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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한부 폐태자비는 살아있다-42화 (42/136)

42화. 진짜와 가짜(5)

오벨리아는 순간 할 말을 잃었다.

상관없다니.

에크하르트가 어떻게 그런 말을 할 수 있다는 말인가.

“그게 어떻게 상관없어…?”

오벨리아의 목소리가 자신도 모르게 떨렸다.

그녀가 알렉산드로와 아그네스로 하여금 지독한 증오를 배우고 나서 알게 된 것이 있었다.

처음부터 그럴 생각 따위 하지도 않았지만, 자신은 영원히 힐켄테데의 사람들에게 용서받을 수도 없고 그래서도 안 됐다.

“엄연히 당신한테 가해자는 나고, 피해자는 당신인데?”

자신이 흘리게 만든 피눈물의 대가를 그녀는 치러야만 하니까.

설령 사랑하는 오빠나 친구에게 비난받는다고 할지라도, 그것은 온전히 오벨리아의 몫이었다.

에크하르트가 그런 것까지 고려해 줄 이유 따위 전혀 없다는 말이다.

“…왜 이렇게 반응하는지 모르겠군. 너에게 좋은 것 아닌가?”

에크하르트가 작게 한숨을 삼켰다.

오벨리아가 이런 격한 반응을 보일 줄 몰랐던 탓이었다.

“나는…!”

“나는 카테리안느 공자나 이프넌트 후작에게 좋은 사람이 되고 싶다는 생각 따위 없어.”

목소리가 높아지려는 오벨리아의 말을 끊고 에크하르트가 먼저 말을 이었다.

“그렇지만 너는 다르지 않나.”

그리고 에크하르트의 말은 오벨리아의 정곡을 찔렀다.

그간 자신이 사랑하는 이들에게만큼은 제 죄악을 들키고 싶지 않았던 그녀의 속내를 아주 정확히.

“그러니까 굳이 말할 필요 없어.”

에크하르트가 담담하게 말했다.

오벨리아는 어떤 대답도 할 수 없었다.

그에게 들킨 마음이 부끄러웠다.

무엇보다 저를 이해하려 드는 에크하르트의 마음이 무거웠다.

그래, 지나치게 무거워서.

“…아니, 말할 거야.”

오벨리아는 그 마음을 피해 버렸다.

잠깐의 침묵 후에 단호하게 돌아온 그녀의 대답에 에크하르트의 표정이 굳어졌다.

당연히 기껏 신경을 썼더니 단박에 거절당해 기분이 좋은 사람은 없을 터였다.

오벨리아는 그의 기분이 상했으리라 생각하면서도 기어코 말을 이었다.

“그러니까 에크하르트, 당신의 이런 배려… 필요 없어.”

에크하르트의 미간이 완전히 찌푸려졌다.

하. 그가 짜증스러운 한숨을 삼키며 헛웃음 지었다.

“누가 보면 내가 너와 대단한 거라도 하자고 한 줄 알겠군.”

에크하르트에게서 연이어 툭 말이 흘러나왔다.

“오벨리아, 넌 별것 아닌 일도 꼭 이렇게 선을 긋지.”

오벨리아의 어깨가 눈에 띄게 움찔했다.

에크하르트의 말대로 그녀가 지레 겁을 먹고 과하게 그의 배려를 밀어낸 게 맞았기 때문이다.

“괜한 헛물 들이키지 마, 내가 너를 동정한다고 해도 나와 네 관계가 달라지는 건 아니니까.”

에크하르트가 서늘한 어조로 못을 박듯 말을 덧붙였다.

“네 말대로, 네가 힐켄테데에 벌어진 일에 관한 방관자라는 사실을 내가 잊을 리 없지 않나.”

그 순간 오벨리아의 안색이 가라앉고 빠르게 침착해졌다.

에크하르트의 말이 옳았다.

그녀가 그로서는 개의치도 않는 배려에 흔들리든 말든 그들의 관계는 변하지 않는다.

오벨리아가 에크하르트에게 지은 죄가 있으니까.

그 사실을 간과한 것은 오히려 자신이라는 생각이 들자, 그녀의 창백한 뺨이 조금 붉게 달아올랐다.

