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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한부 폐태자비는 살아있다-45화 (45/136)

45화. 되돌아온 폐태자비(1)

“난 내가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이다.”

에크하르트가 담담하게 대답했다.

오벨리아의 걱정과는 다르게, 그는 도리어 기묘한 기분이었다.

다들 에크하르트의 능력을 지나치게 믿은 탓이지만, 그가 3년 만에 힐켄테데를 다시 일으킨 것을 은연중 당연하게 여겼기 때문이다.

에크하르트의 수하들 또한 그를 두고 대단하다 할지언정 고생했다고 한 적은 없었다.

그를 그런 식으로 칭찬할 수 있을 정도로 비슷한 지위의 사람이 없는 탓이었다.

그러니 자신이 공들인 시간들을 알아 주듯 고생했다는 그 말이 에크하르트에게는 새삼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누가 계속 정보를 준 덕에 수월했던 것도 있었고.”

덧붙이는 말은 에크하르트의 기분을 숨기듯이 더욱더 무미건조하기 그지없었다.

오벨리아는 그가 말하는 누군가가 자신임을 알아차렸다.

정말이지, 누가 누구의 기분을 생각해 주는 건지.

쓸데없이 배려심 있는 남자였다.

아마 에크하르트가 조금만 덜 괜찮은 사람이었더라도, 오벨리아는 마냥 뻔뻔하게 나갔을 것이다.

지금 그녀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단 하나, 복수뿐이니까.

그러나 그는 자꾸만 그런 오벨리아를 무장해제 시키는 능력이 있었다.

“그리고 이건 대공비가 개인적으로 쓸 수 있는 내탕금이니, 네가 알아서 해.”

에크하르트가 다른 서류를 내밀었다.

오벨리아가 조금 의아한 기색이 되어 그것을 받아들었다.

그가 준 것들만으로도 사업 자금은 충분해 보였는데 굳이 내탕금까지 주는 이유를 알 수 없었다.

“…당신, 제정신이야?”

“내탕금이 마음에 들지 않는 건가?”

“너무 많아. 이런 게 나한테 왜 필요해?”

“대공비 정도 되는 위치에 그 정도 내탕금이 많은 게 아니라는 건, 너도 알 텐데.”

에크하르트의 말대로 오벨리아도 일반적인 고위 귀족 가문의 내탕금이 어느 정도인지는 알고 있었다.

그의 말이 옳았다.

에크하르트가 책정한 내탕금은 대공비의 몫으로 적당했다.

만약, 오벨리아가 진짜 대공비였다면 말이다.

“내탕금은 이혼해도 가문이 아니라 그 안주인이었던 사람에게 귀속돼. 당신이야말로 알지 않아?”

오벨리아가 다급하게 덧붙였다.

“심지어 이거 오벨리아 힐켄테데가 아니라 오벨리아, 그러니까… 내 앞으로 된 거잖아.”

서류에는 내탕금 수익자로 오벨리아가 지정되어 있었다.

오벨리아 힐켄테데와 오벨리아.

아무 차이도 없을 것 같지만, 그사이에는 커다란 간극이 존재했다.

오벨리아와 에크하르트 사이 혼인 계약서가 아무 효력이 없는 것은 그녀가 진짜 오벨리아 힐켄테데가 아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내탕금은 오벨리아의 앞으로 나온 것이니, 그녀가 힐켄테데이든 아니든 상관없었다.

심지어 오벨리아가 카테리안느의 이름을 되찾는다고 할지라도 그녀의 것이 되는 셈이었다.

힐켄테데의 재산이 오벨리아의 것이 되다니.

어떻게, 감히, 그녀가.

그럴 수는 없는 법이었다.

“힐켄테데가 너에게 이정도도 주지 못할 만큼 빈곤하지 않다는 걸 알 텐데.”

에크하르트는 자꾸만 오벨리아가 말하고자 하는 바를 벗어났다.

그녀도 북부의 지배자인 힐켄테데가 얼마나 부유한지 정도는 알고 있었다.

다만 이것은 재산이 얼마나 많은가와는 전혀 다른 문제였을 뿐이다.

“당신이 나한테 이런 걸 줄 이유는 없어.”

