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화. 시작도 되지 못할 무언가(7)
에필로나 원로가 정중히 인사했다.
그에 반해 레베카는 누가 봐도 사랑에 들뜬 사람다웠다.
그녀는 에크하르트를 보며 반색하더니, 그 옆의 오벨리아를 보고는 곧 떨떠름한 표정으로 바뀌었다.
“정말 사랑하시는 것도 아니면서 정말 열심히도 붙어 다니시네요.”
그리고 오벨리아나 에크하르트가 어떤 말을 꺼내기도 전에, 레베카의 빈정거리는 소리가 먼저 들려왔다.
레베카의 시선은 오벨리아를 향해 있었다.
그 어조가 마치, 바쁜 에크하르트를 오벨리아가 일방적으로 귀찮게 군다는 것만 같았다.
그러나 그에 대하여 오벨리아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첫사랑에 눈이 가려진 이들이야 어련히 다들 저러는 법 아니겠는가.
솔직한 말로는 레베카가 저렇게 행동해 봤자 오벨리아에게 크게 위협이 될 것도 없었다.
그러니 굳이 크게 반응할 필요 무어 있겠는가.
게다가 한편으로는 곧 에크하르트와의 거짓 관계조차 사라질 자신이, 미래의 대공비가 될지도 모를 레베카와 그의 관계를 훼방 놔서는 안 된다는 생각도 새삼 들었다.
갑작스러운 생각의 흐름이었으나, 그만큼이나 오벨리아가 상당히 위축되어 있다는 반증이었다.
순간적으로 오벨리아가 아무 말도 하지 않자 네 사람 사이에 싸한 침묵이 맴돌았다.
처음 봤던 날과 다르게 반박하지 않는 오벨리아로 인해 레베카는 당황했고, 에크하르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 어색함 속에서 에필로나 원로가 괜스레 제 손녀를 타박했다.
“레베카, 오벨리아 님께 무슨 무례냐.”
크게 의미는 없는 행동이었다.
그 말투 속에 진실로 자신의 손녀를 탓하는 느낌은 없었으니까.
하긴, 에필로나 장로도 레베카를 힐켄테데의 대공비로 만들 생각이 없었더라면 원로회에서 그토록 순순히 에크하르트의 편을 들지는 않았으리라.
“죄송합니다, 오벨리아 님. 제 손녀가 철이 없어 그렇습니다.”
에필로나 원로가 레베카를 대신해 사과했다.
누가 봐도 원로는 자신의 손녀를 사랑했다.
오벨리아의 시녀가, 기사가, 오빠가 그리고 아버지가 한결같이 그녀를 사랑해줬듯이.
그래서 오벨리아는 기분이 이상해졌다.
에크하르트의 에스코트를 받느라 그의 팔을 붙잡은 손에 힘이 들어간 것은 무의식적인 일이었다.
오벨리아에게는 더 이상 아무것도 없었다.
그냥, 그래서 무언가라도 붙잡고 싶었을 뿐이었다.
“…오벨리아.”
에크하르트가 반사적으로 오벨리아를 불렀다.
그녀가 잡은 팔이 아파서는 아니었다.
애석하게도 그는 레베카를 향한 오벨리아의 부러움을 알아차렸다.
그러나 곧바로 에크하르트의 미간이 미미하게 찌푸려졌다.
반사적으로 오벨리아를 부른 것도, 그녀의 감정을 알아챈 것도 행동하고 나니 마음에 들지 않았다.
“아….”
자신을 부르는 소리에 고개를 들어보니 오벨리아는 문득 에크하르트와 시선을 마주쳤다.
자신을 보는 눈에서 그녀는 제가 에크하르트에게 또 들켰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게 너무 낯이 뜨거워 어쩔 수가 없었다.
자신은 지금까지 복수를 하겠다는 생각 하나로 에크하르트의 감정은 고려하지 않은 채 뻔뻔하게 굴어놓고, 정작 그의 앞에서 제 감정을 들켰다는 게.
마치, 괜히 에크하르트의 동정심을 유발한 것 같지 않은가.
오벨리아도 알았다.
에크하르트의 분노는 사라졌던 게 아니라, 그의 올곧음과 양심 그리고 연민에 밀려 드러나지 못했을 뿐이라는 것을.