변화 없을 관계에 안도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에크하르트는 별거 아니었을 마음에 홀로 예민하게 반응한 것이 부끄러워졌다.

평생 미움 받아 마땅할 짓을 하고도 어쩌면 기대를 품은 것일까.

오벨리아는 스스로가 파렴치하다는 생각에 두 손으로 자신의 얼굴을 가렸다.

“미안해, 에크하르트.”

오벨리아는 창피해서 차마 에크하르트를 마주 볼 수 없었다.

“모두 다 말하든가 말든가는 너 알아서 해. 말 그대로 선택권을 주었을 뿐이니.”

에크하르트는 그 말을 끝으로 방을 나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벨리아는 한동안 얼굴을 가린 손을 내리지 못했다.

그간 그를 굳이 밀어냈던 일들이 새삼 창피하게 느껴진 탓이었다.

어딘가로 딱 숨고 싶은 기분이었다.

***

회의를 위해 모인 자리에서 일리어스는 에크하르트를 보자마자 허리를 숙였다.

“잃어버린 목숨은 무엇으로도 보상이 불가하겠지만… 힐켄테데에 진 죄와 받은 은혜는 카테리안느가 꼭 갚도록 하겠습니다.”

일리어스는 에크하르트가 허락하지 않으면 평생 허리를 숙이고 있을 기세였다.

그 태도가 지나치게 정중했다.

오벨리아가 스스로의 말대로 기어코 제 오빠에게 모든 것을 말한 모양이었다.

“…미련한 여자.”

작게 중얼거린 에크하르트가 일리어스에게 손짓했다.

“됐으니 자리에 앉아.”

“하지만… 제 동생의 머리색을 바꿀 수 있도록 약을 구해 주시고, 힐켄테데 저택에 머무를 수 있게 해 주신 것 또한 대공 전하라고 들었습니다. 그냥 넘어갈 수는….”

그러나 대충 넘어가려던 에크하르트는 이어지는 일리어스의 말에 멈칫하고 말았다.

“…뭐?”

자신이 무얼 구해 줘?

에크하르트가 기가 차 헛웃음을 지었다.

미련하다, 미련하다 했더니, 오벨리아가 정말로 미련한 짓을 했다.

그의 잘못은 쏙 빼 놓고 그녀의 잘못만 말하지 않았던가.

심지어 그 잘못을 오히려 에크하르트가 은혜를 베푼 양 둔갑시켜서.

“그게 아니다.”

에크하르트가 딱 잘라 말했다.

그러자 일리어스가 의아한 기색으로 물었다.

“무엇이 아니라는 말씀이신지….”

곧바로 오해를 바로잡으려던 에크하르트가 난감한 기색을 삼켰다.

전부 사실대로 정정하자면, 오벨리아가 시한부라는 사실도 밝혀야만 했다.

일리어스는 아직 그것을 모르는 기색이니 어떻게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머리색을 바꾸는 약이라니, 무슨 그런 변명을 한단 말인가.

허술하기 짝이 없었다.

대륙 위에 검은 머리칼을 갈색으로, 갈색 머리칼을 탁한 금색으로 바꾸는 방법은 있어도 새하얀 은발이 되는 방법 같은 건 존재하지 않았다.

그래서 힐켄테데의 정통성이 머리칼과 눈의 색 하나로 증명 가능한 것이었다.

그러나 일리어스는 제 동생의 말이라면 태양을 두고 달이라고 해도 믿을 사람이다.

무엇보다 오벨리아도 도박에 성공했을 뿐, 사실 바실리스크의 독을 마시고 살아남은 사람은 대륙의 긴 역사 동안 다섯 손가락에 꼽았다.

바실리스크의 독을 먹고도 살기란 사람이 살다가 벼락 맞을 만큼이나 어려웠다.

그녀가 독을 마시고 죽지 않은 것은 기적이었다.

그러니 일리어스가 오벨리아의 머리칼 색이 바뀐 이유에 대하여 다른 원인을 의심하지 못할 만도 했다.

그래도 그렇지, 독을 건네 준 것이 자신인데 도리어 은인이 되다니.

에크하르트는 참기 어려웠다.

