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화. 변주(8)
물론, 오벨리아가 쓰러진 것은 거짓이었다.
그녀의 방 안, 에크하르트는 프렐런트를 은밀하게 불러들였다.
“오벨리아 님은 괜찮으십니까?”
프렐런트가 방 안으로 들어오자마자 대뜸 물었다.
예의범절을 꼬장꼬장하리만치 엄격히 여기는 그녀가 오벨리아의 혼절에는 어지간히 당황하고 놀랐던 모양이었다.
“난 아무렇지 않아. 다만….”
방문이 굳게 닫히자, 오벨리아가 몸을 일으켰다.
기절했던 그녀가 괜찮은 듯 보이자 프렐런트가 눈에 띄게 한숨을 내쉬며 안도했다.
“괜한 쇼를 한 건 아니야. 진짜 나를 노리는 자들이 있으니까.”
“그게 무슨 소리이십니까?”
프렐런트의 표정이 곧바로 다시 굳었다.
전 대공의 사망 이후, 끊긴 줄 알았던 힐켄테데의 계보가 겨우 다시 이어질 수 있게 되었다.
그런데 힐켄테데의 하나뿐인 핏줄인 오벨리아가 공격당하다니!
프렐런트는 절대 용납할 수 없었다.
“요즘 나를 감시하는 자들이 생겼어. 그런데 에크하르트가 붙여 준 기사들 덕에 아무 일도 없으니, 이제는 내가 먹을 음식에도 장난을 치더군.”
오벨리아가 시녀를 시켜 아까 회의 중 준비되었던 다과를 들고 오게 했다.
“내 어머니께서 복숭아 껍질에 알레르기가 있으시다는 건, 원로들이나 알 법한 사실이지.”
귀족 가문마다 방침이 다르지만, 가문의 가주에게 무슨 알레르기가 있는지 외부에 상세히 알리는 건 위험을 초래할 수 있었다.
그래서 힐켄테데에서는 전 대공이 복숭아 껍질에 알레르기가 있다는 사실을 외부에 공개하지 않았다.
심지어 전 대공은 껍질을 깐 복숭아를 오히려 좋아했다.
그러니 실상 무슨 알레르기가 있는지 아는 건 그녀와 식사를 자주 하던 원로들이나 에크하르트뿐이었다.
“나도 어머니를 닮아 복숭아 껍질에 알레르기가 있어.”
프렐런트가 고개를 끄덕였다.
알레르기는 유전되는 경우가 많으니 그럴 수도 있겠다 싶었다.
“그런데, 이 쿠키를 씹는 순간 혀가 따갑고 목구멍이 간지러웠어.”
오벨리아가 프렐런트의 앞에 팔을 내밀었다.
쓰러진 척한 사이에 해 놓은 완벽한 분장으로 인해, 그녀의 팔 안쪽은 마치 두드러기가 올라온 것처럼 울긋불긋했다.
“워낙 미량을 섭취한 데다가 쓰러진 척한 후 바로 약을 먹어서 다행이지만, 아니었다면 큰일이 났을지도 모르지.”
오벨리아의 말이 이어질수록 프렐런트의 얼굴은 사색이 되었다.
심지어 그녀는 전 대공이 알레르기로 인해 위급했던 적을 직접 본 적이 있기 때문에 그 반응이 더욱 격했다.
“오벨리아를 감시하려던 침입자들은 황제의 정부가 보낸 자들이었다. 아마도, 오벨리아가 전 황태자비를 닮았는지 확인하고 싶었던 것이겠지.”
그리고 때를 맞춰 에크하르트가 마치 더는 참을 수 없는 것처럼 말을 꺼냈다.
“닮았다는 건 금방 확인했을 테니… 오늘처럼 진짜로 전 가주님의 딸이 맞는지, 아니면 힐켄테데의 딸인 척하는 전 황태자비인지 확인하고 싶었을 테고.”
프렐런트의 어깨가 크게 움찔했다.
에크하르트는 오벨리아와 결혼함으로써 마침내 대공으로서 정통성을 확보했다.
그가 그녀를 해칠 이유가 전혀 없다는 의미다.
에크하르트를 제외하고 나면 전 대공의 알레르기를 알고 있는 대체로 원로들이었다.
