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화. 진짜와 가짜(4)
일리어스의 표정이 잠시 형용하기 힘들게 변했다.
아그네스의 평판을 나쁘게 만들고 그녀를 고립시켜도 모자를 판에 편을 들라니, 누가 봐도 이상한 말이었다.
“현재 새로운 황제와 그 정부 사이가 썩 매끄럽지 않은 모양이야. 그 상황에서 아그네스 이멜리언이 힘을 가진 것처럼 보이게 하려는 거다.”
“알렉산드로라면 제 정부도 경계할 만하지요.”
일리어스가 그제야 납득한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애초에 알렉산드로의 선택부터 알 만하니까요. 오벨리아가 아닌 그 여자를 고른 이유부터가 그렇지 않습니까.”
일리어스가 짧게 비소했다.
오벨리아가 자신보다 잘났기 때문에 알렉산드로는 그녀를 버렸고 아그네스를 옆에 두었다.
외모야 주관적인 판단에 의한 것이니 그렇다고 쳐도, 객관적으로 봐서 아그네스는 오벨리아보다 잘난 것이 없었다.
정치적 능력이나 학식, 화술, 명성, 가문, 하물며 알렉산드로를 내조하는 것까지 모조리 다 그랬다.
아그네스가 제국의 귀족이 된 지도 몇 년이나 흘렀다.
아그네스는 이멜리언 백작가를 무시했으나, 사실 생각해 보면 무려 그 카테리안느의 친척 가문이었다.
그런 곳이 별 볼 일 없다면, 제국 대다수의 귀족 가문들은 어디에 명함도 못 내밀 터였다.
게다가 오벨리아는 아그네스에 대한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오벨리아가 아그네스를 친 자매처럼 대했다고 한 것은 괜한 말이 아니었다.
그러니 아그네스가 알렉산드로의 정부가 되길 선택하는 대신, 그만한 노력을 했다면 지금처럼 사교계에 고립된 존재는 아니었을 터였다.
그러나 그간 아그네스는 다른 모든 노력을 제쳐두고 알렉산드로의 정부로 살았다.
정부로 조용히 살려면 귀족 사회에서 크게 눈에 띄는 행동을 하지 않는 게 좋긴 했으나, 그러니까 그래 봤자 정부인 거였다.
그런 아그네스가 평생을 카테리안느의 딸답게, 황실 사람답게 노력하며 살아온 오벨리아를 무엇 하나 이길 수 있을 리 없었다.
혈통 따위의 문제가 아니었다.
나고 자란 가문의 핏줄이 아닌 에크하르트나 일리어스만 봐도 그렇지 않은가.
심지어는 마냥 철없는 아가씨처럼 큰 소리를 냈던 레베카마저도 달라졌다.
결국 가진 바에 얼마나 어울리는 사람이 되느냐는 스스로의 선택이었다.
“그렇지. 정말이지, 한심한 작자야.”
에크하르트는 힐켄테데 성에 쳐들어왔던 아그네스를 떠올리며 혀를 찼다.
어떻게든 제가 반드시 주인공이 되고야 말겠다는 것처럼 남의 결혼식에 기어코 새하얗고 화려한 드레스를 입고 왔던 무례한 여자였다.
생각하면 우습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 봤자 오벨리아는 현재 정당한 힐켄테데의 딸이고, 아그네스는 모두가 황제의 정부로 아는데 무슨 옷을 입든 결국 환대받을 사람이 누구겠는가.
심지어 아직 오벨리아 힐켄테데가 오벨리아 카테리안느라는 걸 확인한 것도 아닌데 그런 성급한 태도라니.
만약 아그네스가 현명한 이였다면 외모가 닮았다는 이야기 하나로 적대할 게 아니라, 힐켄테데의 대공비를 제 편으로 끌어들이려 노력했을 터였다.
그런 사람을 황후로 앉히겠다는 알렉산드로는 물론 더더욱 멍청했지만.
“대공 전하께서 말씀하신 대로 해 드리겠습니다. 다만, 제 동생과 대공 전하께서 무슨 사이인지 듣고 난 뒤에요.”
“…그래, 알겠다.”
에크하르트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그간 있었던 일을 일리어스에게 꺼내놓았다.
