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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한부 폐태자비는 살아있다-44화 (44/136)

44화. 진짜와 가짜(7)

“대체, 매번 나보고 널 어떻게 대하란 건지 모르겠군.”

에크하르트가 한숨을 삼켰다.

정말이지, 그의 진심 그대로가 담긴 말이었다.

오벨리아는 에크하르트가 힐켄테데 사변에 대하여 증거를 얻는 것도 방해했지만, 힐켄테데가 다시 일어서는 걸 돋기도 했다.

힐켄테데 사변 때도 마찬가지다.

그녀는 힐켄테데에 일어나는 일을 방관했으나 그만은 살렸다.

사실 황국에 적을 두고 있는 오벨리아가 황제의 명을 거역하고, 제 남편과 척을 진 채 힐켄테데를 돕기 힘들었다는 건 에크하르트도 모르지 않았다.

솔직히 그녀가 진짜 악인이거나 좀 더 뻔뻔한 인간이었다면, 어쩔 수 없는 상황이었는데 어떻게 하라는 거냐고 오히려 따지고 들 수도 있는 노릇이었다.

에크하르트가 난감한 점은 바로 이거였다.

오벨리아는 결국 악인은 되지 못할 인물이며, 하필 그는 이 사실을 잘 안다는 것이었다.

그런 사람이 제게만 큰 잘못이 있을 때 얼마나 기분이 뒤죽박죽 더러운지는 당해 본 자만이 이해할 터였다.

“그냥, 미워하면 되잖아.”

특히나 그 상대가 저토록 태연한 얼굴로 이런 소리나 하고 있다면 말이다.

“그게 쉬웠으면 진즉에 그랬겠지.”

에크하르트가 까칠하게 받아쳤다.

그러자 자신을 미워하라고 할 때는 정작 담담했던 오벨리아의 입이 꾹 다물렸다.

솔직히 그녀는 그가 이렇게 나올 때마다 어떻게 해야 할지를 알 수 없었다.

오벨리아를 온전히 미워하지 못하는 에크하르트의 감정이 동정심이나 연민으로부터 시작되었음을 알고 있음에도 그랬다.

사실 그냥 미워하라는 건, 그래야만 오벨리아가 에크하르트를 대할 태도를 정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정말로 매번 그를 대할 때마다 동요하는 것은 사실 자신이라고 생각했다.

“…우선, 저번에 잘 알지도 못하면서 아이리스 캐트샤와 관련지어 화냈던 것은 미안하다.”

오벨리아가 한참을 침묵하자, 에크하르트가 말을 꺼냈다.

뜬금없는 사과에 그녀가 자신도 모르게 빤히 그를 쳐다봤다.

“…안다. 카테리안느 공자와 대화를 하고 사실을 알게 된 지 꽤 되었는데, 이제 와 사과한다는 게 얼마나 한심한지.”

에크하르트가 그 시선을 마주하지 못하고 피했다.

스스로 했던 부끄러운 행동들이 민망했던 탓이다.

그런 그의 태도는 오벨리아가 입을 열지 않을 수 없게 했다.

“그게 아니라… 사과할 줄은 몰랐어. 내가 한 짓이 있으니, 당신이 내 말을 믿지 못하는 것도 날 오해하는 것도 당연한 일이니까.”

오벨리아는 오늘도 차분하게 죄인의 위치를 자청했다.

그녀는 진실로 감히 에크하르트에게 사과 받을 생각조차 한 적 없었다.

그가 오해한다면 그조차 당연하게 자신의 몫이었다.

오벨리아가 일방적으로 신뢰를 쌓기도 전에 깨 버리고 시작한 사이였다.

그런데 에크하르트가 어떻게 그녀의 말을 믿겠냔 말이다.

그것은 오해를 사 억울한 개인적인 감정과는 다른 객관적인 판단이었다.

“사과해 줘서 고마워, 에크하르트.”

오벨리아는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했다.

그가 얼마나 많은 고민 끝에 어렵사리 꺼낸 말일지 그녀로서는 짐작도 할 수 없음을 알았다.

“…내가 감사받을 일이 아닌 거 같은데.”

그로 인해 도리어 멋쩍어진 것은 당연히 에크하르트였다.