“그렇다는 건… 원로 중 누군가가 또 다시, 황실 측과 결탁했을지도 모른다는 의심을 품고 계신 겁니까?”
프렐런트가 잔뜩 긴장한 기색으로 에크하르트에게 물었다.
“그래. 다만, 내가 이미 의심을 품은 와중에 조사한다는 건, 편견을 지울 수 없다는 뜻이겠지. 그러니 엘루미나 원로, 그대가 조사를 맡아 주었으면 한다.”
“만약에… 원로들이 결탁한 게 맞다면 어떻게 하실 겁니까.”
프렐런트의 음성이 한없이 조심스러웠다.
조사를 맡긴다는 것은 크게 놀랍지 않았다.
무언가를 시킬 게 아니었다면, 굳이 프렐런트만을 비밀리에 부를 이유가 없으므로.
“원로회의 의석수를 줄일 거다.”
“그건…!”
프렐런트가 자신도 모르게 목소리를 높였다.
그녀는 원로다.
어쨌든 원로들의 위세가 이 이상으로 줄어드는 것은 프렐런트에게도 마냥 좋은 일은 아니었다.
“프렐런트, 당신의 도움이 필요해.”
그러나 오벨리아가 프렐런트를 부르자, 프렐런트의 두 입술을 다시 꾹 다물렸다.
“…알겠습니다.”
프렐런트가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원로로서, 원로회를 지켜야만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만약 프렐런트에게 오벨리아와 원로 중 하나를 고르라면, 그녀는 힐켄테데의 유일한 핏줄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다.
***
프렐런트는 조사를 하면 할수록 절망할 수밖에 없었다.
그녀가 조사하는 족족, 한 명도 아니고 여러 원로에게서 황제의 정부와 접촉한 증거가 나왔기 때문이다.
원로들이 내부에 꽁꽁 숨겨 두었지만, 원로 중에서도 수장격의 역할로 지내오면서 그들의 습성을 모조리 꿰고 있는 프렐런트에게는 소용없는 일이었다.
‘이 사실이 알려지면 원로회는 끝이다.’
한두 명도 아니고, 증거가 이렇게 확실한 이상 원로회의 의석수를 줄이느냐 마느냐의 문제가 아니었다.
증거는 까면 깔수록 더 나오고 있었고, 원로들이 황실과 결탁한 일이 벌써 두 번째였다.
심지어 힐켄테데의 남은 유일한 핏줄이 목숨을 위협 당했다.
그 모든 일이 종합적으로 겹친다면 원로회의 의석수를 줄이는 게 아니라, 원로회를 해체해버리자고 해도 할 말이 없었다.
그리하여 프렐런트는 오벨리아를 찾아갔다.
“원로회를 살려 주십시오, 대공비 전하. 모두 전 대공 전하의 사람들입니다. 썩은 자들은 모두 도려내야 할지라도, 모든 원로가 그런 것은 아닙니다.”
프렐런트는 절박했다.
커티스가 완전히 몰락한 지금, 그녀가 원로회의 수장이나 다름없었다.
일부 원로들을 쳐내더라도, 프렐런트는 남은 원로들이라도 지켜야만 했다.
“…좋아. 단, 조건이 있어.”
잠시 생각하는 척 뜸을 들인 오벨리아가 말을 이었다.
마침내 계획의 정점이었다.
“프렐런트, 당신이 직접 원로회의 규모를 축소해 줘. 그러면 황실과의 결탁이 아니라, 원로들의 비리로 인한 것쯤으로 마무리할게.”
“오벨리아 님…!”
프렐런트가 고개를 홱 들었다.
그녀의 목소리에 옅은 원망이 담겨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프렐런트의 손으로 원로들을 직접 쳐내라는 것은 그녀 스스로 원로들 사이 권력을 놓으라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같은 원로로서 원로를 공격했다.’
이 사실을 다른 원로들이 어떻게 생각하겠느냔 말이다.
“커티스도 없으니 언젠가 원로들은 결국 다시 프렐런트를 구심점으로 삼게 될 거야.”
물론, 그럴 일은 없었다.
이건 감언이설에 불과했다.
프렐런트를 통제할 수 있는 것은 오벨리아뿐이었다.
그러나 오벨리아가 사라진 이후에도 에크하르트는 살아가야만 했으므로, 그녀는 그와 적대하는 프렐런트의 권력을 되살려 줄 생각 따위 처음부터 하지 않았다.
