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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한부 폐태자비는 살아있다-25화 (25/136)

25화. 변주(1)

그는 오벨리아가 갑자기 기죽은 듯 행동하는 것도, 무례를 참는 것도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렇지만 스스로의 생각을 되새겨 보니, 그건 마치 자신이 그녀를 신경 쓰는 것만 같았다.

에크하르트는 조금 전 제가 했던 말과 행동이 짜증스러워졌다.

“네가 알아서 힐켄테데답게 행동해. 힐켄테데의 이름에 폐 끼치지 말란 소리야.”

그래서 에크하르트는 신경질적으로 말하고는 오벨리아를 두고 그 자리를 벗어나 버렸다.

저 눈치 빠른 여자가 자신의 생각들을 알아차리지 않길 바랐다.

에크하르트가 긴 다리로 성큼성큼 걸어가자, 그는 금세 오벨리아에게서 멀어졌다.

그녀가 순간 멍하니 에크하르트의 뒷모습을 바라봤다.

레베카와 에필로나 원로의 앞에서는 오벨리아를 옹호하더니, 둘만 남자 신경질적으로 돌변한 에크하르트를 보고 있자니 조금 어이가 없었다.

그의 태도가 하도 휙휙 돌변하여 정신이 살짝 어지러운 것도 같았다.

게다가 말을 얼버무리고 가 버린 에크하르트 때문에 결론을 듣지 못하여 찝찝하기도 했다.

‘…사이가 좋아 보이는 척을 하느라 내 편을 들어 준 건가?’

결국 오벨리아가 낼 수 있는 에크하르트의 행동에 대한 결론은 그 정도가 전부였다.

***

오벨리아가 잠시 위축되었다고 한들, 오벨리아는 오벨리아였다.

그녀는 레베카에게서 쓸모를 발견했다.

그래서 다음 날부터 레베카는 오벨리아의 시녀로 배정되었다.

오벨리아가 위축된 것과는 별개로 그녀는 자신이 해야만 할 일을 자신의 감정이나 개인적 일과 연관 짓지 않는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레베카에게는 원로의 손녀라는 특수한 위치가 있었으니, 사실상 시중을 든다기보다는 오벨리아의 곁에서 간단한 치장이나 돕는 정도의 역할이었다.

그러나 에크하르트 탓에 당분간 오벨리아가 외출할 일도 없었기에 실상 레베카가 할 일은 전혀 없는 셈이었다.

그리하여 레베카는 오벨리아의 곁에 멀뚱히 서 있거나 앉아 있을 뿐이었다.

“왜 저를 시녀로 들이겠다고 하셨어요?”

그녀는 한낮이 되자 결국 참지 못하고 오벨리아에게 물었다.

“그러면 너는 왜 내 시녀가 되겠다고 했니?”

하지만 오벨리아는 순순히 답을 내어주지 않았다.

도리어 그녀가 되묻자, 레베카의 표정이 찌푸려졌다.

그렇지만 레베카도 일전의 대치로 자신이 오벨리아와의 말싸움에서 이길 확률이 낮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결국 먼저 속내를 터놓은 것은 레베카였다.

“당신이 나보다 나은 점이 대체 뭐길래, 에크하르트 님이 당신을 선택하셨는지 궁금해서요.”

좋게 말하자면 솔직했고 냉정하게 말하자면 무례했다.

그러나 레베카의 치기 어린 행동에 이상하리만치 유한 오벨리아는 부드러운 어투로 그 말투를 지적했다.

“그게 궁금하다면 말하는 방법부터 고치렴. 무례하구나.”

아이를 훈계하듯 상냥한 어조였다.

오히려 그런 오벨리아의 행동에 뒤늦게 수치를 느꼈던지, 레베카의 얼굴이 달아올랐다.

“…아직 나보다 나은 점이라고는 힐켄테데의 핏줄이라는 것밖에 없는 당신한테 예의 차리기 자존심 상해서 그런 거거든요?”

“그렇다면 그것도 고쳐. 사교계에서 무례하게 굴어 봤자 그건 네 흠일 뿐이니.”

“북부에서 누가 감히 나한테….”

연이은 오벨리아의 지적에 레베카가 고개를 빳빳이 치켜들었다.

