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화. 변주(2)
“에크하르트는 네가 사교계에서 두각을 드러내는 걸 바라지 않을 텐데.”
애초에 오벨리아가 나타나기 전부터 결혼 압박을 받고 있던 에크하르트였다.
그런 그가 레베카에게 사교계의 지지까지 쏠리는 것을 원할 리가 없었다.
“게다가 에필로나 원로는 네가 뭘 이루지 않아도 크게 상관하지 않아. 아니야?”
레베카의 두 입술이 꾹 다물렸다.
레베카는 에필로나 가문의 대단히 사랑받는 딸이다.
그러나 오벨리아가 알아본 바에 의하면 에필로나 가문은 레베카를 아주 예뻐했으나, 곱디곱게 키워 대공비로 만들 생각밖에 없었다.
그들이 레베카를 사랑하지 않는 건 단언컨대 아니었다.
북부는 험한 산지가 많고 추운 날씨가 지속되는 곳이었다.
그런 상황에서 북부의 가장 커다란 자원은 사람이었고, 그들을 용병으로 보내기 시작한 것이 북부 발전의 시작이었다.
그리하여 무력을 가장 주된 기반으로 하여 커 온 탓에 북부에는 아직까지도 무력을 숭상하고 그 외의 것들을 경외하는 자들이 있었다.
그런 북부에서 에필로나 가문은 뼛속까지 기사 가문이었을 뿐이다.
그리고 레베카는 검에 재능이 없었다.
그리하여 에필로나 가문은 무력이 없는 저들의 귀한 아가씨가 고생하지 않고 가장 좋은 삶을 누릴 방법은 대공비가 되는 것뿐이라고 여긴 것이었다.
레베카가 사교계에서 집안을 믿고 편하게 굴어온 것 또한 그 탓이 컸다.
에필로나 가문은 사교계에서조차도 그녀가 진흙탕을 구르지 않길 바랐다.
그야말로 레베카가 온실 속 화초처럼 자라길 바란 셈이었다.
“레베카, 너는 그 삶이 마음에 들어?”
레베카라는 존재를 안 순간부터 오벨리아는 그녀의 환경을 조사했다.
레베카를 둘러싼 환경은 좋게 말하자면 평온했고 적나라하게 말하자면 안일했다.
에필로나 가문은 그녀를 온실에서 단 한 발자국도 움직일 필요가 없는 화초로 키웠다.
그런데 레베카는 직접 오벨리아에게 찾아왔다.
에필로나 원로나 가문에 떼를 써서 그들이 움직이도록 하는 게 아니라, 레베카 스스로, 직접.
오벨리아는 거기에서 레베카의 어떤 가능성을 보았다.
그게 지금 그녀가 레베카에게 이런 질문을 한 이유였다.
“에필로나 가문이나 원로 때문이 아니라, 네 힘이 있어야 진짜 네가 원하는 대로 할 수 있어.”
생각해 보면 오벨리아가 알렉산드로에게 절실했던 것도 당연한 일이었다.
그녀가 8년간 이룬 모든 것들은 알렉산드로의 피와 살이 되었으므로.
그를 황제로 만드는 것.
8년 동안 그것만이 오벨리아의 목표였다.
그러니까 이를테면 알렉산드로는 오벨리아가 8년간 단 하루도 쉬지 않고 피땀을 흘려 빚은 작품인 셈이었다.
그러니 어떻게 그녀가 그를 대단히 사랑하지 않고 배기겠는가.
“만약 네가 북부에서 사교계의 주인이 된 뒤에도 오직 에크하르트의 옆자리만을 원한다면… 나도 대공비의 자리에 대해서 다시 생각해 볼게.”
어쩌면 오벨리아가 레베카에게 기회를 주는 것 또한, 이와 같은 이유일지도 몰랐다.
“물론, 이혼할지 파혼할지는 네 능력에 달렸겠지만.”
“…지금, 에크하르트 님에 대한 내 사랑을 의심하는 거예요?”
한층 차분해져 있던 레베카의 목소리가 돌연 격앙되었다.
에크하르트와 오벨리아가 이혼할지 파혼할지는 레베카에게 중요해 보이지 않았다.
