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7화. 생을 만드는 것(5)
어쩌면, 먼저 죽은 이들을 위하여 복수에만 매달려야 한다는 것은 변명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삶은 선택의 연속이다.
그 선택들이 이어져서 지금의 오벨리아를 만들었다.
그래, 그녀는 복수를 마친 이후 살게 된다고 하더라도 지금처럼 모든 것을 망치지 않을 자신이 없었다.
이제는 무엇이 옳은 선택인지도 모르겠고, 그런 선택을 할 자신도 없었다.
오벨리아는 지쳤고, 자신이 해야 할 일을 끝마친 후 모두 그만하고 싶었다.
그래, 그녀에게는 안식이 필요했다.
그것을 깨달은 오벨리아의 안색이 새하얗게 질려 버렸다.
‘이토록 이기적일 수가 있는 걸까.’
오벨리아는 스스로가 역겹게 느껴졌다.
자신 때문에 죽은 이들을 핑계로 삼아 죽음으로 도망치고 싶어 하다니.
이 얼마나 이기적이고 역겨운 행태란 말인가!
속이 다시 울렁거렸다.
오벨리아가 다급히 입을 틀어막았다.
이런 끔찍한 자신이 살 자격이 있는가?
또다시, 누군가를 망치지 않으리라는 보장이 있는가?
이렇게 이기적인 제가 살고 싶어졌을 때, 행복 대신 복수를 택하겠는가?
오벨리아가 그 모든 질문에 내린 답은 부정이었다.
죽음으로 도망치고 싶어 하는 게 나을지도 몰랐다.
자격도 없이 살아 숨 쉬며 누군가의 생을 망칠 바에는.
“에크하르트.”
그래서 오벨리아는 선언했다.
“난 죽을 거야.”
그래, 그것은 선언이었다.
지금까지처럼 곧 있을 미래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그녀의 결정이었으니까.
“바실리스크의 독과 상관없이, 그럴 거야.”
오벨리아가 다시 한번 말했다.
“그래야만 하니까.”
오벨리아가 어깨를 펴고 허리를 꼿꼿이 세웠다.
“그러니까- 내게 죄책감을 느끼지도, 날 살리려고 애쓰지도 마.”
오벨리아는 세상에서 자신을 죽여 버리기로 했다.
모든 것이 끝난 후에.
바늘 하나 들어가지 않을 것처럼 빈틈없는 태도였다.
그에 에크하르트는 어쩐지 초조함이 밀려왔다.
무얼 해도 그는 그녀를 설득할 수 없을 것만 같았다.
“너 때문에 죽은 사람들은 어쩌고. 그 목숨의 무게는?”
사람이 초조하면 실언을 하기 마련이었다.
에크하르트가 말을 꺼내자마자, 오벨리아의 안색이 흐려졌다.
그도 실수했다는 것을 금방 깨달았다.
그녀가 떨리는 손끝을 말아 쥐었다.
“최대한… 최대한, 빚을 갚은 후에. 그 후에 죽을 거야.”
오벨리아는 손끝처럼 똑같이 떨리는 목소리로 겨우 대답을 내놓았다.
이번에는 에크하르트도 더는 말을 이어 붙이지 않았다.
그가 비수를 꽂은 자리에서 그녀의 피가 철철 흐르고 있는 것이 선명히 보인 탓이었다.
***
“오벨리아, 할 말이 있다.”
오벨리아가 어느 정도 기운을 차린 며칠 후, 에크하르트가 말을 꺼냈다.
“일리어스 카테리안느의 마지막 행적을 찾았어.”
지난날 있었던 일에 대한 일종의 속죄인 셈이었다.
“…뭐?”
그리고 에크하르트의 바람대로, 그의 말은 피곤함에 반쯤 잠겨 있던 오벨리아를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게 만들었다.
“그간 네 오빠의 행적을 좇고 있었다. 나도 들어야 할 진실이 있으니까….”
에크하르트가 말끝을 흐렸다.
처음 그가 일리어스의 행방을 찾기 시작한 것은 일리어스가 힐켄테데 사변에 관련이 됐는지를 알아보기 위해서였다.
그것을 이 타이밍에 말하자니, 어쩐지 뻔뻔하게 오벨리아를 위하는 척하며 생색을 내는 것 같아 민망했다.
“그래서?”