그러면서도 레베카의 뺨이 달아오른 것이, 그녀도 제 행동이 막무가내라는 것을 알아 부끄러운 모양이었다.

“그래서 내가 저번에 네 선물을 깨 버렸어도, 네가 이렇다 할 말을 못 한 거란다.”

마침내 레베카의 입이 다물렸다.

레베카의 말대로, 북부에서 에필로나 원로의 사랑받는 손녀에게 감히 흠을 잡을 인물은 없었다.

오벨리아가 힐켄테데의 딸로서 나타나기 전까지는 그랬다.

솔직히 말해서 레베카의 선물을 깨 버린 자가 오벨리아만 아니었더라면, 그녀는 그날 그렇게 가만히 넘어가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레베카는 참아야만 했다.

왜냐하면 오벨리아는 힐켄테데의 딸이기 때문이다.

즉, 오벨리아의 말은 신분으로 찍어 누르는 방도의 한계를 보여 주고 있었다.

“…그럼 뭐 당신은 그 상황에서 어떻게 했을 건데요?”

레베카가 어린아이같이 뚱한 얼굴로 물었다.

그러자 오벨리아가 또다시 그녀를 지적했다.

“호칭부터 똑바로 해.”

공격적이지는 않되, 강경한 말투였다.

레베카가 움찔했다.

어쩐지 괜스레 반항하기가 조금 전보다 더 어려웠다.

“…오벨리아 님이라면 어떻게 하셨을 건데요?”

아까보다 더 긴 침묵 끝에 레베카가 결국 기어가는 듯한 작은 목소리로 물었다.

오벨리아가 작게 웃으며 드디어 대답을 내놓았다.

“나였다면 나머지 다른 잔 하나도 깨 버렸을 거야. 잔은 얼마든지 ‘실수’로 깨어질 수 있는 거잖아?”

그날, 오벨리아는 잔을 깨트리고 그것을 실수라고 표현했다.

누구나 할 수 있는 실수.

그러니 선물을 가져온 레베카라고 하지 못할 이유는 없었다.

그렇게 하면 선물을 주기 싫다는 의도도 전달할 수 있었고, 기껏 고른 선물이 창고에 처박히는 굴욕도 피할 수 있었다.

레베카는 예상 외의 대답에 오벨리아를 넋 놓고 바라봤다.

첫 만남부터 잔을 깨 버리기는 했어도, 오벨리아에게는 특유의 기품이 있었다.

그래서 고상한 대답을 내놓으리라 생각했는데 다소 과격한 방법이 튀어나온 것이다.

“…그, 렇지만 오벨리아 님은 제가 어떤 말을 할 조금의 틈도 주지 않으셨잖아요.”

레베카의 말투가 자연스레 공손해졌다.

한발 늦었으나, 오벨리아가 자신보다 한참 위라는 것을 본능적으로 느낀 탓이었다.

“맞아. 일부러 그런 거야. 그래야 네가 아무 대처도 하지 못할 테니까.”

오벨리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것을 알아차린 레베카를 기특하게 보는 눈이었다.

“사교계는 그런 거란다. 한순간 틈을 보이면 네 차례는 영원히 돌아오지 않을 거고 우위를 빼앗기게 되겠지.”

사교계에서는 작위가 높다고 해서 반드시 영향력이 크다고 할 수 없었다.

물론, 정보나 유행 같은 면에서는 부유하고 권력 있는 자들이 앞설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한 사람의 품위와 행동거지, 대처 능력, 그리고 인간관계를 보장해 줄 수는 없었다.

북부의 사교계는 폐쇄적이고 힐켄테데와 그를 위시한 가문들이 절대적이다.

그렇기에 레베카가 가문을 등에 업을 수 있었을지 몰라도, 사실상 조금만 더 커다란 사교계로 나간다면 오히려 무식하게 힘으로 찍어 누르는 것밖에 못 한다며 앞으로는 대접받아도 뒤로는 얼마든지 무시당할 가능성도 컸다.

아니, 레베카 같은 어린 영애들만 있는 사교계가 아니라 나이 지긋한 귀부인들까지 있는 사교계에 발을 들인다면 북부에서조차 그런 취급을 받으리라.

