그는 믿을 수도 믿지도 않을 사이.
그러니 오벨리아가 구태여 에크하르트를 붙잡는다고 한들, 그게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쿵.
에크하르트가 나간 뒤로 방문이 무거운 소리를 내며 닫혔다.
그녀는 그대로 바닥에 주저앉아 있었다.
새삼스럽게도 끔찍하게 홀로 남은 기분이었다.
***
에크하르트가 일방적으로 선언했다.
“일주일간 네 대외 활동을 모두 취소할 거다. 네 몸 회복에 힘쓰는 게 좋겠어.”
“뭐?”
오벨리아가 처음 보는 에크하르트의 완강한 태도에 멍하니 반문했다.
그러나 곧 그의 말이 의미하는 바를 인지한 그녀가 상체를 일으키며 다급히 입을 열었다.
“말도 안 돼…! 지금 이 시기에….”
어느 날 돌아온 전 가주의 진짜 딸이 원로들이 지켜 오던 균형을 무너트렸다.
힐켄테데의 원로들은 북부에서 오래도록 권력을 누려 온 자들이었다.
그런 이들이 겨우 한 번 밟혔다고 완전히 꼬리를 말 리가 없었다.
지금 당장에야 오벨리아에게 약점을 잡혔거나 상황을 파악하느라 얌전히 군다지만, 그들은 반드시 자신들이 누리던 것을 찾으려 들 터였다.
그러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서는 그녀가 건재해야만 했다.
그래야 오벨리아가 기껏 나서 원로들을 휘어잡은 의미가 있었다.
그런데 에크하르트가 갑자기 그녀를 제재하기 시작한 것이다.
“당신, 지금 날 못 믿겠다는 거야?”
오벨리아는 대놓고 묻기를 주저하지 않았다.
이 시점에 에크하르트가 그녀의 몸을 걱정하여 저런 결정을 할 리가 없었다.
그녀를 못 믿는 거다.
그거밖에 없었다.
“…너라면.”
잠시 침묵을 유지하던 에크하르트가 오벨리아를 쳐다봤다.
그의 시선에 지금껏 애써 담담한 척 가려 놓았던 원망과 미움이 파도처럼 일렁이고 있었다.
“너를 믿겠나?”
오벨리아의 입이 다물렸다.
그녀가 어떻게 감히 에크하르트에게 자신을 믿으라고 말할 수 있을까.
오벨리아가 초조함에 입술 안쪽 살을 잘근잘근 씹어댔다.
너무 강하게 깨문 탓인지, 비릿한 피 맛이 입 안에 번지는 것 같았다.
그러나 아무렇지 않았다.
바실리스크의 독을 마신 이후로 각혈은 일상이었다.
그러니 입 안에서 난 조그만 피쯤이야 대수로울 게 없었다.
“나를 믿지 않는 건 에크하르트, 당신 개인의 판단이지.”
오벨리아는 에크하르트를 설득할 수 없었다.
믿음, 신뢰. 그런 쪽으로 간다면 그녀는 그에게 아무것도 주장하지 못한다.
그러나 그래서는 안 됐다.
그래서 오벨리아는 고개를 빳빳하게 치켜들었다.
“그런 걸로 일을 망치려 들지 마.”
오벨리아가 에크하르트를 비난했다.
에크하르트의 결정은 객관적으로 봤을 때, 두 사람이 나아갈 길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 선택이 맞았다.
하지만 오벨리아의 말에도 에크하르트가 가진 감정에 대한 배려가 일말도 들어가 있지 않았다.
그래, 오벨리아는 에크하르트의 감정을 고려하는 선택을 포기했다.
제 선택이 정말 못되고 그래서는 안 되는 행동이라는 것쯤, 오벨리아도 알았다.
그러나 그녀는 두 손으로 드레스 자락을 꽉 쥐었다.
어차피 오벨리아와 에크하르트는 서로 어떤 관계를 쌓기 위하여 함께 하는 사이가 아니었다.
그리고 제 잘못된 판단으로 모든 것을 잃은 주제에, 그녀가 감히 다른 누구와의 관계를 기대하는 것 또한 우스운 일이었다.
그러니 오벨리아는 온전히 복수를 위해서만 행동해야 했다.
그녀가 살아남은 존재의 의의는 그것이었으니까.
“하…! 오벨리아, 넌 늘 그런 식이지.”
에크하르트가 기가 막힌다는 듯 헛웃음을 터트렸다.
그가 오벨리아에게로 훌쩍 다가서자, 그 어느 때보다도 위압적으로 보였다.
우습게도 평소에 에크하르트가 그녀를 은근히 배려하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는 부분이었다.
그가 오벨리아보다 훨씬 키가 크고 덩치가 큰데도 불구하고, 그녀는 에크하르트가 자신을 압박한다고 느낀 적이 없었으니까.
“너는 네 남편을 위해 힐켄테데 사변을 묵인했지. 그래서- 그날, 얼마나 많은 사람이 죽었는지 네 눈으로 보지 않았던가?”
오벨리아는 에크하르트를 구하기 위해 힐켄테데의 저택이 타오르고 사람들이 죽어가던 날 그곳에 있었다.