그러나 오벨리아에게 지금 그런 것 따위가 중요할 리 없었다.
“그래서, 오빠는 어떻게 됐어?”
오벨리아의 목소리가 평소와 달리 살짝 어긋났다.
침착하기 위해 대단히 애쓰고 있었으나 그렇지 못하다는 증거였다.
“오벨리아, 이프넌트 후작은 믿을 만한 자인가?”
“그분이야 친구의 아버지이긴 한데….”
오벨리아가 아는 이프넌트 후작은 공과 사가 명확하며 잇속에 밝은 자였다.
아무리 소꿉친구의 아버지라지만, 백 퍼센트 믿을만한 상대냐고 묻는다면 확신할 수 없었다.
“아니, 내가 말하는 건 제이즈먼 이프넌트가 아니라 에드먼드 이프넌트다. 그가 이번에 후작이 되었어.”
“…에드먼드는 신성 제국에 있는 거 아니었어?”
오벨리아가 아는 에드먼드는 후작이 되기를 원하지 않았다.
그가 오벨리아와 함께 아카데미를 졸업한 이후, 성인이 되자마자 도피하듯이 신성 제국으로 유학을 떠난 이유도 거기에 있었다.
그런데 그런 에드먼드가 갑자기 후작이 되다니.
그녀로서는 예상한 적도 없는 일이었다.
“너를 도우려고 했다면 후작으로서의 권력이 필요했겠지. 최근 들어 이프넌트 후작이 새로운 황제가 하려는 일마다 사사건건 막아선다는군.”
오벨리아는 신의와 사랑을 믿는 사람이었다.
오랜 소꿉친구인 두 사람은 똑 닮아서, 에드먼드 또한 그러했다.
그리고 두 사람의 공통점이 또 있었으니- 그들은 결코 배신한 자를 용서하지 않았다.
오벨리아가 아는 에드먼드라면 제 친구를 위해서 그렇게 해 줄 수 있는 위인이었다.
그러나 그녀는 주춤하고 말았다.
오벨리아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그녀의 안에 어떠한 불신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내가 알고 있는 에드먼드가, 과연 진짜일까?’
제가 구한 사촌 자매에게 뒤통수를 맞고, 8년을 사랑하여 헌신한 남편에게 속은 오벨리아였다.
그녀는 자기 자신의 판단을 믿을 수가 없었다.
만약에 알렉산드로와 반목하는 것조차 남들에게 보이기 위한 거짓이라면 어떻게 한단 말인가.
“네가 아는 에드먼드 이프넌트는 어떤 사람이었지?”
에크하르트가 일부러 허리를 굽혀 오벨리아와 똑바로 시선을 마주쳤다.
한없이 흔들리던 그녀의 두 눈이 길을 찾은 듯 그에게로 향했다.
“에드먼드는….”
오벨리아가 어렵사리 입을 뗐다.
“집안끼리 가깝다 보니 아주 어릴 때부터 만나서 나랑 싸우기도 많이 싸웠지만, 그만큼 서로를 잘 아는 친구였지.”
그러고 보니 황궁을 그렇게 빠져나온 이후로 그녀의 개인적인 관계에 대해 입을 여는 건 처음이었다.
“내가 아는 에드먼드는 자유분방하지만, 도를 넘지 않고… 또….”
오벨리아의 목소리에서 그리움이 물씬 묻어났다.
가장 좋은 시절의 친구였다.
자신도 모르게 감정이 뒤따라오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에크하르트는 그것을 묵묵히 들어주었다.
그리고 마침내 이야기가 끝났을 때, 오벨리아는 인정했다.
그녀는 에드먼드를 믿고 싶었다.
정말로.
“에크하르트, 부탁할 게 있어.”
그래서 오벨리아는 확신이 필요했다.
에크하르트는 그녀의 부탁을 거절하지 않았다.
***
오벨리아가 일리어스의 소재를 파악하려면 어쨌든 에드먼드를 만나야만 했다.
그래서 그녀는 에크하르트를 통해 자신의 묘지에 에드먼드만이 알아볼 수 있는 표식을 남겨 놓았다.
오벨리아와 에드먼드가 어린 날 장난삼아 만든 서로만이 아는 암호였다.
<비밀 장소로 와.>
오벨리아는 그렇게 적어 놓은 뒤, 에드먼드가 제 묘지를 찾을 날을 기다렸다.