그리고 대다수의 이야기가 끝났을 때, 일리어스가 물었다.
“그런데 오벨리아의 머리칼은 어떻게 된 겁니까?”
에크하르트가 이야기 속에서 몇 가지 사실을 빼놓았기 때문이다.
예컨대 오벨리아가 사변의 범인을 알면서도 침묵했다던가, 그녀가 시한부가 되었다던가 같은 류의 것들 말이다.
오벨리아의 치부나 아픔을 제 입으로 털어 놓고 싶지 않았다.
에크하르트는 그걸 말할지 말지에 관해서는 그녀가 결정해야 할 일이라고 여겼다.
“상황을 파악하기 위한 대략적인 건 다 말해 줬으니, 그건 그대가 직접 물어보도록 해.”
결국 에크하르트는 그날 거기서 이야기를 마무리 지었다.
에크하르트의 태도가 워낙 단호했던 탓에, 일리어스 또한 더는 묻지 않았다.
***
오벨리아가 깨어났을 때는 해가 중천에 뜬 한낮이었다.
열로 인해 지쳐 쓰러지듯 잠이 든 탓인지 악몽을 꾸지 않았고, 그로 인해 오래간만에 푹 자고 일어나 머릿속이 맑게 갠 기분이었다.
“일어나셨어요, 아가씨?”
오벨리아가 몇 번 두 눈을 깜박이자, 그녀의 옆을 지키고 있던 하녀가 깨어났음을 눈치챘는지 말을 걸어왔다.
오벨리아가 다소 멍한 눈으로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제니퍼.”
익숙한 얼굴이 오벨리아의 눈에 들어왔다.
이프넌트 후작저의 하녀로, 어린 오벨리아가 후작저에서 에드먼드와 어울리다가 잠이 들면 그녀를 전담하여 돌봐주던 사람이었다.
그제야 오벨리아는 자신이 익숙한 곳에 있다는 사실이 실감 났다.
“다들 아가씨가 깨어나길 기다리고 계셨어요. 열도 내리신 거 같으니 다행이네요.”
제니퍼가 오벨리아의 이마를 짚으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녀가 7황자비로 내정된 이후, 십 년 넘게 보지 못한 제니퍼의 얼굴에는 주름이 져 있었다.
새삼스럽게 그만큼이나 시간이 흘렀다는 게 실감이 났다.
“우리 아가씨, 그간 고생이 많으셨나 봐요. 아가씨가 이렇게 곤히 주무시는 것도 오랜만에 보네요.”
오벨리아가 아무 말도 없이 자신의 얼굴만 바라보고 있는 것을 제니퍼는 이상하게 여기지 않았다.
도리어 그 주름진 손으로 몇 번이고 그녀의 얼굴을 매만져 줄 뿐이었다.
얼마만의 평온함이었을까.
오벨리아는 자신도 모르게 다시 눈을 감을 뻔했다.
그러나 제니퍼의 손에 걸린 제 새하얀 머리칼이 눈에 들어오는 순간, 그녀는 다시 현실로 돌아왔다.
오벨리아를 현실로 내동댕이치는 것들은 언제나 이런 사소한 점이었다.
“제니퍼, 사람들에게 내가 깨어났다고 알리고 준비를 도와주겠어?”
오벨리아가 무거운 몸을 일으켰다.
황궁을 나오기 전보다 훨씬 마른 몸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상체 하나 일으키는 것이 퍽 힘들게 느껴졌다.
그래, 그녀는 죽어가고 있었다.
오벨리아에게는 낭비할 시간이 없었다.
“하지만, 다들 아가씨께서 조금 더 쉬셔야 한다고… 게다가 이제야 열이 내리셨는걸요.”
제니퍼가 난감한 얼굴로 오벨리아를 쳐다봤다.
그러나 그녀에게서 나오는 대답은 단호했다.
“제니퍼, 두 번 말하고 싶지 않아.”
어린 아가씨에게서는 찾아볼 수 없었던 싸늘함에 제니퍼가 잠시 멈칫했다.
그러나 곧 제니퍼는 고개를 끄덕이며 방을 나섰다.
그 시선 끝에 안쓰러움이 담겨 있었으나, 오벨리아는 그것을 모른 척했다.