“그런가. 그래도 나는 고마우니까.”

오벨리아는 웃지도 않고 담담히 다시 한번 말할 뿐이었다.

에크하르트는 아까의 오벨리아처럼 도통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를 몰라서 결국 말을 돌려버렸다.

“만타나 자작이 이번에 황궁에 과일 납품을 맡게 되었다더군.”

황궁과 관련된 일 중 큰 역할은 아니었다.

그 재료가 주식이 되는 것도 아니었고, 수량 또한 많지 않았으니까.

그러나 만타나 영지는 그나마 자랑이라고는 과수원이 전부인 영지였다.

과일은 대단한 상등품도 아니었으며, 그나마 인근 영지에 과일을 팔아 영지를 유지하는 게 다였다.

보통 황실로 들어오는 과일들은 햇빛이 잘 들고 큰 물줄기가 흐르는 비옥한 땅을 가진 남부의 지역들에서 자란 것이었다.

그런 곳이 황실에 납품을 맡게 되었다는 것은 무언가 다른 일로 필요가 있다는 뜻일 터였다.

“…어쩐지 황궁을 쓸데없이 드나들더라니.”

오벨리아는 무언가 집히는 것이 있는 모양이었다.

그녀의 목소리가 서늘했다.

대대로 내려오는 유산만 까먹으며 점차 쇠락해 가던 만타나 영지의 과수원을 살려 준 게 오벨리아였기 때문이다.

일전에 오벨리아는 제국민들의 생활 복지를 위해 개인적인 재산을 들여 수도 사업을 황실의 이름으로 진행한 적이 있었다.

그때 만타나 영지에도 물길을 내게 되었고, 오벨리아는 만타나 자작에게 영지에 과수원을 꾸려 보는 게 어떻겠냐고 조언했었다.

남부에 비하자면 아니었지만, 그간 쓸 용도가 없어 놀려 두었던 만타나의 땅은 제법 양분이 가득했다.

살면서 흙을 접할 일이 별로 없는 귀족 중 은연히 농사를 경시하는 자들이 많은 탓에, 만타나 자작 또한 사업만 이리저리 구상했을 뿐 그쪽으로는 생각도 해 보지 않은 것이다.

게다가 만타나 영지 근처에는 과수원을 두고 있는 영지들이 단 하나도 없었다.

남부와도 먼 거리에 있어 만타나는 물론이고 인근 다른 영지들 또한 남들보다 비싼 값에 과일을 영지에 들여오고는 했다.

그 외에도 오벨리아가 조사해 본 바, 여러 가지 조건이 과수원을 꾸리기에 딱 들어맞았다.

처음에는 미심쩍어하던 만타나 자작도 까먹기만 하던 영지의 재산이 조금씩 쌓여가자, 그 뒤로는 오벨리아를 극진히 모셨더란다.

물론, 그녀는 사사로이 자작에게 선물을 받은 적 따위 단 한 번도 없었지만 말이다.

그래도 대다수 귀족에게 허락된 외궁에 뻔질나게 어슬렁거리더니, 기어코 알렉산드로에게 들러붙은 모양이었다.

“또 누가 있어?”

딱히 만타나 자작이 특별히 중요한 것은 아니었다.

그렇지만 그렇게 한 사람, 두 사람 모으다 보면 자잘한 작위를 가진 귀족들이라고 할지라도 목소리를 낼 수 있게 되기 마련이었다.

알렉산드로가 노리는 것은 아마도 그런 것일 터다.

게다가 가까이 두어야만 공을 세울 수 있게 도울 수도 있지 않겠는가.

공을 세워야만 작위를 높여 주거나 하사품을 내려 세력을 키워 줄 수도 있을 터고.

카테리안느 공작을 지지하던 귀족들은 대체로 다 내로라하던 이들이었으니, 그들과 맞서 목소리를 낼 신흥 귀족들을 키우려는 수작이었다.

“세놀리아 남작은 직물 납품을 맡았고, 아스턴 백작은 1급 서기관으로 승진했다. 케이슬라 자작은….”

에크하르트가 그간 황실에 심어 놓은 제 수하들을 통해 알아낸 바를 늘어놓았다.

