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화. 진짜와 가짜(6)
알렉산드로는 분노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가 일을 처리하기 위하여 단 하루 황궁을 비운 사이, 아그네스가 제 명령을 어긴 채 자신의 기사들을 데리고 파티장에 나섰기 때문이다.
“회유라니…! 난 그런 적….”
당연히 아그네스는 억울했다.
지금까지 그녀의 외출을 막기만 하던 기사들이 혹시나 한 질문에 파티에 가도 좋다고 했고 그래서 다녀왔을 뿐이었다.
그런데 자신이 알렉산드로의 기사들에게 무슨 짓을 했다는 말인가.
“입 닫아! 네가 그러지 않고서야 내 기사들이 내 허락도 받지 않고 얌전히 너를 따라가 파티장에서 호위까지 해 줬다는 건가?”
그러나 알렉산드로는 아그네스의 말을 들을 생각이 전혀 없는 듯, 그녀의 말을 뚝 끊어 버렸다.
그러나 그가 이런 태도를 보인다고 마냥 질 그녀가 아니었다.
“알렉, 어떻게 날 의심할 수 있어?!”
아그네스가 지지 않고 목소리를 키웠다.
“그리고 어차피 날 모실 자들이기도 한데 내가 좀 데려가면 어때서! 황후가 되면 그들은 내 사람이기도 한 거 아냐?!”
그러나 그 순간, 알렉산드로의 두 눈이 휙 돌았다.
그가 거칠게 아그네스의 양어깨를 잡아챘다.
“악…! 아파…!”
알렉산드로의 아귀힘이 사정없이 아그네스를 옥죄자, 그녀는 벗어나기 위해 본능적으로 발버둥 쳤다.
그러나 알렉산드로는 기사고 아그네스는 임산부였다.
결국 힘의 차이에 의해 벗어나지 못하고 그대로 붙잡힌 그녀의 눈에 눈물이 맺혔다.
어깨가 욱신거리고 아팠다.
“잘 들어, 아그네스 이멜리언. 내 사람, 내 권위, 내 것 그 무엇 하나 네 멋대로 침범하려 들지 마.”
알렉산드로는 그런 아그네스를 전혀 개의치 않고 매서운 눈으로 경고했다.
그의 눈은 일순 회까닥 돌기라도 한 것처럼 어딘가 비정상적이었다.
“…뭐?”
그러나 아그네스가 충격 받은 것은 알렉산드로의 눈이 어땠는지 따위가 아니었다.
알렉산드로의 말은 그가 앞으로 가지게 될 권력으로부터 그녀를 철저히 유리시키고 있었다!
그렇다면 아그네스가 그 몇 년간 정부 따위로 살며 버텨 온 시간은 무어란 말인가.
“…나한테, 나한테… 뭐든, 다 준다며?”
아그네스는 알렉산드로가 제게 속삭였던 달콤한 말들을 기억했다.
오벨리아만 끌어 내리고 나면 제가 원하는 것은 뭐든지 이루어 주겠다고 했던 그 약속은 도대체 어디로 갔단 말인가!
“그러니까, 내가 주는 것들만 받으면 되잖나. 설마 그 많은 것이 부족했다고 할 건가?”
아그네스의 두 입술이 꾹 다물렸다.
‘내가 네 애완동물이야…?! 주는 것에만 만족하고 꼬리를 흔들게!’
아그네스는 순간 울컥하여 내뱉을 뻔한 말을 가까스로 삼켰다.
적어도 그 정도의 사리 분별은 할 줄 알았다.
“예쁘게 굴어, 아그네스. 네 장점이잖아.”
아그네스가 더는 자신의 말에 반박하지 않자, 알렉산드로가 마침내 그녀의 어깨를 잡은 손에서 힘을 풀었다.
그의 손이 짐짓 다정한 척 아그네스의 뺨을 쓰다듬었다.
그녀는 입매가 비틀리려는 것을 눌러 참았다.
이건 반려동물도 아니고 완전히 애완동물 취급이었다.
재롱이나 피우고 예쁘게 굴어야 그에 상응하는 칭찬을 내려주는 존재.
자존심이 팍 상했다.
그래도 아그네스가 어쩔 수 있는 것은 없었다.