오벨리아는 어느 정도 그것을 확신했다.

“사교계에서 결국 가장 큰 영향력을 발휘하는 건 ‘인간 대 인간일 때 누가 주도권을 잡는가’야.”

오벨리아가 차분히 설명을 덧붙였다.

“높은 가문의 덕을 보기 위해 많은 이들이 접근하지만, 그게 모두 선망은 아니잖아?”

시기와 질투로 어떻게든 깎아내리려는 이들이 더 많거나, 얕잡아 보여서 정작 중요한 일에는 소외되면 사교계에서 혼자가 되는 건 순식간의 일이었다.

그것은 좋은 가문도 해결해 주기 힘들었다.

대체로 그런 일들은 뒤에서 음침하고 은밀하게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저한테 왜 이런 것들을 알려 주는 거예요?”

이쯤 되니 레베카도 모를 수 없었다.

지금 오벨리아가 가르쳐 주는 모든 것들은 레베카에게 나쁠 것이 단 하나도 없었다.

오히려 오벨리아가 이런 식으로 계속해서 많은 것들을 알려 준다면 훗날 레베카에게 정말 많은 도움이 될 게 분명했다.

레베카도 자신이 오벨리아에게 호감을 살 행동을 하지 않았다는 것쯤은 알고 있었다.

그러니 오벨리아의 행동이 미심쩍게 느껴졌다.

“좋은 질문이야.”

오벨리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오벨리아가 아무리 레베카를 나쁘게 보지 않는다고 할지라도, 애초에 그녀에게 쓸모 있는 일이 아니었더라면 애써 이런 것들을 레베카에게 가르치지 않았을 터였다.

“레베카, 너는 내게 사교술을 배워서 북부의 사교계에서 최고가 되어야만 해.”

오벨리아가 선언했다.

그러자 잠시 어안이 벙벙해져 있던 레베카가 반문했다.

“…왜요?”

“지금 네 상태로는 날 제치고 대공비가 되는 건 불가능하다는 걸 알지 않아?”

“솔직히 말해서… 오벨리아 님이라면 날 가르치지 않고 직접 사교계를 쥐어 잡을 수 있을 거 같은데요.”

사교계가 레베카의 편이 된다면 그녀가 바라는 대로 에크하르트의 옆자리에 서기에 좋은 것은 맞았다.

그러나 레베카는 그것만으로 오벨리아를 이길 수 있으리라고 생각되지 않았다.

그랬다면 오벨리아가 레베카에게 순순히 사교계를 양보할 리가 없기 때문이다.

“알다시피 내가 현재 원로들이랑 마냥 사이가 좋진 않아. 사교계까지 나서게 되면 지나치게 주목을 받겠지.”

주목을 받는 것은 두렵지 않았다.

다만, 오벨리아는 자신이 힐켄테데에 없게 되었을 때 그 구멍이 너무 커다랗지 않길 바랐다.

물론, 가장 중요한 목적은 따로 있었지만.

“그리고… 내게 사교계의 정보들을 전달해 주되, 에크하르트와 관련되지 않은 사람이 필요해.”

오벨리아에게는 그녀만의 사람이 필요했다.

이번에 에크하르트가 자신의 행동을 제한했을 때 오벨리아가 느낀 점이었다.

오벨리아와 에크하르트의 사이에는 앞으로도 쭉 나아지지 않을 최악의 문제가 있었다.

그러니까 에크하르트가 아무리 그녀를 동정한다고 해도, 그의 마음은 언제든지 틀어질 수 있었다.

오벨리아는 그럴 때마다 에크하르트에게 제 행동을 제한당할 생각 따위 추호도 없었다.

레베카는 에크하르트가 온전히 제어하기에 애매한 상대였다.

그리하여 오벨리아는 레베카를 이용하기로 했다.

“…지금 나보고 에크하르트 님 대신 오벨리아 님의 편을 들라는 거예요?”

레베카가 기가 막힌다는 듯 물었다.

당연한 일이었다.

레베카는 에크하르트를 좋아했고 오벨리아는 그녀의 연적이었다.

그런데 오벨리아를 진짜로 따르라니.

얼핏 들으면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그러나 오벨리아는 레베카가 자신의 제안을 받아들이리라 확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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