오벨리아는 그 이름들을 모두 다 듣고 난 후에야 다시 입을 열었다.

“에크하르트, 혹시 힐켄테데가 가진 작위 중에 남들은 모를 만한 것은 없을까?”

***

자고로 고위 귀족 가문이라면 차명으로 작위 몇 개쯤은 가지고 있기 마련이었다.

다른 귀족들은 물론이고, 적당한 대리인이 그 작위를 이어받게 하여 황제조차 실질적인 소유주를 모르게 하는 꼼수는 사실 유구하게 있어 온 일이었다.

그래서 오벨리아의 추측대로 힐켄테데에도 그런 작위들이 있었다.

그녀가 작위를 필요로 하는 이유는 간단했다.

사업을 벌이기 위해서였다.

왜냐하면 아그네스가 힘을 갖기 위해서는 반드시 돈을 모으려 들려고 할 것이기 때문이다.

힐켄테데는 이미 황제의 정부에게 좋지 않은 태도를 보였고, 심지어 황제와도 대놓고 반목했다.

그러니 아그네스가 뒤에 어떤 사람이 있는지 눈치채지 못할, 돈 많은 귀족 집안이 필요한 것이었다.

“현재 힐켄테데가 아닌 이름으로 융통할 수 있는 자산 목록이다.”

그리고 에크하르트는 오벨리아의 장단에 맞춰, 기꺼이 그 자금을 대주었다.

“……힐켄테데가 내 생각보다 더 부유했구나.”

오벨리아는 에크하르트가 건넨 서류들을 넘겨 보며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카테리안느로서 평생을 돈의 한계 따위 느껴 본 적이 없는 그녀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힐켄테데의 재력에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당신, 정말… 고생했겠네.”

왜냐하면 오벨리아가 3년 전에 힐켄테데 사변 이후 알고 있던 것에 비해 그 자산이 최소 배로 늘어 있었기 때문이다.

누군가는 고작 성이 하나 타 버린 것이라고 할지도 모르지만, 그것은 힐켄테데에 크나큰 피해를 줬다.

힐켄테데 성에 있던 모든 사람, 물건, 서류, 그 외의 자산 모든 것이 성만큼이나 오래된 것들이었다.

그 많은 것들을 키워내고 모으고 발전시키는 동안 들어간 힐켄테데의 노력과 재화를 수치로 가늠이나 할 수 있겠는가?

그 오래된 시간들을 다시 쌓아 올리는 일은 돈을 아무리 들인다고 한들 완벽히 되돌릴 수 있는 게 아니었다.

힐켄테데의 중심에 커다란 구멍이 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런데 그것을 에크하르트가 고작 3년 만에 이만큼 재건시킨 것이다.

오벨리아의 안에 애써 밀어놓았던 죄책감이 무럭무럭 고개를 들었다.

자신이 아니었다면 에크하르트가 지금보다 더 화려하게 피워낼 수 있었을 것들이 그녀의 눈에는 훤하게 보였으니까.

“내가 이런 말을 할 자격은 없지만.”

오벨리아가 황급히 말을 덧붙였다.

에크하르트가 이런 고생을 하게 만든 일에 일조한 그녀가 그에게 고생했다고 하는 말이 기만 같았기 때문이다.

“아니, 그러니까… 나는.”

그러나 그조차도 곧 오벨리아는 자신이 변명하는 것처럼 여겨졌다.

결국 그녀는 무슨 말을 해도 적당하지 않다는 생각에 입을 다물고 말았다.

오벨리아는 늘 시간을 허투루 쓰는 법이 없는 사람이었다.

그녀는 그것에 대해 자부심이 있었다.

그러나 죽음이라는 것이 오벨리아의 앞에 닥친 이후, 그녀는 이전처럼 자신만만할 수 없었다.

무엇을 해도 1분 1초가 아까웠다.

이제 오벨리아에게 시간은 그런 것이었다.

그래서 더더욱 에크하르트가 재건에 공들여야 했을 시간의 무게가 그녀를 짓누르는 것만 같았다.

그걸 티 내고 싶지 않았는데, 티 내 버린 것 같아서 오벨리아는 매우 후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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