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화. 변주(3)
“화가 나면 내게 화를 내고, 내 잘못을 치죄하고 싶다면 그렇게 해.”
오벨리아의 태도는 마치 자신을 제 삼자로 여기는 것만 같았다.
그만큼이나 에크하르트가 그녀를 어떻게 취급하든 괜찮다는 듯 행동하고 있었다.
“단, 복수에 방해가 되는 행동은 하지 마.”
그리고 이어지는 오벨리아의 말이, 그녀에게 중요한 것은 오직 복수뿐임을 증명했다.
정말이지, 오벨리아는 살아 있기만 한다면 자신이 어떻게 되든 상관없었다.
그렇지 않았다면 바실리스크의 독을 스스로 집어먹지도 않았으리라.
“……참, 일관적인 태도야.”
한참을 침묵하던 에크하르트가 허탈한 목소리로 말했다.
오벨리아는 복수를 위한 인형이었다.
그는 그렇게 느꼈다.
그래서 에크하르트는 순간적으로 분노도 잃어버렸다.
그가 화를 내든, 배신감을 느끼든 오벨리아에게는 그런 것 따위 중요하지 않으리라.
그런데 분노해 봤자 무엇하겠는가.
벽에 대고 말하는 것과 다를 바가 없을 텐데.
“그래, 네 멋대로 해.”
에크하르트의 말은 허락이 아니었다.
그건 포기였다.
인간관계는 차라리 부딪히고 꼬이고 틀어져야만 한다.
적어도 그런 것은 관계라고 부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포기하는 건 정말 아무것도 아닌 사이가 되는 셈이다.
오벨리아가 쓴웃음을 삼켰다.
아, 정말이지 완벽하게 그녀가 바라던 일이었다.
***
오벨리아는 그날 이후 다시 대외 활동을 시작했다.
에크하르트와 그녀는 이제 계획을 세우거나 앞으로의 일을 의논할 때를 제외하고는 말 한마디 섞지 않았다.
정말로 아무 사이가 아닌 것처럼.
그리고 그런 두 사람의 사정과는 상관없이 힐켄테데 저택 내부는 소란스러웠다.
본격적으로 오벨리아와 에크하르트의 결혼 준비가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처음으로 프렐런트가 개인적으로 오벨리아를 찾아왔다.
“대공비 전하를 뵙습니다.”
프렐런트는 오벨리아가 아직 결혼식을 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그녀를 대공비로 대우했다.
힐켄테데의 핏줄인 오벨리아 외에는 그 누구도 대공비로 생각지도 않는 태도였다.
오벨리아는 프렐런트의 그런 인사를 거절하지 않았다.
그녀가 알기로 프렐런트는 북부의 주인인 힐켄테데를 뼛속까지 숭상하는 대표적인 사람이었다.
그러니 차라리 오벨리아가 오만하게 구는 것이 프렐런트의 환상을 충족시켜 주리라 여겼다.
“고개를 들어도 좋아, 엘루미나 원로.”
오벨리아의 예상은 딱 들어맞았다.
오벨리아가 갑작스럽게 말을 놓았음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명에 고개를 든 프렐런트의 얼굴은 만족스러워 보였으니까.
“일단 앉아서 이야기하지.”
“예, 비전하.”
오벨리아가 자리를 권했다.
프렐런트가 앉자 시녀가 자연스레 차를 내왔다.
“로웰스턴이 저를 찾아왔었습니다.”
시녀가 나가고 문이 완벽히 닫히자, 프렐런트가 그제야 다시 입을 열었다.
커티스를 딱딱하게 성으로 부르는 것이 딱 프렐런트와 커티스의 사이를 드러내는 듯했다.
“커티스가?”
오벨리아는 전혀 놀라지 않은 태도로 물었다.
힐켄테데를 황실에 팔아넘겨서라도 영달을 원하던 게 커티스였다.
주인을 한 번 문 개가 기가 죽었다고 해서 충성스러워지리라고는 애초에 생각도 하지 않았다.
“예, 제게 이대로 있다가는 힐켄테데가 전부 에크하르트 님의 뜻대로만 돌아가게 될 거라며 대책을 세워야 한다고 하더군요.”
