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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한부 폐태자비는 살아있다-36화 (36/136)

36화. 생을 만드는 것(4)

주치의는 오벨리아의 상태를 과로와 수면 부족, 그리고 충격으로 인한 일시적인 혼절이라고 진단했다.

바실리스크의 독으로 인해 치명적인 타격을 입은 몸에 과로와 수면 부족이 겹친 상태에서 트라우마까지 덮쳐 정신마저 흔들리자 버티지 못하고 기절한 것이었다.

에크하르트는 사는 내내 무인으로 살아온 사람이었다.

게다가 북부의 사람들은 모조리 기골이 장대하고 대체로 튼튼한 편이었다.

그런 그에게 연달아 두 번이나 혼절한 오벨리아의 모습은 어떤 충격을 불러왔다.

에크하르트는 오벨리아의 곁을 지키며 자신의 어떤 말이 그녀를 송두리째 흔든 것인지 곱씹고 곱씹어 고민했다.

“으… 으윽….”

에크하르트의 상념을 끊어낸 것은 오벨리아에게서 들려온 앓는 소리였다.

그가 소리에 반응해 고개를 들고 그녀를 살폈다.

깨어난 것은 아닌지, 오벨리아는 여전히 눈을 감고 있는 상태였다.

“미안해…. 미안해요, 죄송해요….”

오벨리아는 울지 않았다.

다만 잠든 채로 미간을 찌푸렸다가, 입술을 꾹 다물었다가, 억지로 무언가를 삼켰다가, 애먼 손을 쥐었다 폈다 하기를 여러 차례 반복했다.

그리고 오벨리아는 곧 다시 사죄했다.

그런 식으로 끊임없이 사죄의 말만을 내뱉었다.

“잘못했어요, 내가-.”

그러다가 종래에는 오벨리아의 두 손이 제 목을 움켜쥐었다.

그것은 숨쉬기 고통스러운 사람의 행동 같기도 했고… 동시에 스스로 목을 조르는 것 같기도 했다.

고통이었다.

모든 것을 덮어 버리는 까만 밤조차도 오벨리아에게 안식을 가져다 주지는 못했다.

화재 속에서 홀로 살아남은 소년이 매일 밤을 저 혼자 살아남았음에 사죄했듯이.

“오벨리아, 그만!”

오벨리아는 조안나에게, 마리아에게, 그리고 자신의 아버지에게… 숨을 쉬는 모든 순간마다 자신의 죄를 빌고 있었다.

그래서 에크하르트는 차마 더 견디지 못하고 그녀를 깨웠다.

에크하르트가 조금 거칠 만큼 오벨리아를 흔들자, 마침내 그녀의 두 눈이 번쩍 뜨였다.

“잘못…!”

그렇게 비로소 오벨리아의 사죄가 멈췄다.

“오벨리아, 숨 쉬어.”

그리고 에크하르트가 말을 꺼내고 나서야, 마치 동시에 호흡조차 잊어버린 사람처럼 굳었던 오벨리아가 숨을 내쉬었다.

그 모습에 그가 자신도 모르게 주먹을 꽉 쥐었다.

죄를 빌지 않는 순간에는 숨조차 멈춰 버리는 그 모습이 에크하르트의 심장을 움켜쥐는 것 같았다.

고통스러웠다.

“…에크하르트?”

오벨리아가 멍하니 에크하르트의 이름을 불렀다.

그 순간, 그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아, 네가 사무치게 가엾었다.

‘…그래서 일부러 잠들지 않았던 건가?’

에크하르트는 늘 날이 새도록 일에 빠져 있던 오벨리아를 상기시켰다.

미련하게 무리한다고 생각했다.

그녀는 그러지 않고는 버틸 수 없었던 것뿐이었다.

에크하르트가 자신도 모르게 손을 뻗어 오벨리아의 뺨을 감쌌다.

그녀가 일에 빠져 사는 것은 일종의 현실 도피였다.

정신없이 일만 하다 보면 누가 누구에 의해 죽었는지 같은 건 잠시 잊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꿈속에서는 그조차 불가하다.

‘네게 숨 쉴 틈이 있기는 해?’

에크하르트는 무의식중에 입 밖으로 나갈 뻔한 말들을 두 번이나 애써 삼켰다.