오벨리아가 냉정하게 자르며 서류를 도로 에크하르트에게 내밀었다.

그녀의 것이 아니었다.

받을 수 없었다.

“너의 복수가 성공할지라도, 네가 카테리안느로 돌아갈 수 있다는 보장은 없다.”

그러나 에크하르트는 오벨리아의 거부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이번 역시 그의 말은 옳았다.

본디 공작가를 물려받아야 했을 오벨리아의 첫째 오빠, 일리어스는 현재 생사도 모른다고 알려진 상황이었다.

지금은 공작 부인이 버티고 있어서 라이너스가 공작의 자리에 오르지 못했다지만, 그게 언제까지 가능할지 몰랐다.

제 아버지를 해한 라이너스가 공작 부인의 안위를 언제까지고 보장할 리 없었다.

오벨리아 또한 죽은 것으로 되어 있었으니 라이너스는 이제 명실상부 유일한 카테리안느의 핏줄이었다.

지금의 상황대로라면, 카테리안느의 원로들은 결국 공작위를 가질 수밖에 없는 라이너스의 눈치를 보게 될 것이다.

라이너스가 제 어머니마저 해하든, 카테리안느의 원로들이 그에게 먼저 굴복하든, 언제 라이너스가 카테리안느 공작이 될지 모르는 상황이었다.

그리하여 라이너스가 카테리안느 공작으로써 알렉산드로와 함께하게 되면, 카테리안느의 운명은 완전히 알렉산드로와 함께하게 되는 셈이었다.

“알렉산드로가 한 번 손에 쥐었던 카테리안느를 놓을 리가 없다는 걸 그대도 알 텐데. 어쩌면 알렉산드로의 몰락이 곧 카테리안느의 몰락이 될지도 모른다.”

그후에는 오벨리아가 복수에 성공한다고 해도 돌아갈 곳이 없게 된다.

에크하르트의 행동은 복수 후에도 살아갈 그녀를 전제로 하고 있었다.

“난 죽어, 에크하르트.”

그래서 오벨리아는 단호하게 선언했다.

“너를 살릴 거라고 했을 텐데.”

그러나 에크하르트가 하필 지금 내탕금 문서를 건넨 이유가 있었다.

그는 이번만큼은 오벨리아가 쓰러지지 않으리라 확신했다.

“아니면 지금 당장 네 오빠와 친구에게 가서 아무것도 하지 않고 죽음을 기다릴 거라고 말할 수 있나?”

오벨리아를 이 땅 위에 붙잡아둘 끈이 에크하르트의 눈에 보였으니까.

“그건….”

역시나 그의 생각대로 오벨리아는 대답하지 못했다.

“그리고 받아 두는 게 좋지 않겠어? 카테리안느 공자도 개인적으로 운용할 수 있는 돈이 필요할 텐데.”

일리어스는 카테리안느 공작 몰래 뒷주머니를 만들 성정이 아니었기 때문에, 그의 재산 목록은 공작의 집무실에만 가면 쉽게 알 수 있었다.

그러니 라이너스에게 일리어스가 살아 있다는 사실을 들키지 않으려면 일리어스의 개인적 재산을 쓸 수는 없었다.

에드먼드가 잘 챙기고는 있지만, 일리어스에게 불편함이 없을 리가 없었다.

내탕금은 오벨리아의 사유 재산이나 마찬가지이니 일리어스에게 준다고 해도 누가 뭐라고 하지도 못했다.

에크하르트는 정확히 그 점을 짚은 것이다.

오벨리아는 그의 예상대로 주저했다.

당연하다.

아무리 염치를 챙기려고 해도 현재 그녀에게는 그럴 여유가 없었고 이제는 지켜야 할 사람까지 존재했다.

일리어스가 스스로 일어설 수 있는 사람이든 아니든, 그것과는 전혀 별개로.

“……고마워, 잘 쓸게. 그리고 내 재산을 되찾게 된다면 꼭 갚겠어.”

오벨리아가 한참의 침묵 끝에 차마 에크하르트와 눈을 마주치지 못한 채 말았다.

정말이지, 염치가 없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언제 되찾을 수 있을지 확신할 수도 없는 그녀의 재산으로 막대한 내탕금을 되돌려주겠다고 하는 것 또한 마찬가지였다.