오벨리아에게 약점이 잡혀 있어서 직접 움직일 수 없으니 커티스는 프렐런트를 선동하고자 한 모양이었다.
“엘루미나 원로가 이렇게 찾아온 걸 보면 거절했다는 거겠지. 그래, 그 대책으로 무엇을 제시하던가?”
“외람되지만, 제가 모든 것을 말씀드리기 전에… 한 가지만 확인시켜 주실 수 있겠습니까?”
오벨리아가 말해 보라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처음 대화의 시작에서 모든 내용을 말하지 않았을 때부터, 조건이 있으리라 예상했다.
“저는 에크하르트 님께서 대공 자리에 머무셔도, 힐켄테데는 영원하길 바랍니다.”
프렐런트는 힐켄테데의 핏줄이 아닌 에크하르트가 힐켄테데의 모든 것을 뒤바꾸길 바라지 않았다.
그녀는 반드시 오벨리아의 핏줄이 다음 대 대공 자리에 올라야 한다고 여기는 사람이었다.
“그러니까 제게 오벨리아 님께서 대공 전하와 혼인하셔도, 그분의 뜻대로 휘둘리지 않으실 거라는 증거 하나만 보여 주십시오.”
“상당히 건방진 요구네, 프렐런트.”
오벨리아가 다리를 꼬며 불쾌한 낯을 했다.
프렐런트는 힐켄테데의 앞에 기꺼이 고개를 숙였다.
“제 무례는 얼마든지 치죄해 주셔도 좋습니다.”
물론, 표정과는 달리 오벨리아는 그다지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처음에는 프렐런트가 커티스를 몰아내려고 수를 쓰는 게 아닐까 의심도 했다.
그게 아니라 프렐런트가 단순히 힐켄테데의 핏줄에 대한 집착이 강할 뿐이라면, 오히려 그것은 그녀에게 이득이었다.
그래서 오벨리아는 뜸을 들이는 척하다가 혼인 계약서를 가져와 프렐런트의 앞에 놓아 주었다.
귀족들 간 결혼이라면 그 전에 당연하게 준비하는 것이었다.
“읽어 봐. 에크하르트와 이혼해도 힐켄테데로서의 내 권리는 온전하다는 계약이 주된 거니까.”
물론, 되도록 완벽해 보이는 결혼을 위하여 구색을 갖춘 것일 뿐, 사실상 큰 의미는 없었다.
오벨리아가 내민 혼인 계약서는 ‘오벨리아 힐켄테데와’ 에크하르트 간의 것이었으니까.
그녀의 신분 자체가 거짓인 이상 혼인 계약서 자체가 처음부터 성립이 안 되는 셈이었다.
프렐런트가 신중한 얼굴로 서류를 받아들었다.
한참을 계약서를 보던 그녀가 모두 읽고 나서야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고개를 들었다.
혼인 계약서는 전적으로 오벨리아에게 유리하게 쓰여 있었다.
어차피 에크하르트 또한 이 계약서가 효력이 없음을 알고 있기에 그렇게 써 준 것일 테지만 말이다.
“이 늙은이가 괜한 걱정을 했나 봅니다. 오벨리아 님께서 어련히 잘하고 계신 것을요.”
이제 오벨리아를 바라보는 프렐런트의 눈빛은 숫제 반짝였다.
원로들조차 어쩌지 못한 에크하르트를 휘어잡은 그녀를 두고 역시 힐켄테데의 핏줄이라 감탄하는 표정이었다.
“엘루미나 원로의 무례는 내가 특별히 이번 한 번만 넘어가 주겠어. 커티스가 뭐라고 했는지나 말해.”
오벨리아는 그쯤이야 당연하다는 듯 거만한 태도로 턱을 까닥였다.
그러자 마침내 프렐런트의 무거운 입이 열렸다.
“전 황태자비를 똑같이 닮은 여자가 힐켄테데에 있다는 사실을 황궁에 알리자고 했습니다.”
참, 사람은 변하지 않는다.
한 번 배신한 사람은 두 번도 쉬운 법이다.
오벨리아는 그게 놀랍지도 않았다.
사실 그녀는 커티스가 배신을 반복하리란 것을 알고 있었을지도 말랐다.
공식적으로 오벨리아 카테리안느는 죽은 사람이다.