조그만 자극과 불신에도 그의 분노가 드러나는 게 그 증거였다.
그 분노를 마주하고 나니, 에크하르트의 말대로 이 이상으로 뻔뻔하기가 힘들었다.
그러니까 최소한으로 양심이 있다면 오벨리아는 감히 그의 앞에서 동정심을 자극하면 안 되는 것이었다.
“괜찮아요, 에필로나 원로.”
그래서 오벨리아는 홱 고개를 돌려 에크하르트를 외면했다.
분노에 분노를 더하고서도 자신을 동정하려 드는 이 남자를 더는 갈등하게 만들고 싶지 않았다.
에크하르트는 분노를 토해냈을 때처럼, 마음 편하게 그녀를 미워할 수 있어야만 했다.
좀 더 솔직하게 말하자면 비겁하게도 오벨리아는 에크하르트가 제게 등을 보이던 순간의 그 홀로 남은 기분을 다시 느끼고 싶지 않았다.
어차피 그는 그녀에게 돌아설 수밖에 없는 사람이었으므로.
“철이 없을 나이는 지났을 텐데.”
그러나 돌연, 에크하르트가 레베카를 향한 말을 꺼냈다.
오벨리아의 괜찮다는 말 이후, 그의 미간은 아까보다도 더 찌푸려져 있었다.
오벨리아가 놀라 다시 에크하르트를 쳐다봤다.
왜 그가 갑자기 또 자신을 옹호하려 드는지 알 수 없었다.
오벨리아에게 그토록 분노했던 에크하르트가 아니었던가.
정말이지, 그녀는 좀처럼 그의 마음을 종잡을 수 없었다.
“에필로나 원로, 내가 그간 그대를 너무 편안하게 대한 모양이지.”
하지만 한 번 입을 뗀 에크하르트는 레베카의 태도를 방관하지 않았다.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에필로나 원로는 뜬금없어 보이는 에크하르트의 말에 당황한 기색이었다.
“원로, 언제부터 북부에서 다른 자들이 대공비와 내 허락 없이 우리 앞에서 입을 열어도 괜찮았지?”
힐켄테데를 두고 북부의 황제라고 하는 것은 실제로 반 이상 그저 하는 말이 아니었다.
오히려 힐켄테데가 가진 북부에서의 위상은 수도로 말이 퍼지며 축소된 면도 있었다.
그러니까 에크하르트가 평소에 쓸데없는 인사치레를 싫어하지만 않았더라면, 에필로나 원로일지라도 감히 대공가 사람들의 담소를 방해할 수 없었다는 이야기였다.
그런데 레베카는 심지어 힐켄테데에 대한 인사도 없이, 그들의 허락도 받지 않고 먼저 말을 꺼냈다.
에크하르트는 그 점을 정확히 지적하고 있었다.
“죄송합니다, 전하. 허락만 해 주신다면 지금 당장 돌아가 제 손녀를 다시 교육하도록….”
변명할 말이 없었다.
그것을 깨달은 에필로나 장로가 고개를 숙여 사죄하려던 때였다.
“저 사람을 진심으로 아끼시는 거예요?”
“레베카!”
레베카가 불쑥 끼어들었다.
에필로나 원로가 손녀를 혼내듯이 목소리를 높였다.
그녀의 눈가가 울 듯이 발갛게 달아올라 있었다.
“아니면 혹시….”
그녀를 특별히 신경 쓰고 계시나요?
레베카가 그렇게 묻지 못한 것은 오벨리아의 말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어차피 에크하르트나 나 같은 사람들에게 사랑은 사치야.’
오벨리아가 필요에 의해서만 에크하르트를 대하고 있다면, 오벨리아의 앞에서 그의 마음을 까발리는 것은 해서는 안 될 짓이니까.
레베카는 오랫동안 에크하르트를 짝사랑해 왔다.
그래서 오벨리아를 바라보는 그의 눈이 다른 사람을 대할 때와 전혀 다르다는 것을 알아버렸다.
그것이 레베카를 울고 싶게 했다.
“오늘은 이만하고 돌아가는 게 좋겠어, 에필로나 영애.”
그 분위기를 견디지 못한 것은 오벨리아였다.
에크하르트의 행동은 지극히 그녀를 당황하게 했고 레베카는 자꾸만 그런 상황을 이어지게 만들었다.