“괜히 나서지 말고 원하는 것이 있으면 말해. 내가 주겠다고 했잖아.”
알렉산드로의 말은 빛깔만 좋은 개살구였다.
아그네스는 파티장에 가고 싶었고, 그는 그녀를 내보내려 하지 않았다.
그러니까 알렉산드로의 말에서 요점은 원하는 것이 있으면 말하라는 게 아니라, 나서지 말라는 것이었다.
아그네스가 바라는 바를 들어주는 건 결국 그가 원하는 한도 내에서일 뿐에 불과했다.
“…내가 잘못했어.”
아그네스가 알렉산드로를 끌어안으며 그의 품에 고개를 묻었다.
반성해서?
웃기는 소리.
아그네스는 화가 났다.
그녀는 다만 자신의 표정을 숨겨야 했을 뿐이었다.
화가 났든 뭘 했든, 결국 아그네스의 권력은 알렉산드로부터 나오니까.
잘못했다는 말은 속 빈 강정일 뿐이었다.
알렉산드로는 상대가 자신에게 낮추는 것을 좋아하니까.
“그렇지만 정말 회유라든가 그런 건 아니야. 나한테 뭐가 있어서 알렉의 기사들이 넘어오게 할 수 있겠어.”
아그네스는 일부러 더욱 사근사근한 목소리를 냈다.
“내가 가진 것들 전부 다 결국 너의 것일 뿐인데.”
아그네스는 자신에게는 오직 알렉산드로뿐이라는 것처럼 말을 덧붙였다.
“알렉, 네가 없으면 내게는 아무것도 없어.”
아닌 말이 아니라, 알렉산드로와 완전히 사이가 틀어져 그가 아그네스에게서 주었던 것들을 앗아가면 그녀는 빈털터리였다.
아그네스가 황후라도 되었다면 모르겠지만, 그녀는 겨우 황제의 정부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이 상태로 알렉산드로에게 버려지면 그보다 최악은 없었다.
아그네스는 이미 한 번 황제의 정부라고 사교계에 낙인찍혔다.
즉, 그녀에게는 새롭게 찾을 혼처조차 남지 않았다는 말이다.
그때가 되면 정말이지 아무 쓸모도 없어진 입양 딸을 이멜리언 백작가가 품어 줄까?
아그네스는 그들을 불신했다.
“…그건 그렇지만.”
알렉산드로도 그 사실을 모를 리 없었다.
그가 그제야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알렉산드로는 기어코 한 마디를 덧붙였다.
“그래도 내 기사들을 허락 없이 데리고 나간 건 네 잘못이야, 아그네스.”
아그네스가 순간 이를 악물었다.
도대체가 좀처럼 쉽게 넘어가는 법이 없었다.
“다음부터는 꼭 알렉에게 허락받을게.”
그러나 이번에도 아그네스는 나긋나긋하게 대답했다.
그녀는 새삼 깨달았다.
권력이 스스로의 손에 없다는 것은 이럴 때 화조차 내지 못함을 의미했다.
아그네스가 고개를 숙인 채 눈을 번뜩였다.
그래, 그녀가 가진 모든 것은 알렉산드로의 것이었다.
아그네스는 그래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상황이 조금 나빠지자마자 알렉산드로의 태도가 얼마나 달라졌는지를 보라.
이런 그의 사랑 하나를 믿고 어떻게 평생을 살겠는가.
물론, 겨우 알렉산드로의 사랑이 전부인 양 살 생각은 없었기에 임신을 한 것이었지만.
그렇지만 아이가 태어나려면 아직도 몇 달을 더 기다려야만 했다.
아이가 자라 아그네스의 편을 들어주려면 더더욱 오랜 나날이 흘러야 할 터였다.
오늘따라 그녀는 그 시간들이 까마득하게 느껴졌다.
“오늘 윽박질러서 미안해.”
성질낼 것들을 모두 내고 나서야 알렉산드로는 진정한 모양이었다.
그가 돌연 사과를 해 왔다.
“아냐, 내 잘못인걸. 난 괜찮아.”
아그네스는 도리어 자신이 미안한 것처럼 기가 죽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러나 사실은 알렉산드로의 사과 따위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그래, 다음부터는 그러지 마.”