“그래, 살아서 꼭 갚아.”

그러나 에크하르트는 개의치 않았다.

도리어 그의 단단한 어조는 마치 그녀가 정말로 자신의 재산들을 되찾을 수 있으리라 여기는 듯 보였다.

오벨리아는 새삼 에크하르트가 자신을 진심으로 살리려고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또 기분이 술렁거렸다.

이 올곧은 남자는 그저 죽어가는 사람을 두고 보지 못했을 뿐일 텐데도.

곤란했다.

이 술렁임이.

‘정말로 살아도 될까?’

문득 떠오른 생각에 마음이 흘러 흘러 크게 출렁거렸다.

삶 따위 이제 어떻게 되든 오직 복수를 위해 스스로를 불태우겠다는 다짐은 어디로 갔나.

오벨리아가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염치없다, 염치없다, 했더니 진짜로 뻔뻔해진 모양이었다.

과욕이다.

오벨리아는 방금 제 안에 떠오른 생각을 부정했다.

“죽기 전에 반드시 갚을게.”

에크하르트가 미간을 확 찌푸렸다.

자신이 살 수 있을 리가 없다.

오벨리아의 말이 의미하는 바가 명확했다.

“……하여간, 고집도 더럽게 세군.”

에크하르트가 불만에 차 중얼거렸다.

그러나 그 이상의 말을 더하지는 않았다.

오벨리아를 몰아붙였다가 전처럼 쓰러지게 만들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녀의 입이 다물렸다.

에크하르트의 그런 행동조차 배려임을 알아차린 탓이었다.

“아까 하던 이야기나 계속해. 그래서 무슨 사업을 할 거지?”

에크하르트가 말을 돌렸다.

요즘 그와 오벨리아는 늘 이런 식이었다.

서로 간에 어색한 분위기가 감돌면 복수와 관련된 것으로 화제를 돌렸다.

예를 들어 에크하르트가 그녀를 사소하게 배려했다던가, 오벨리아가 그를 이해하는 듯 보였을 때가 그러했다.

두 사람은 서로가 멈칫하는 그 순간들을 모른 척한다.

그건 그녀와 그 사이에 그어진 어떤 선이었다.

이 선을 넘으면 절대로 안 될 것 같은, 정확히는 무언가 크게 달라져 버릴 것 같은 그런 선.

“아…. 응, 그래서 뭘 할 거냐면….”

잠시 멈칫했던 오벨리아 역시 에크하르트의 장단에 맞추어 말을 이었다.

두 사람은 지나간 화제를 결코 다시 꺼내지 않았다.

***

황실 연회가 훌쩍 앞으로 다가왔다.

그에 따라서 오벨리아는 분주해졌다.

힐켄테데의 대공비로서 드레스가 부족하지는 않았지만, 북부의 디자이너와 수도의 디자이너들 사이 선호하거나 유행하는 드레스가 달랐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그녀는 드레스부터 그에 어울리는 장신구나 구두, 가방까지 싹 다 다시 맞춰야 하는 상황에 놓이게 되었다.

“…저, 대공비 전하, 로하이드 의상실로부터 연락이 왔습니다.”

그런데 의상실의 디자이너를 불러 드레스를 맞추기로 한 날, 시녀가 사색이 되어 오벨리아에게 말을 전해 왔다.

“오늘 급하게 맞이할 손님이 생겨서, 전하를 뵙지 못할 것 같다고….”

시녀도 자신이 전하는 말이 얼마나 터무니없는지 알고 있는 듯, 차마 말을 끝맺지 못했다.

무려 약속된 당일에 의상실 쪽에서 일정을 취소하다니.

힐켄테데를 완전히 무시하는 처사였다.

“…지금 당장 수도 주요 의상실들에 모조리 연락해 봐.”

잠시 무언가를 생각하던 오벨리아가 시녀에게 명령했다.

문득 드는 추측이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잠시 후, 그녀의 추측이 옳았음을 증명하듯이 시녀가 사색이 되어 달려왔다.

“큰일 났습니다, 대공비 전하. 모든 의상실에서 현재 예약된 손님이 꽉 차 드레스 제작이 불가능하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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