그렇게 꼬박 일주일이 흘렀다.
그리고 마침내 묘지를 지키며 기다리던 에크하르트의 수하에게서 연락이 왔다.
“나도 함께 가겠다.”
오벨리아가 적어 놓은 대로라면, 오늘 오후쯤 에드먼드를 볼 수 있을 터였다.
그러나 에드먼드에게 다른 꿍꿍이가 있다면 그녀 혼자 보낼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리하여 에크하르트는 오벨리아의 호위를 자처했다.
“위험할 수도 있어. 그냥 다른 기사랑 함께 갈게.”
만약 무슨 일이 생기더라도 오벨리아나 에크하르트 둘 중 하나는 무사해야만 했다.
그래야 복수를 할 수 있을 테니까.
오벨리아는 에드먼드가 자신을 배신하리라 생각하고 싶지 않았으나, 이미 당한 게 있는 그녀로서는 최악의 상황을 가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내가 갈 거다.”
그러나 에크하르트는 타협 따위 없다는 듯 단호하게 말했다.
오벨리아가 아무리 안 된다고 해도, 그가 그녀의 말을 듣지 않으면 그만이었다.
결국 오벨리아는 에크하르트와 함께 에드먼드와 어린 날 함께 노닐던 카테리안느 저택의 뒤편 산으로 향했다.
산을 오르는 동안 점차 산길의 경사가 높아지자, 에크하르트가 말없이 오벨리아에게 손을 내밀었다.
그는 무뚝뚝한 얼굴로 손을 거두지 않았다.
“…고마워.”
결국 그녀가 조심히 그 손을 잡았다.
산행은 고됐다.
보통의 사람이라면 길을 찾기도 힘든 어두운 저녁이었다.
경사는 뒷산 정도였기에 산길이 험하지는 않았으나, 극도로 약해진 오벨리아의 몸은 그조차 힘들어했기 때문에 어쩌면 예고된 일이기도 했다.
그리하여 약속 장소까지 도달할 즈음에, 그녀는 거의 에크하르트에게 안기다시피 한 채 산을 오르게 되었다.
“잠깐, 오벨리아.”
그렇게 오벨리아를 챙기며 산길을 걷던 에크하르트의 발걸음이 멈칫했다.
그가 굳은 표정으로 앞쪽을 바라봤다.
“…에크하르트?”
“쉿, 앞쪽에서 다수의 인기척이 느껴진다.”
오벨리아의 어깨에 힘이 들어갔다.
긴장으로 딱딱해진 표정이 선연했다.
그녀와 에드먼드의 비밀 장소는 언제나 소꿉친구만의 비밀이었다.
그리고 오벨리아는 죽다 살아 돌아온 상황이다.
그가 그녀를 배신할 게 아니라면, 굳이 이런 때에 다수의 사람을 데려올 이유 같은 건 없었다.
‘에드먼드가… 정말로 날 배신한 건가?’
오벨리아의 안에서 최악의 가정이 떠올랐다.
그녀의 손끝이 파르르 떨려 왔다.
오벨리아는 이성적으로 상황을 판단하려고 노력했다.
카테리안느와 이프넌트가 모두 알렉산드로의 손에 들어가게 되면 황제의 힘이 지나치게 커진다.
그렇게 되면 복수는 더욱 힘들어질 터다.
그러니까 그럴 경우, 어떻게 대처를 해야 할지 생각해야만 했다.
그런데 머리가 돌아가지 않았다.
배신이란 한 인간의 영혼에 그만큼의 메울 수 없는 구멍을 만드는 짓이었다.
겪어도, 겪어도 익숙해지지 않는 감각이 오벨리아를 감쌌다.
“오벨리아, 정신 차려라!”
에크하르트가 오벨리아의 양 어깨를 붙잡아 그녀를 흔들었다.
다수의 인기척이 두 사람에게로 가까워지고 있는 것이 느껴졌다.
오벨리아가 받았을 충격은 에크하르트가 차마 다 이해할 수 없을 만큼 커다랄 것이지만, 지금 당장은 몸을 피해야만 했다.
“아… 어, 가야지. 가야지.”
오벨리아가 멍하니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가 에크하르트를 따라 인기척과 멀어지기 위하여 걸음을 옮기는 순간이었다.
“오벨리아!”
누군가 문득 오벨리아의 이름을 외친 것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