그는 그 점을 꼬집었다.
그 모든 것을 보고도 그녀가 그 외에는 다른 누구도 살리지 않았다는 사실을.
아, 그 비난은 너무나 정당했다.
오벨리아는 자신의 선택을 매순간 잊지 않았다.
그로 인한 결과까지도.
그녀는 손에 칼만 들지 않았다 뿐이지, 알렉산드로를 황위에 올리기로 결심한 때부터 순간순간의 결정으로 많은 이들의 목숨을 좌지우지해 왔다.
“그런 네가, 제 소중한 사람들은 그 목숨이 안타까워 어쩔 줄 모르며 복수를 하겠다고 날뛰는 것부터가 참 뻔뻔한 일이지.”
오벨리아의 행동을 돌려주듯이, 에크하르트의 말도 그녀의 마음은 단 한 치도 고려하지 않은 채였다.
그렇지만 오벨리아는 이 역시도 정당하다고 느꼈다.
아아, 그래.
제 손에서 결정되어 스러진 목숨들을 생각하면, 사실 그녀에게는 복수할 자격 따위 없었다.
설령 오벨리아가 아그네스 같은 이들을 가엾게 여겨 거두고, 백성들을 위한 선행을 멈추지 않았다고 해도 마찬가지였다.
죄악은 선행으로 지워지는 것이 아니니까.
“어쩜 이렇게, 뻔뻔하기 그지없는지.”
에크하르트의 혀끝에 매달린 칼날이 사정없이 오벨리아를 난도질했다.
일부러 잊고 있던 수치가 그녀를 사로잡았다.
“그래, 네 말대로 지금 네 움직임을 제한하는 것은 그다지 좋은 선택이 아니지.”
아무 말도 꺼내지 못하는 오벨리아를 보며 마침내 에크하르트가 그녀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지만, 어차피 내가 허락하지 않으면 무언가를 할 수도 없는 게 현재 네 위치 아니던가?”
오벨리아는 에크하르트가 일리어스에게 씌워진 혐의에 대하여 생각보다 더 많이 분노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아마도 에크하르트가 후회할 말이, 그의 입에서 끊임없이 쏟아졌기 때문이다.
“너도 알다시피, 네가 없어도 어차피 난 복수를 완성할 거다.”
에크하르트의 분노는 무너진 둑에서 쏟아지는 홍수였다.
오벨리아가 곧 죽을 시한부라는 사실이, 그녀의 선택에서 독약 병을 건넨 사람이 그라는 점이 여태껏 에크하르트의 분노를 막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하여 그 분노가 사라졌을 리는 없었다.
그러니 둑이 무너지는 순간 분노라는 물이 넘쳐흐르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아니, 오히려 참고 담아 두었던 분노였기에 더욱 격할 수밖에 없었다.
에크하르트가 오벨리아를 가엾게 여겼던 마음, 그녀에게 느꼈던 동질감, 모든 것을 잃은 자에 대한 안쓰러움.
그 모든 것들이, 에크하르트가 오벨리아가 한 일에 대하여 또 다른 사실을 깨달은 순간 그에게 더 큰 배신감을 만들었기 때문이다.
설령 그 사실이 오해라고 해도, 에크하르트는 그렇게 믿을 수 없을 테니 남은 결과는 분노뿐이었다.
“그러니까 이번에도 네가 죽어 버렸을 때를 생각하면 그만이야. 그게 믿지도 않는 상대한테 일을 맡기는 것보다 나아.”
오벨리아는 죽는다.
에크하르트의 분노가 그로 하여금 이 사실을 받아들이게 했다.
그래서 에크하르트는 더 이상 그녀의 죽음 앞에서도 흔들리지 않았다.
그게 오벨리아에게 와 닿았다.
아, 이제 그녀의 죽음을 신경 써 줄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러니까 얌전히 지내. 허튼짓하지 말고.”
에크하르트가 경고했다.
오벨리아는 그에게 어떤 관계도 바라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
오벨리아와 에크하르트는 같은 편임을 밝힌 이후, 종종 남들에게 그들이 연인처럼 보이기 위한 행동을 했다.
두 사람의 사이가 가까워 보일수록 좋았기 때문이다.
에크하르트와 오벨리아의 견고한 결혼이 그의 유일한 흠인 정통성을 보완하고 동시에 그녀의 발언에 힘을 실어 줄 테니까.
전 대공의 진짜 딸과 전 대공이 애정을 쏟으며 키운 양아들.
그들이 서로 사랑에 빠지기까지 했다면 완벽한 같은 편으로 보이기에 딱 좋았다.
제일 미심쩍지만, 제일 또 믿음이 가는 것이 인간의 행동을 불가사해하게 만드는 사랑이란 두 단어가 아니던가.
그리하여 오벨리아와 에크하르트는 함께 힐켄테데 성의 정원을 산책하고 있었다.
물론 우습게도, 나란히 팔짱을 끼고는 있으나 단 한 치도 서로 믿거나 의지하지는 않고 있지만 말이다.
“대공 전하를 뵙습니다.”
“대공 전하! …오, 벨리아 님.”
그리고 그곳에서 오벨리아와 에크하르트는 레베카와 에필로나 원로를 마주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