알렉산드로가 아그네스를 달래듯이 등을 쓰다듬으며 더욱 꽉 끌어 안아 주었다.
그녀는 그에게 안긴 채로 생각했다.
자신만의 권력을 만들어야겠다고.
***
카테리안느 공작을 죽이고 오벨리아를 끌어 내릴 계획을 세운 주축은 알렉산드로와 아그네스 그리고 라이너스다.
그러나 이들의 행동에 동조한 이들이 분명 있을 터였다.
오벨리아는 당연하게도 이들 또한 가만히 둘 생각 따위 없었다.
알렉산드로가 황제가 된 이후 크게는 영지를 하사받거나 작위가 오르고 작게는 영지의 세율이 내려가는 등 자잘한 이윤을 본 자들을 솎아내는 건 어렵지 않았다.
에크하르트가 황궁 내에 심어 둔 자들이 생각보다 많았던 것이다.
하긴, 명확한 물증만이 없었을 뿐 그 또한 힐켄테데 사변의 범인으로 황실을 의심하고 있었으니 그럴 만도 했다.
그러나 에크하르트가 오벨리아에게 정보를 전달해 주면서 놀란 점은 따로 있었다.
“오벨리아, 혹시 황궁 내에 힐켄테데의 사람이 어디에 심겨 있는지 알고 있었던 건가?”
황궁에 에크하르트를 불러들였을 때도 그랬지만, 오벨리아는 어디에 첩자들이 있는지 지나치게 잘 알고 있었다.
다시 만났을 때부터 그녀는 폐궁을 지키는 기사 중 힐켄테데의 사람이 있으리라 확신하지 않았던가.
오벨리아는 이번에도 제3 회의실, 황제의 서재, 황후궁의 빨래방 등 에크하르트가 그곳의 정보를 모를 리 없다는 것처럼 굴었다.
오벨리아가 요구하는 정보들은 에크하르트의 사람이 정확히 그 위치에 있지 않다면 알기 어려운 것들이었다.
역시나 그의 추측이 어긋나지 않았던지, 그녀가 말을 뚝 멈추며 흠칫했다.
“…알고 있었어.”
그러나 다시 만난 이후로 언제나 그랬듯, 오벨리아가 상황을 모면하기 위하여 거짓을 둘러대는 법은 없었다.
에크하르트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그가 그동안 수많은 첩자를 황궁에 심어 두었음에도 힐켄테데 사변에 황실이 관여했다는 증거만은 잡을 수 없던 이유가 또 여기 있던 셈이었다.
“네가 황궁의 정보를 조절해 왔던 거군.”
어차피 모두가 황궁에 제 사람을 심고자 애를 쓴다.
하나가 빠지면 둘이 들어오고, 셋이 사라지면 넷으로 어느덧 늘어나 있는 게 황궁의 첩자였다.
아무리 황족들이 사람을 칼같이 골라내도 수백 수천의 인간이 일하는 황궁의 세밀한 곳까지 매번 신경 쓸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럴 바에는 오벨리아처럼 첩자가 누군지 알아 두고, 그자에게 내어줄 정보를 선별해서 알게 하는 것이 훨씬 현명한 선택이었다.
그렇게 하면 결국 첩자들이 알아가는 정보들은 황실에서 진짜로 숨기고 싶은 비밀은 아닐 테니까.
“하… 그러니까, 내가 3년 동안 증거는 잡히질 않고 제자리를 빙빙 도는 기분이 들었던 것 또한 너 때문이라는 거고.”
에크하르트가 거칠게 제 머리칼을 쓸어 올렸다.
그는 힐켄테데 사변의 진실을 몰랐고, 오벨리아는 알았다.
그러니 그녀가 에크하르트에게서 진실을 숨기는 건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그러나 동시에 에크하르트는 기억하고 있었다.
힐켄테데가 3년 만에 빠르게 재건될 수 있던 이유.
그것은 황실에서 빼낸 정보로 사업적, 정치적인 면에서 상당한 이득을 봤기 때문이었다.
악어의 눈물이라고 해도 오벨리아의 행동이 도움이 됐던 것 또한 사실이었다.
에크하르트의 머릿속이 또 다시 복잡해졌다.
그가 짜증스러움을 눌러 참으며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