***
똑똑똑.
제니퍼의 도움을 받아 간단한 치장을 모두 마치고 나자, 가장 먼저 방으로 찾아온 것은 에크하르트였다.
“벌써 일어나지 않는 게 좋을 텐데.”
“에크하르트, 누누이 말하지만, 나한테는 지체할 시간이….”
“카테리안느 공자와 이프넌트 후작은 네 상태를 모르지 않나.”
자리에서 일어나던 오벨리아의 몸이 멈칫했다.
그녀가 조금 놀란 얼굴로 에크하르트를 쳐다보자, 그가 담담히 시선을 마주하며 대꾸했다.
“네가 나를 구했던 일과 첫 만남, 그리고 함께해 온 일 정도만 말했다. 네 몸 상태나 그 외의 상세한 것들을 말하지 말지는 네가 정할 일이니까.”
오벨리아의 입이 다물렸다.
그녀는 그제야 에크하르트가 에드먼드나 일리어스보다 먼저 찾아온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오벨리아가 바실리스크의 독을 마셨던 일, 오벨리아가 힐켄테데 사변의 범인을 알면서도 침묵했던 일 같은 것은 말하지 않았다고 따로 전하러 온 것이다.
그 점을 알고 있어야 그의 말대로 사실을 밝힐지 아닐지에 대하여 그녀가 스스로 정할 수 있을 테니까.
오벨리아는 자신이 잠든 사이에 에크하르트가 모든 사실을 이야기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힐켄테데 사변에 관한 일은 오벨리아가 스스로 혼자만 알도록 묻어 둔 비밀이었다.
황궁 암투를 벌이면서 별 책략을 다 써 봤으나, 그건 대체로 오벨리아도 받은 만큼 돌려줬을 뿐이었다.
황궁에서는 먼저 치지 않으면 당하는 게 순리였으니까.
그러나 힐켄테데 사변은 달랐다.
그날, 힐켄테데 저택에 있던 평범하고 무고한 이들까지도 모두 죽었고 오벨리아는 그 일을 묵인했다.
그건 학살이었다.
학살에서 구할 수 있는 이들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그러지 않았다.
일에 관련된 모두가 사라지는 편이 비밀을 영원히 묻어 버리기에 가장 좋은 방법임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오벨리아가 인생에서 저지른 가장 큰 죄악.
꼽으라면 그녀는 망설임 없이 그 날을 고를 터였다.
누구한테 말해서도 안 되는 비밀이었으나 솔직히 말하자면 그래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들키고 싶지 않았으니까.
그러니까 일리어스는 그녀가 에크하르트를 생전 만난 적 없는 것으로 알고 있을 테고, 그렇다면 두 사람이 함께 있는 것에 당연히 의문을 가졌을 터였다.
모두 말하는 편이 에크하르트로서는 오벨리아와의 관계를 설명하기 쉬웠을 것이다.
그런데 굳이 말하지 않았다는 것은 몸 상태뿐 아니라- 힐켄테데 사변에 관한 진실을 말할지 말지조차, 선택권을 그녀에게 주겠다는 말이었다.
왜, 그 선택권을 자신에게 주려고 하는지 오벨리아는 알 수 없었다.
“…왜 말하지 않았어?”
그래서 오벨리아는 묻고 말았다.
도저히 에크하르트의 행동이 이해가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내가 힐켄테데에 무슨 죄를 지었는지 말을 하지 않으면… 당신만 억울해질지도 모른다는 걸 충분히 알고 있을 텐데?”
오벨리아는 바실리스크의 독을 먹어 은발이 되었기에 힐켄테데의 딸이 될 수 있었다.
그리고 힐켄테데의 딸과 결혼함으로써 에크하르트는 정통성을 확보하고 북부의 완벽한 주인이 되었다.
힐켄테데 사변에 얽힌 일을 밝히지 않는다면, 이 모든 과정에서 단지 에크하르트가 오벨리아를 이용하기 위해 독을 먹도록 방관했다 오해를 살지도 몰랐다.
그도 이 점을 모를 리가 없을 텐데, 자신에게 선택권을 준다는 게 그녀는 정말 이해되지 않았다.
“상관없다.”
이어지는 에크하르트의 대답은 더더욱 어려웠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