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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한부 폐태자비는 살아있다-35화 (35/136)

35화. 생을 만드는 것(3)

오벨리아가 몸을 회복하고 일어났을 때, 수도는 힐켄테데가 황제에게 대놓고 반목한 일로 완전히 시끌벅적했다.

그 내용이 오벨리아의 귀에 들어오게 된 것도 당연한 일이었다.

“에크하르트, 당신 대체 무슨 짓을 한 거야?”

그러니 오벨리아가 짚고 넘어가지 않을 수 없었다.

아직 복수의 시작도 제대로 하지 못한 시점이었다.

그런데 힐켄테데가 황실에 좋지 않은 감정을 지니고 있다는 사실을 벌써부터 들켜 무엇이 좋단 말인가?

“몸은 괜찮은 건가?”

그러나 에크하르트는 오벨리아의 말을 못 알아들은 척하며 그녀의 이마를 짚어 볼 따름이었다.

다행히도 오벨리아의 열은 완전히 내린 뒤였다.

“에크하르트, 말 돌리지 마.”

오벨리아가 에크하르트의 손을 밀어내며 그를 올려다봤다.

그 시선이 더없이 단호했다.

“황제가 너를 노리고 자작나무를 보냈어.”

에크하르트는 생각만으로도 화가 나는지 이를 악물었다.

기본적으로 우직한 성격을 가진 그로서는 알렉산드로의 작태가 용납되지 않았다.

“오벨리아, 너에게 바실리스크의 독을 건넨 것도 그 자지.”

말을 잇던 에크하르트가 잠시 머뭇거렸다.

자신이 하는 말이 오벨리아에게 어떤 영향을 끼칠지 생각하니 저어된 탓이었다.

아무리 알렉산드로가 개자식이라지만, 어쨌든 그런 놈일지라도 한때 그녀의 남편이 아니었던가.

“…그러니 네가 꽃가루 알레르기를 겪으면 단순히 알레르기 반응으로 끝나지 않으리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을지도 몰라.”

그러나 여전히 오벨리아의 시선이 단호했기 때문에, 에크하르트는 결국 계속 말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어차피 자작나무를 베어 버리지 않았다면 네 열이 내리지 않았을 거다. 황제의 의도대로 모두 당해 주느니, 차라리 뭐라도 하는 게 낫지 않나.”

하지만 에크하르트의 모든 말을 듣고 난 오벨리아의 반응은 그가 예상한 바를 벗어났다.

“그러니까 자작나무를 베지 말았어야지.”

“…뭐?”

“나를 타운하우스 밖으로 몰래 내보내서 회복시킬 수도 있었잖아.”

물론, 그럴 수도 있었다.

그렇지만 에크하르트는 미간을 찌푸렸다.

“열이 올라서 쓰러진 너를 어디로 보내? 여기보다 네 몸 상태를 돌보기에 나은 곳은 없어.”

오벨리아를 타운하우스에서 몰래 내보낸다는 것은 그녀가 치료받는 동안 숨어 있어야 한다는 의미였다.

당연히도 그런 건 여러 사람이 살피는 것보다 치료의 질이 떨어질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당신은 그렇게 했어야만 해. 그게 우리 복수에 훨씬 도움이 되었을 테니까. 자작나무는 그동안 벌레라도 풀어서 썩게 했으면….”

“그만, 오벨리아!”

에크하르트가 더는 듣지 못하겠다는 듯 오벨리아의 말을 막았다.

그녀의 선택은 늘 그렇듯이 언제나 이성적이었다.

그리고 늘 그렇듯이 언제나 스스로의 몸 상태 따위 크게 개의치 않는 것이었다.

오벨리아에게 스스로의 생은 마치 황제를 태워 버릴 불을 키우기 위한 장작 같았다.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마. 힘없는 현 황제에게 이 정도 한다고 해서 힐켄테데에 무슨 일이 일어나는 것도 아니다.”

에크하르트가 한숨을 쉬며 목소리를 낮추었다.

열로 쓰러졌다 일어난 사람 앞에서 목소리를 높이다니, 스스로 자책한 탓이었다.

“그렇지만 벌써부터 힐켄테데의 속내를 드러내서 좋을 게 뭐가 있어?”