오벨리아는 이 상황이 끝나기를 바랐다.
“그래, 레베카. 오늘은 시간이 늦었으니 돌아가자꾸나.”
에필로나 원로는 안도한 기색이었다.
제 손녀가 에크하르트의 경고도 듣지 않고 더 입을 열었다가 화를 당할까 염려되던 차였다.
그런데 오벨리아가 나서서 상황을 일단락시켜 주니, 그로서는 당연히 다행인 셈이었다.
그러나 레베카는 오히려 오벨리아의 그 말에 무언가 대단히 못마땅한 듯 고개를 홱 돌려 그녀를 쳐다봤다.
레베카의 입술이 파르르 떨렸다.
무슨 말이라도 쏟아내고 싶은 모양새였다.
“오벨리아 님, 요청이 있어요.”
그러나 마침내 레베카의 입에서 어떤 말이 나왔을 때, 그것은 오벨리아조차 가히 놀라게 했다.
“오벨리아 님의 시녀가 되게 해 주세요.”
잠시간 정원에 싸한 바람이 불었다.
그것이 저물어가는 태양 탓인지, 방금 뜬금없이 내뱉어진 레베카의 말 탓인지 알 수 없었다.
“그게 무슨 소리냐, 레베카!”
잠깐의 정적이 깨지고 에필로나 원로가 경악하여 외쳤다.
객관적으로 보자면 북부에서 대공비의 시녀 자리는 수도에서 황후의 시녀가 되는 것만큼 영광된 일이었다.
그러나 제 손녀를 대공비의 자리에 앉힐 생각에 가득 차 있던 에필로나 원로에게는 당연히도 마땅치 않은 자리였을 것이다.
“…좋아.”
그러나 그 자리의 사람들을 더욱 당황시킨 것은 오벨리아였다.
잠시간 생각을 하는 듯 침묵하던 오벨리아의 입에서 나온 대답이 단호한 긍정이었으니까.
생각해 본다는 말도 아니고 단번에 좋다고 할 줄이야.
아무도 그녀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 수 없었다.
“레베카….”
당사자인 대공비에 이어 대공까지 허락하겠다는데, 에필로나 원로가 인제 와서 레베카의 말을 돌이킬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결국 그가 한숨을 삼키며 오벨리아에게 고개를 숙였다.
“제 손녀를 잘 부탁드립니다, 오벨리아 님.”
예비 대공비를 대공비 전하라고 부르지 않은 것은 에필로나 원로의 마지막 자존심일 터였다.
그쯤이야 상관없었다.
그래서 오벨리아는 우아하게 미소할 따름이었다.
그 모습이 마치 관대하고 이해심 많은 승리자 같았다.
***
산책에서 돌아온 이후, 오벨리아는 에크하르트에게 묻고 싶었다.
왜 갑자기 자신의 편을 들었는지.
그러나 그녀가 좀처럼 조심스러워 말을 꺼내지 못하고 있을 때, 그가 먼저 말을 내뱉었다.
“두 번 다시 오늘과 같이 행동하지 마.”
에크하르트의 말투는 마치 경고 같았다.
“오벨리아, 너는 대공비가 되어야 한다는 걸 잊은 건가? 힐켄테데의 사람은 황제를 제외한 누구에게도 굽히지 않아.”
정확히 말하자면 황제에게도 쉬이 굽히는 법이 없는 게 힐켄테데였다.
“네가 어떤 말을 듣고 다니든, 그건 내 알 바 아니지만.”
에크하르트가 짜증스럽게 말했다.
“힐켄테데의 이름을 달았으면 힐켄테데답게 행동해.”
에크하르트는 오벨리아 쪽은 쳐다보지도 않은 채로, 무엇이 그렇게 마음에 안 드는지 제 머리칼을 거친 손길로 쓸어올렸다.
그녀는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 망설였다.
그의 말에는 정확히 어떻게 행동해야 할지 그 내용은 쏙 빠져 있었기 때문이다.
“알겠어?”
그러나 오벨리아가 말이 없자, 에크하르트가 그녀를 휙 돌아보며 대답을 강요했다.
결국 오벨리아가 한숨을 삼키며 물었다.
“그러니까, 정확히 뭘 어떻게 하라는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