오벨리아가 그와의 대화 중 혼절하고 난 후부터는 무슨 말이든 조심스러웠다.

“미안, 내가 갑자기 기절해서 당황스러웠겠네.”

에크하르트가 침묵을 유지하는 동안 대략적으로 상황 파악을 한 것인지, 혹은 그의 침묵에 어색함을 느낀 탓인지 오벨리아가 말을 꺼냈다.

무슨 말이라도 해야 그녀가 당황하지 않을 텐데, 에크하르트는 좀처럼 할 말을 찾을 수 없었다.

“…과로라고 하더군.”

그래서 결국 에크하르트가 고르고 골라 할 수 있는 말은 그것뿐이었다.

“그래.”

그러나 오벨리아의 대답은 지나치게 담담해서, 자신이 하고 싶은 말들을 꾸역꾸역 참고 있던 에크하르트를 기어코 건드려 버렸다.

“그렇게 아무렇지 않게 굴 일이 아니다. 오벨리아, 네 몸 상태로는 자칫하면 깨어나지 못할 수도 있어.”

에크하르트가 울컥하여 말했다.

오벨리아가 먹는 양은 남들의 절반도 되지 않고, 잠마저 제대로 자지 못한다.

그런 상황이라면 멀쩡한 기사라고 할지라도 나가떨어질 터다.

그런데 그녀는 도통 쉴 줄을 몰랐다.

심지어 오벨리아는 현재 금이 잔뜩 간 유리 인형과 다를 바가 없었다.

누군가 어떤 악의도 없이 오벨리아를 툭 건드리기만 해도, 그녀의 목숨은 간당간당한 상태에 치달을 수 있었다.

그런데 그런 행동을 지금 오벨리아가 스스로에게 하고 있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가 버티고 있는 것은 오직 정신력 하나로, 복수에 스스로를 태우고 있기 때문이었다.

“나도 알아. 내가 아무것도 하지 않더라도, 내 숨은 돌연 멈춰도 이상할 게 없어.”

그러나 오벨리아는 에크하르트의 염려가 단 하나도 통하지 않은 사람 같았다.

물론, 그녀의 말도 틀린 바 없었다.

누가 무언가를 하지 않아도 오벨리아는 당장 내일 눈을 뜨지 못할 수도 있었다.

그래서 그녀는 눈을 뜨고 움직일 수 있을 때, 자신이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해 두고 싶었다.

“그래서 지금 앞으로도 이런 식으로 하겠다는 건가?”

하지만 조금 전 에크하르트의 말이 오벨리아의 마음을 바꾸지 못했듯이, 그는 그녀의 말에 결코 괜찮아지지 않았다.

에크하르트에게는 오벨리아의 말이, 그리하여 아낌없이 죽겠다는 말로 들렸기 때문이다.

“당신이 날 살리겠다고 해서 나도 생각해 봤어.”

오벨리아가 차분히 말을 꺼냈다.

그녀에게 새겨진 죽은 자들의 이름이 가진 무게를 잊지 말아야 했다.

조안나도 아니고, 마리아도 아니고, 오벨리아의 아버지도 아닌 그녀가 살아남은 이유.

그건 복수를 위해서였다.

“그렇게 말하자마자 기절했다 이제 깨어나 놓고 생각은 무슨 생각.”

에크하르트가 미간을 찌푸리며 오벨리아를 내려다봤다.

어쩐지 탐탁지 않은 말이 흘러나올 것을 감지한 탓이었다.

“그만큼 오래 생각할 필요가 없었다는 뜻이야.”

정말이지, 오벨리아는 딱 깨어나자마자 에크하르트의 말에 대한 답을 내렸다.

“나를 살리려고 노력하지 마, 에크하르트.”

오벨리아의 시선이 아래로 내리깔렸다.

에크하르트가 제게 살라는 말을 꺼낼 때까지 얼마나 많이 갈등했을지, 그녀는 짐작조차 할 수 없었다.

오벨리아는 이제 누군가를 죽이고 싶을 만큼 미워한다는 게 어떤 감정인지 알았다.

그래서 더욱 에크하르트의 결정이 어려웠으리라는 생각도 들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에게 살겠다고 대답할 수 없었다.