오벨리아에게는 복수가 최우선이지만, 에크하르트에게 할 수 있을 만큼은 해 주고 싶었다.
겨우 그런 걸로 그녀가 그에게 지은 죄가 씻기지 않는다고 해도.
“내가 돌아오자마자 이미 두 번이나 당했어. 내가 지금 당장은 원로들을 완벽히 신뢰할 수 없다는 것을 이해해 줘.”
그러나 오벨리아는 안타까움을 연기했다.
프렐런트로 하여금, 오벨리아가 언젠가 그녀의 권력을 되돌려 주리라는 착각에 빠지도록.
이게 오벨리아가 에크하르트를 지키는 방법이었다.
“…그렇게 하겠습니다.”
결국 프렐런트는 오벨리아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
며칠 뒤, 프렐런트는 원로만 모인 회의에서 오벨리아와의 약속을 이행했다.
“원로회의 의석수를 줄여야겠소.”
“엘루미나 원로님,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말도 안 됩니다!”
역시나 반발이 엄청났다.
그러나 프렐런트는 한 번 눈을 질끈 감았다가 뜬 후, 서류들을 원탁의 중앙에 던졌다.
그간 그녀가 알면서도 적당히만 하면 눈감아 주었던 원로들의 비리였다.
물론, 프렐런트는 비리를 저지르지 않았기에 스스로는 떳떳했지만.
쾅!
“커티스의 일로 대공 전하께서 원로회를 주시하는 상황이요. 더 이상 원로회가 책잡혔다가는, 원로회를 유지하기도 힘들 겁니다. 그러니 지금이라도 정리하는 게 맞을 터!”
프렐런트가 일부러 탁자를 내리치며 강경하게 말했다.
그러자 원로회가 일순 조용해졌다.
그녀의 말이 옳기도 했으나, 굳이 나서서 원로회를 축소시키고자 하는 프렐런트가 아니꼬운 탓이었다.
“대공 전하께 힘이 가니, 그새 거기로 붙다니… 박쥐 같긴.”
누군가 빈정거렸다.
원로들만 있는 자리이기에, 프렐런트의 시선이 정확히 그 말을 내뱉은 자에게로 향했다.
“킹스턴, 이 일에 원로의 책임이 크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할 텐데. 시류도 못 읽는 멍청이보단 내 선택이 훨씬 낫지 않던가?”
프렐런트가 싸늘하게 킹스턴 원로를 비웃었다.
그는 가장 많은 비리를 저지른 자였다.
“의석수를 줄이는 것이 지금 당장은 원로회에 안 좋아 보이겠지만, 자격 없는 자들이 원로회에 득시글거리는 것보다야 낫지 않겠습니까.”
모두에게 말하는 것처럼 말투는 존대이되, 프렐런트의 시선은 킹스턴 원로를 똑바로 향해 있었다.
즉, 그를 두고 하는 말인 셈이었다.
“엘루미나 원로, 당신…!”
킹스턴 원로가 발끈하여 프렐런트를 삿대질했다.
그러자 이번에는 프렐런트의 말이 일리 있다고 여기는 이들이 들고 일어났다.
“당신이라니! 말을 삼가시오, 킹스턴 원로!”
그들은 비리를 저지르지 않은 이들이었다.
당연히 비리로 에크하르트의 눈 밖에 난 자들과 한데 묶여 취급당하고 싶지 않았다.
그 후로는 시끄럽게 설전이 오가는 난장판이었다.
원로회의 의석수를 줄이기를 거부하는 자들은 지금까지 모른 척하다가 인제 와서 원로들의 비리를 꼬집는 프렐런트를 비난했다.
이렇게라도 에크하르트의 눈총을 사는 것을 피하고자 하는 자들은 비리를 저지르고도 부끄러움을 모른다며 반발하는 자들을 욕했다.
끝나지 않을 것 같은 난장판이었다.
쾅!
그리고 그 기나긴 다툼을 끝내듯이, 프렐런트가 다시 원탁을 내리쳤다.
“얌전히 원로직에서 내려가는 게 좋을 것이오. 그렇지 않다가는 커티스와 같은 결말을 맞이하게 될 테니.”
살벌한 경고와 함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