레베카는 자신의 마음을 두고 오벨리아가 한 말에 대하여 화를 내고 있었다.
그러나 오벨리아는 부정하지도 사과하지도 않았다.
오벨리아는 지금과 달리 레베카의 앞에 많은 선택지가 놓였을 때, 레베카가 여전히 지금과 같은 선택을 할지 궁금했다.
“네 사랑이 가짜라고 생각하는 건 아니야. 그렇지만, 사랑보다 소중한 게 생길 수도 있는 거 아니겠어?”
오벨리아는 자신이 어딘가 비틀려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이전이었다면 그녀는 사람의 마음을 온전히 믿었을 터였다.
이런 식으로 시험하려고 하지 않을 것이었다.
그러나 오벨리아는 변했다.
레베카에게는 애석하게도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윽, 내가 반드시 증명할 거예요!”
자신이 화를 내도 오벨리아가 침착하자, 그에 욱한 레베카가 호기롭게 소리쳤다.
오벨리아의 도발이 완벽히 먹혀들어, 결국 레베카가 오벨리아의 정보원이 된 셈이었다.
“그래, 열심히 배워 봐.”
결국 이번에도 오벨리아는 제 뜻을 이뤘다.
그렇지만 어쩐지 썩 유쾌하지만은 않았다.
***
고작 일주일이었다.
다만 누군가에게는 고작이었으나, 오벨리아에게는 아니었을 뿐이다.
그녀는 에크하르트의 말대로 일주일을 마냥 쉴 생각 따위 처음부터 없었다.
오벨리아는 바로 다음 날부터 레베카의 교육에 들어갔다.
그리고 동시에 레베카가 현재 알고 있는 사교계 현황들에 대해 파악했다.
오벨리아가 북부의 사교계까지 손에 쥐려는 이유는 간단했다.
아무리 힐켄테데일지라도, 황실을 대적하려면 북부의 모든 것이 힐켄테데와 함께해야 하기 때문이다.
정치적 권력도, 칼날이 오가는 무력도 없는 사교계는 일견 힘이 없어 보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사람의 귀와 혀는 생각보다 많은 일을 하는 법이었다.
“에필로나 영애가 네 시중을 제대로 들고 있는 건 맞나?”
그리고 당연하게도, 에크하르트는 호기롭게 오벨리아의 시녀가 되길 자처해 놓고 3일이 지나도록 이렇다고 할 행동 없이 조용히 시녀 생활을 하는 레베카의 모습에 의문을 품었다.
“애초에 시중을 들게 하려고 들인 게 아닌 건 알잖아. 시중들 시녀가 필요했으면 원로의 손녀가 아니라 다른 영애를 시녀로 삼았겠지.”
오벨리아는 굳이 에크하르트의 말에 무언가를 숨기려 들지 않았다.
그가 미간을 찌푸리며 말을 이었다.
“에필로나 영애를 데리고 무얼 하려는 거지?”
오벨리아가 레베카의 말을 듣고 정리해 둔 서류를 에크하르트에게 내밀었다.
에크하르트가 오벨리아에게 강제로 쉬라고는 했으나, 그는 그녀를 감시하지는 않았다.
그렇기에 오벨리아가 따로 서류를 작성하는 건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게다가 레베카의 이야기를 듣는 동안 알게 되었는데, 그녀는 상당히 기억력이 좋았다.
지금에야 레베카가 사교계에 미치는 영향력이 미미하여 쓸 만한 정보의 양이 얼마 안 된다지만, 그녀를 키워 놓고 나면 정말 큰 도움이 될 터였다.
“그간 힐켄테데에는 안주인이 없어서 사교계에 신경 쓰지 못했잖아. 우리의 적이 황실인 이상, 북부의 사교계도 놓칠 수는 없지.”
아무리 유능한 에크하르트라고 할지라도 모든 게 전소해 버린 힐켄테데를 재건하면서 사교계까지 신경 쓸 수는 없었다.
힐켄테데의 안주인이 없는 탓에 내정까지도 그가 전부 맡아 봐야 했으니 그 일상이 오죽 바빴겠는가.
심지어 에크하르트는 천성이 사교적인 사람도 아니었으니, 힐켄테데는 자연스레 사교계와 멀어질 수밖에 없었다.