“당신도 봤잖아. 알레르기 하나에, 정신이 흐트러진 순간에, 겨우 그런 것들로 인해서도 혼절하는 나를.”

오벨리아가 제 몸이 비정상적인 상태라는 것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살 수 있으리라는 확신도 없는 시점에서 낭비할 시간이 나한테는 없어.”

한 번 깨진 유리병을 이어 붙인다고 한들, 물이 완벽히 새지 않도록 막을 수는 없었다.

오벨리아의 몸을 고치는 건 그것과 다를 바 없는 일이었다.

얼마의 시간이 걸리지도, 얼마의 노력이 들지도, 그 끝이 있을지도 장담할 수 없었다.

오벨리아에게 그것은 낭비였다.

“당신의 그림자 기사들 한 명 한 명이 할 수 있는 일이 얼마나 많고, 해야 할 일은 얼마나 많은데. 그런 이들을 내 목숨 하나 구하겠다고 낭비하지 마.”

참, 담백한 거절이었다.

그 무미건조한 말투 안에는 살고자 하는 의지가 단 하나도 느껴지지 않았다.

에크하르트는 그제야 깨달았다.

부서진 것은 오벨리아의 몸뿐만이 아니라 마음조차 마찬가지라는 것을.

인간이 생을 이어가도록 만드는 데 필요한 것은 단순한 숨결 하나만이 아니었다.

오벨리아 카테리안느는 죽었다.

숨을 쉬고 있을 뿐, 그녀는 지금 죽은 자였다.

그 마음이 형편없이 살해당했기 때문이다.

“…헛소리 마.”

에크하르트가 이를 악물며 중얼거렸다.

바실리스크의 독을 해독할 방법만 찾으면 된다고 생각했다.

그러면 저 가엾은 여자를 더는 동정하지도 연민하지도 않고 마음 편히 미워할 수 있으리라고 여겼다.

그건 그의 오만이었다.

한 사람을 살리는 것이 언제고 제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게 아니라는 사실을 에크하르트는 이제야 똑바로 보게 되었다.

그러나 그는 마음이 살해당한 사람을 되살리는 법 따위 몰랐다.

그건 에크하르트가 생에 처음으로 마주하는 가장 큰 막막함이었다.

누군들 그렇지 않은가.

어떤 방식으로든 죽은 사람을 어떻게 되살리겠는가.

그렇지만, 오벨리아가 괜찮아지지 않으면 에크하르트는 그녀를 마음 편히 미워할 수 없었다.

오벨리아는 그가 마땅히 미워해야 할 사람임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죽은 힐켄테데의 사람들을 위해서라도 안 될 말이었다.

“네게 죽을 자격 따위 없어, 오벨리아.”

그러니까 에크하르트는 설령 빈껍데기만 남은 오벨리아의 육신이라고 할지라도 일으켜 세워야만 했다.

그러면 그녀의 죽음에 공여했다는 죄책감은 버릴 수 있으니까.

“내가 네게 살라고 했던 건, 네게 선택권 따위를 준 게 아니야.”

에크하르트의 단호한 말에 오벨리아의 속눈썹이 파르르 떨렸다.

그가 말을 덧붙였다.

“게다가- 너를 살린 자들이, 네 죽음을 바라고 살린 것은 아닐 텐데. 넌 당연히 살아남으려고 발버둥 쳐야 하는 것 아닌가?”

그 순간 오벨리아의 몸이 흠칫 떨렸다.

죽어 보라는 말에도, 자신이 끔찍하다는 말에도, 싫다는 말에도, 그 외의 폭언들에도 꿈쩍하지 않던 그녀였다.

그런데 지금, 겨우 살라는 말 하나에 오벨리아는 견디지 못해 떨고 있었다.

생각해 보면 에크하르트의 말은 틀린 바가 없었다.

그녀는 순간 자신이 왜 반드시 죽으려 했던가에 대하여 생각했다.

지금까지는 그 생각에 관해 고민해 본 적이 없었다.

그저 당연하게, 오벨리아에게는 복수가 끝난 다음이라는 것이 없었다.

그녀는 처음부터 죽을 생각이었으니까.

그런데 살아야 한다면?

오벨리아는 순간 머릿속이 새까맣게 물드는 것을 느꼈다.

그 자리에 들어찬 것은 두려움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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