그러나 사실 전 황태자비의 죽음에는 의문스러운 점이 많았다.
돌연 카테리안느 공작이 죽고 본디 후계자였던 일리어스도 실종된 것부터 해서, 황궁에서 말도 안 되게 큰불이 난 것까지 전부 그랬다.
게다가 전 황태자비의 사람이라고 할 수 있는 자들은 아무도 황궁에 남아 있지 않았으니, 조금이라도 생각이 있는 사람이라면 이상하다고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심지어 알렉산드로가 기다렸다는 듯이 아그네스 이멜리언이라는 여자를 데려와 황후로 올리려 하고 있지 않은가.
사실상 눈 가리고 아웅인 셈이었다.
그렇지만 유일하게 남은 카테리안느의 자식인 둘째 라이너스가 알렉산드로를 지지하고 있고, 오벨리아는 이미 죽은 사람이었다.
그래서 다들 모른 척 침묵하고 있는 것이었다.
무슨 일이 있었다고 한들, 이미 죽은 자가 어쩌겠느냐는 말이다.
그러나 만약 이 상황에서 오벨리아 카테리안느가 살아 돌아온다면?
알렉산드로는 당연히 그 일말의 가능성이라도 생각하기 싫을 터였다.
그것도 황실이 견제하는 힐켄테데의 내부에 오벨리아로 짐작되는 여자가 있다?
권력에 예민한 알렉산드로는 힐켄테데가 그 닮은 여자를 어떻게 이용할지 만 가지 생각으로 신경이 쓰여 절대 가만히 있지 않을 게 뻔했다.
그는 설령 오벨리아가 진짜 힐켄테데의 핏줄일지라도, 힐켄테데가 훗날 그녀를 무기로 어떻게 나올지 모른다는 이유만으로 오벨리아를 제거하려 할 수 있는 사람이었다.
커티스가 바라는 것은 그렇게 오벨리아가 사라지는 일이리라.
알렉산드로를 성군이라고만 알고 있는 세상과 달리, 힐켄테데를 팔아넘기기 위하여 그와 쉴 새 없는 뒷거래를 해 온 커티스는 어느 정도 황제의 본성을 알 테니까.
“힐켄테데 내부의 일을 황실로 빼돌리는 건 중죄이니, 오벨리아 님께서 원하신다면 제가 증언하여 로웰스턴을 원로 자리에서 끌어내리겠습니다. 죄를 물으시면….”
으레 위에 있는 자들이 그러하듯, 프렐런트는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자신이 직접 나서는 법이 없었다.
그러나 그녀는 지금 힐켄테데의 유일한 핏줄인 오벨리아를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할 수 있었다.
“아니.”
오벨리아가 프렐런트의 말을 끊었다.
그녀는 프렐런트와 생각이 달랐다.
“커티스가 황실에 사람을 보내게 놔둬.”
오벨리아가 명령했다.
프렐런트가 당황한 기색으로 오벨리아를 만류했다.
“예…? 그렇지만, 황실에서 오벨리아 님을 곤란하게 만들 겁니다.”
죽은 황태자비와 지나치게 닮은 여자.
오래전부터 힐켄테데를 견제해 온 황실은 힐켄테데를 곤란하게 하기 위해서라도, 오벨리아가 죽은 황태자비가 아니라는 사실을 증명하길 요구할지도 몰랐다.
프렐런트가 다급하게 말을 덧붙였다.
“혹시 원로들 사이 균형이 깨질까 봐 걱정되시는 거라면, 로웰스턴만 조용히 처리하실 수 있도록 제가 돕겠습니다.”
한 일파의 우두머리를 공격하면 보통 그 전체가 흔들린다.
원로들 사이의 힘이 어느 한 일파 쪽으로 치우칠 경우 귀찮아지는 것은 오벨리아와 에크하르트였다.
프렐런트는 그런 상황이 벌어지지 않도록 커티스만 조용히 처리하겠다고 말하는 것이었다.
“커티스를 끌어내리는 건 언제든 할 수 있어.”
오벨리아가 고개를 저었다.
“커티스의 행동을 막지 마. 아니, 나는 오히려 엘루미나 원로가 협조해 주었으면 좋겠어.”
프렐런트는 오벨리아의 말을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