귀족들의 사교계는 단순히 친목을 도모하는 자리가 아니다.
친근하게 지내는 무리 안에서는 반드시 그들끼리만 알고 있는 정보가 오간다.
직접 누군가를 시켜 발품을 팔게 해야 얻을 수 있는 정보를 타인의 입을 통해 쉽게 얻을 수 있는 것이다.
괜히 귀족들이 사교계에서 명망 높은 상대를 집안에 들이고자 하는 게 아니었다.
“…아무것도 하지 말라고 했을 텐데?”
에크하르트의 눈매가 매서워졌다.
그의 입장에서는 기껏 오벨리아의 행동들을 막아 놨더니 그녀가 다른 활로를 찾아 버린 셈이니 민감하게 반응할 만도 했다.
오벨리아가 레베카와 무슨 거래를 했는지 에크하르트는 알 수 없었다.
하지만 그는 확신했다.
오벨리아는 레베카를 자신의 사람으로 쓸 자신이 있기 때문에 레베카를 선택했으리라.
“에필로나 영애는 내가 부리는 사람도 아니고, 그러니 나는 네 행동을 막을 수도 없지.”
에크하르트가 오벨리아에게 다가갔다.
“에필로나 영애가 자신을 네 시녀로 삼아 달라고 청한 그 짧은 순간에 넌 이미 여기까지 계산했겠군.”
에크하르트는 오벨리아가 앉은 의자의 양 팔걸이를 손으로 잡은 채 그녀를 내려다봤다.
똑바로 마주쳐 오는 오벨리아의 시선은 그의 말을 부정하지 않았다.
“하, 어디까지 네 마음대로 해야 만족할 거지?”
에크하르트는 불쾌함에 가득 찬 헛웃음을 지었다.
오벨리아는 첫 만남부터 그랬다.
그녀는 어떻게든 그를 이기고야 만다.
“날 통제하려 들지 마, 에크하르트.”
오벨리아는 이번에는 입을 다물지 않았다.
“당신이 허락하지 않으면 내가 아무것도 할 수 없다고 했지.”
사실 에크하르트가 분노하여 그녀의 행동을 제한하려 들 때, 그때 해야 했던 말이었다.
“지금도 그래 보여?”
에크하르트가 이를 악물었다.
어쩌면 그도 처음부터 알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오벨리아를 통제할 수 없다는 사실을.
“당신이 나보고 뻔뻔하다고 했지. 맞아, 나 뻔뻔해. 그래서 나는 내 복수가 더 중요해.”
말을 내뱉을수록 오벨리아는 자신의 말에 더 확신을 얻었다.
복수에 감정은 중요하지 않다.
그게 에크하르트의 것이든, 그녀의 것이든 마찬가지였다.
자신이 죽었을 때를 대비하여 에크하르트가 복수를 끝마칠 수 있도록 준비해 두었으나, 그녀는 가능하다면 살아생전에 알렉산드로가 피눈물을 흘리는 모습을 보고 싶었다.
그게 오벨리아의 의무였으니까.
그녀는 에크하르트의 이해도, 동정심도 모두 포기할 수 있었다.
거기까지 받고자 할 만큼 뻔뻔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복수는 그럴 수 없었다.
복수에 방해가 된다면, 설령 오벨리아의 잘못으로 인해 고통 받는 한 남자의 분노 앞에서조차 그녀는 몰염치해질 수 있었다.
“…너는, 한 번쯤은 날 이해할 생각이 없는 건가?”
그리고 그것은 에크하르트의 분노에 다시 불을 붙였다.
그는 자신의 부모와 사람들을 모조리 잃게 만든 일을 알면서도 방관한 여자에게까지 동정심을 품을 줄 아는 사람이었다.
그러나 오벨리아의 태도는 극도로 에크하르트와 상반되어 있었다.
“고작 일주일이야. 그런데 너는 그것도 참지 못해? 내가 널 얼마나 참아 주고 있는데…!”
결국 에크하르트의 화가 또 한 번 폭발한 것도 당연한 일이었다.
“당신은 날 참아 주지 않아도 돼.”
그리고 돌아온 오벨리아의 대답은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흘러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