그러나 오벨리아는 말을 멈추지 않았다.

“이성적으로 굴어, 에크하르트. 내 말이 틀리지 않은 걸 알잖아.”

오벨리아가 다시 말을 덧붙였다.

그녀의 건강은 어차피 좋아질 수 없는 것이었다.

오벨리아는 괜찮아지지 않을 것에 매달려서 일을 그르치고 싶지 않았다.

“내게 네 목숨을 복수를 위한 소모품 취급하라고?”

에크하르트가 마침내 저번부터 참아 왔던 말을 입 밖으로 토해냈다.

그래, 그는 저번부터 이 점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오벨리아의 말대로 그녀의 목숨을 복수에 써먹을 도구처럼 다루려고 해 봤자, 에크하르트 안의 자괴감만 늘어날 뿐이었다.

“싫어.”

그래서 에크하르트는 마침내 그것을 단호하게 거절했다.

“…어?”

오벨리아가 당황했다.

에크하르트의 반응이 평소와 다르게 너무 굳건했기 때문이다.

기가 막힌다는 듯이 헛웃음을 짓거나, 짜증스럽다는 듯 미간을 찌푸리거나, 복잡한 속내를 애써 숨기듯 입을 굳게 다물지 않은 그의 표정은 지나치게 평온했다.

마치 어떤 생각이 에크하르트의 안에서 정리된 것처럼.

“오벨리아, 나는 널 살릴 거다.”

“…뭐?”

그리고 이어진 에크하르트의 말은 더더욱 오벨리아를 당황스럽게 만들었다.

살았으면 좋겠다는 것도 아니고 살릴 거라는 확신의 말이었다.

마치 이미 그렇게 정해 놓은 것처럼.

“네가 매번 곧 죽을 것처럼 구니까, 죽을 날 받아 놓은 사람 미워하는 나만 나쁜 놈이 된 것 같거든.”

에크하르트는 정답을 찾기라도 한 것처럼 개운한 표정이었다.

“살아, 오벨리아.”

에크하르트의 말투는 일견 명령처럼도 들렸다.

오벨리아가 반드시 그렇게 해야 한다는 듯이.

“살아서 내 분노도 미움도 받아내고 속죄해. 죽어가는 얼굴로 가엾게 굴지 말고.”

“에크하르트, 난… 죽어.”

오벨리아는 어쩐지 다급한 심정이 되었다.

오늘의 에크하르트는 그녀가 모르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오벨리아는 그것이 너무 낯설어서 자신이 그를 어떻게 대해야 할지 좀처럼 알기 어려웠다.

그녀는 스스로도 제 목소리 끝이 떨리는 이유를 종잡을 수 없었다.

“신성 제국에 사람을 보냈다.”

신성 제국은 그 어떤 나라보다 의술이 발달한 나라였다.

론체스터 제국에 없는 해독법도 어쩌면 신성 제국에는 있을지도 몰랐다.

“쓸데없는 짓이야.”

그러나 오벨리아는 일부러 냉정하게 모든 가능성을 부정했다.

바실리스크의 독은 대륙에서 위험하기로 정평이 난 독이었다.

만약 어딘가에 해독 방법이 있었다면 그토록 악명이 높지는 않았으리라.

“쓸데없지 않아. 살 확률이 1%라도 있다면 시도해 보지 못할 이유가 무엇이지?”

“시간 낭비, 인력 낭비야.”

“방법이 있을 만한 곳에서 찾아보면 돼.”

에크하르트는 무엇이든 해낼 수 있을 듯 보였다.

그 모습에 오벨리아가 멈칫하더니 혹시나 하는 생각으로 입을 열었다.

“에크하르트, 설마… 로메네스 황실에 사람을 보낸 건 아니겠지.”

신성 제국은 건국 때부터 제국을 수호해 온 다섯 가문의 아이 중 하나를 뽑아 교황으로 세우는 것이 관례였다.

그리고 로메네스는 현재 신성제국을 다스리는 교황의 가문이었다.

“그래.”

에크하르트의 입에서는 오벨리아가 전혀 바라지 않던 대답이 떨어졌다.

“당장 그만둬.”

오벨리아가 경악하여 미간을 찌푸렸다.