“내가 오벨리아를 도운 것이 아니라, 그녀 스스로 힐켄테데에 들어올 방법을 찾아낸 거야.”

결국 에크하르트는 일부라도 정정하기로 했다.

“그 과정에서 오히려 나는 힐켄테데의 딸이 된 오벨리아와 결혼해서 이득을 봤으면 봤지, 도운 것은 없어.”

“그렇지만….”

“내 말이 옳아. 그대 동생이 왜 그렇게 말했는지 궁금하면, 회의가 끝난 후에 직접 물어보도록 해.”

에크하르트가 응접실로 들어오는 오벨리아를 가리키며 말했다.

그가 생각하기에 그녀는 자신이 시한부라는 사실을 다른 이들에게 말할 생각이 없는 듯 보였지만.

일리어스가 오벨리아의 쪽을 돌아봤다.

그러나 곧 그 뒤를 이어 에드먼드 또한 문을 열고 들어왔기 때문에, 일리어스는 제 동생에게 아무 질문도 할 수 없었다.

그렇게 모두가 자리에 앉자마자, 에드먼드가 말을 꺼냈다.

“알렉산드로 놈이 미끼를 물었습니다.”

그 음성이 통쾌하다는 듯 들떠 있었다.

***

아그네스는 근래 기분이 좋았다.

왜냐하면 알렉산드로가 있을 때나 저를 대접하던 황실 2기사단의 기사들이 이제야 비로소 그녀를 제대로 모시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바로 어제도 답답하여 밖으로 나가고 싶다는 아그네스의 말을 흔쾌히 들어준 기사 덕에, 그녀는 오래간만에 파티장에 참석할 수 있었다.

그간 황궁에만 얌전히 있길 바라는 알렉산드로 탓에 얼마나 답답했는지 몰랐다.

아그네스는 그가 그동안의 일로 미안하여 기사들에게 특별히 명령한 것이리라고 생각했다.

그러지 않고서야 지금까지 그녀를 보는 둥 마는 둥 했던 황실 2기사단의 기사들이 돌연 태도를 바꿀 리 없었기 때문이다.

솔직히 아그네스는 그간 알렉산드로가 자신에게 너무했다고 여겼다.

이멜리언 백작가의 입양아로 있을 때는 상상도 할 수 없던 드레스와 보석을 이제야 누릴 수 있게 되었는데 안에만 틀어박혀 있으라니.

그녀가 그에게 너무하다고 해도 할 말이 없으리라.

“늙은 선황이 황후 간택령을 내리라고 성화인 판에, 내가 귀족들 사이에서 입지라도 다져 놔야 안 밀릴 거 아니야?”

아그네스가 볼멘소리로 중얼거렸다.

그렇지 않아도 여태껏 어떤 지위도 받지 못해 자신을 무시하는 자들이 늘어가는 판이었다.

그런데 그녀가 숨죽이고 지내 봤자 무어가 좋아진단 말인가.

그런 의미에서 어젯밤의 파티는 아그네스를 더더욱 만족하게 할 수밖에 없었다.

현 황제의 직속이라고 할 수도 있는 황실 제 2기사단이 아그네스에게 깍듯이 정중하게 굴자, 다른 귀족들도 어제만큼은 그녀를 완전히 무시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황실 기사단이 모실 상대는 평생 황족뿐이고, 황후 간택령은 아직 내려지지 않았다.

그러니 황제가 자신의 유일한 정부인 아그네스를 정말 황후로 만들 모양이라고 귀족들이 추측하는 것쯤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아무리 현재 정부일 뿐일지라도, 아그네스가 정말 미래의 황후가 될 거라면 귀족들로서는 그녀와 잘 지내지 않을 수 없었으니까.

벌컥!

갑작스럽게 방문이 열리기 전까지, 아그네스의 기분은 정말이지 하늘을 달리고 있었다.

“감히 누가 황후의 방문을 함부로 열… 알렉?”

그러나 알렉산드로가 잔뜩 화가 난 얼굴로 문을 쾅 닫을 때, 아그네스는 그제야 무언가가 잘못되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감히 내 기사들을 함부로 회유해?”

그러나 알렉산드로는 이미 분노에 차 아그네스에게 쏘아붙일 따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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