“로메네스 황실에서 뭘 요구할 줄 알고 그런 짓을 해.”

신성 제국의 황실이라면 바실리스크의 독에 관한 해독법을 가지고 있을지도 몰랐다.

그러니까, 유사시에나 사용하려고 황실 깊숙한 곳 어딘가에 묵혀 둔 그들만의 비기 말이다.

당연하게도 그런 것을 내어달라고 하려면 치러야 할 대가가 클 터였다.

“너를 위한 게 아니라, 나를 위한 거다.”

그러나 에크하르트는 오벨리아의 말을 전혀 듣지 않았다.

오벨리아는 그가 절대 결정을 바꾸지 않으리라는 것을 깨달았다.

“한순간의 분노로 마지막에 네게 바실리스크의 독이 담긴 병을 건넸지. 난 그 죄책감에 평생 휩싸이기 싫어.”

오벨리아의 입이 다물렸다.

에크하르트가 스스로를 위한 일이라는데, 그녀가 더 말을 보탤 수가 없었다.

그녀가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그렇지 않으면 문득 묻고 싶어질 것만 같아서.

‘…내가 살아도 될까?’

에크하르트가 오벨리아를 위해 살라고 하는 것은 아닐 터다.

그에게 그녀는 원수와 비슷하니까, 그럴 리는 없었다.

그래도… 모든 것을 잃은 이후 오벨리아에게 살라고 말한 사람은 에크하르트뿐이었다.

오벨리아는 자신의 어리석음으로 죽은 자들을 기억했다.

그 기억은 그녀의 안에 영원할 것이다.

그래서 오벨리아는 죽겠다고 생각한 순간부터, 살아도 된다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당연하지 않은가.

오벨리아가 앞뒤 가리지 않고 오직 복수만을 향해 달려갈 수 있는 것은 복수 외에 그 무엇에도 미련이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만약 삶이 아까워진다면?

그러면, 그때도 복수를 위해 지금처럼 굴 수 있을 것인가?

마음이 술렁였다.

동시에 들어서는 안 될 말을 들은 것 같았다.

감히, 자신이.

감히, 그 많은 목숨을 딛고.

돌연 속이 울렁거렸다.

“…우욱.”

오벨리아가 황급히 자신의 입을 틀어막았다.

무언가가 속에서 치받았다.

“…오벨리아?”

에크하르트가 놀라 그녀에게로 훌쩍 다가왔다.

그러나 오벨리아는 머릿속이 핑 도는 탓에 그를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어떤 기억은 기폭 장치를 알 수 없는 폭탄이다.

터지지 않은 폭탄은 언젠가 반드시 터질 테지만 우리는 그것이 언제 터질지, 무엇에 의해 터질지 알 수 없다.

그래서 치우거나 건드리지도 못한 채로 방치했다가 폭발하는 순간 그것에 속절없이 휩쓸려버린다.

우리는 대개 그런 것을 트라우마라고 부른다.

그렇게 오벨리아는 갑자기 떠오른 기억에 그대로 폭발 속으로 밀려들었다.

알렉산드로의 검에 베여 스러진 조안나.

타오르는 불 속에서 저 대신 죽은 마리아.

그리고 거리에서 돌연 객사하게 된 아버지.

오벨리아가 알렉산드로를 선택하지 않았다면 죽지 않았을 사람들.

오벨리아에게 복수 대신 삶을 갈구한다는 것은 그녀로 인해 죽은 자들에게 짓는 죄였다.

“허억…!”

오벨리아가 다급히 숨을 들이켰다.

그러나 그녀의 몸은 급격히 휘청거렸다.

“오벨리아!”

에크하르트가 그대로 바닥으로 곤두박질칠 뻔한 오벨리아의 몸을 다급히 받아 안았다.

그녀가 숨을 헐떡거렸다.

죽은 자들의 이름이 얽히고설켜 오벨리아의 목을 휘감았다.

숨이 막혔다.

숨을 쉬는 법을 잊은 것 같았다.

“당장 주치의를 불러…!”

에크하르트의 다급한 목소리가 오벨리아의 귓전에서 점점 멀어졌다.

숨 가쁘게 들썩이던 그녀의 가슴이 점차 잦아들었다.

그대로 오벨리아에게 암전이 찾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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