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6화. 되돌아온 폐태자비(2)
그제야 시녀 또한 무언가 이상하다는 점을 느낀 모양이었다.
귀족들에게 드레스는 단순한 옷이 아니다.
그것은 그들이 가진 지위와 명예, 재력을 나타내는 지표 중의 하나였다.
유행에 뒤처지거나 기준에 미달인 드레스를 입는다는 것은 차라리 연회에 참석하지 않느니만 못했다.
“대공비 전하, 어떻게 하죠?”
시녀가 초조한 얼굴로 물었다.
무려 황제가 직접 대공비를 초대한 연회였으니 오벨리아는 반드시 참석해야만 했다.
이대로 가다가는 자칫하면 힐켄테데의 체면을 완전히 구길 판이었다.
자존심.
고작 그 하나가 어떤 귀족들을 거짓으로 고고하게 굴다가 배 굶어 죽게 만들기도 했으니, 힐켄테데의 대공비가 수도 사교계에 데뷔하자마자 체면을 상한다는 건 절대 안 될 일이었다.
북부에서 수도로 디자이너를 데리고 온다고 한들, 그 사이의 거리가 마차로 며칠이나 걸렸기 때문에 연회에 맞춰 드레스를 완성할 수도 없을 터였다.
게다가 무려 힐켄테데의 대공비가 수도의 디자이너 중 한 명에게도 선택받지 못해, 수도 내 유명 의상실의 드레스를 입지 못하다니.
이 또한 망신임은 틀림없었다.
그리하여 시녀가 안절부절못하자, 잠시 말이 없던 오벨리아가 입을 열었다.
“내게 해결 방법이 있어.”
오벨리아의 표정은 대단히 침착했다.
마치 이 문제는 아무 의미가 없는 것처럼.
제 주인의 평이한 표정에 시녀는 애써 초조함을 내리 눌렀다.
“힐켄테데가에 대대로 입어 온 드레스가 있을 거야. 그걸 내 치수에 맞게 수선해.”
“하지만, 전하… 그것으로는….”
시녀가 주저했다.
높은 가문에는 당연히 보고에 보관할 만한 드레스들이 존재했다.
그러나 그것들은 현시대보다 이전의 시대에 만들어졌기 때문에 사시사철 바뀌는 사교계의 유행을 따라가기는커녕 촌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시녀는 제 주인이 왜 그것을 수선하라 이르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시간이 없을 텐데.”
수선일 뿐이라고 해도, 귀족가의 드레스는 예민한 천과 섬세한 자수, 수많은 보석 그리고 주름을 잡는 것에 따라 느낌이 달라지는 레이스 등이 얽혀 만들어진 집합체였다.
그런 것을 수선하려면 손이 여간 많이 가는 게 아니었다.
그러니 황실 연회 날짜에 맞추려면 치장을 돕는 시녀들이 모조리 드레스에 달라붙어야 할 터였다.
“…예, 대공비 전하.”
결국 시녀가 제 주인에게 얌전히 허리 숙여 인사를 하고는 명령을 하달하기 위해 방을 나갔다.
그리고 시녀가 나가자마자, 오벨리아는 짜증스럽게 드레스 자락을 꽉 잡아 쥐었다.
“…하, 알렉산드로.”
의상실 또한 더 높은 명성과 가문을 가진 레이디의 드레스를 제작할수록, 더 많은 이들이 의상실을 찾아오고 더 큰 수익을 올릴 수 있었다.
게다가 가문의 사변 이후로 무려 3년을 칩거하던 힐켄테데에서 드디어 대공비를 맞아들였다.
레베카에게 맡겨 뒀기 때문이지만, 표면상으로는 대공비가 데뷔 무대로 북부가 아닌 수도를 선택한 셈이었다.
그런 온갖 이슈가 될 상황에서 의상실이 오벨리아의 드레스 제작을 거부하다니.
외압이 있었다고밖에 할 수 없었다.
그리고 북부의 왕이라고 불리는 힐켄테데를 상대로 이런 짓을 벌일 수 있는 사람은 카테리안느의 상황을 생각했을 때, 단 하나였다.
현 황제, 알렉산드로.
오벨리아는 확신했다.
선황제라면 이런 어리석은 짓을 할 리가 없기 때문이다.
“고작 드레스 하나 따위로 힐켄테데를 압박할 생각이었다니… 당신, 진짜 멍청하구나?”
오벨리아가 입가에 비웃음을 머금었다.
황제의 자리에 올랐다고 뭐든 제 세상인 듯 구는 알렉산드로가 우스웠다.
그런 생각을 하지 않고서야 어떻게 북부의 왕이라고 불리는 힐켄테데를 건드린단 말인가.
꼭 이렇게 되돌려 줄 수 있는 사건을 만들어 주다니.
알렉산드로의 얼굴을 마주할 날이 점점 기대됐다.
***
오벨리아는 다알리아 자작, 플랑켄 백작, 세이레사 남작 등의 이름으로 수도 전역에 존재하는 티룸 중 단 한 곳을 제외한 모든 곳을 사들였다.
그 이유는 간단했다.
티룸은 귀족들이 모여드는 곳이었고 사교계의 소문은 대체로 그곳에서부터 시작되기 때문이었다.
대개 많은 티룸의 고용인들은 특정 귀족과 연관되어 티룸에서 들은 소식을 물어다 주고 대가를 받았다.
그렇기 때문에 귀족들 사이에서는 믿을 수 있는 티룸의 담당 직원을 포섭해 두는 것 또한 능력으로 여겨졌다.
그리고 오벨리아가 사들이지 않은 딱 한 곳은 바로 그 모든 법칙에서 벗어나 있었다.
<메이트리스.>
그곳의 서버는 모두 귀가 들리지 않으며 말을 할 수 없고 글조차 몰랐다.
일부러 그런 이들을 모아 만든 곳이었다.
그들이 아는 것은 그저 귀족들을 대할 때의 예법과 차, 그리고 디저트의 이름뿐이었다.
한 마디로 다른 티룸과 달리 메이트리스에서의 대화는 다른 곳에 새어나갈 걱정을 하지 않아도 된다는 의미였다.
물론, 아무나 갈 수는 없었다.
메이트리스에 입장할 수 있다는 것은 그들이 수도의 귀족 중에서도 소위 말하는 ‘잘나가는 부류’라는 것을 증명했다.
그리고 오벨리아는 이 메이트리스의 비밀을 아는 단 두 사람 중 한 명이었다.
그리하여 그녀는 각 티룸의 직원들 사이에 단 하나의 소문을 풀어놓았다.
‘메이트리스는 황실의 것이다.’
모든 귀족이 분노할 진실에 관하여.
오벨리아는 다른 티룸의 서버가 분명히 이 사실을 그들과 연관된 귀족들에게 전할 것이리라 확신했다.
이게 진실이라면, 티룸의 직원으로서 알아낸 정보라기에는 지나치게 값진 것이었고 받을 보수가 커질 테니까.
그리고 오벨리아의 확신대로, 며칠 뒤 그녀가 풀어놓은 소문은 귀족들 사이에서 엄청난 파란을 일으켰다.
***
물론, 귀족들이 소문을 무조건 믿을 리는 없었다.
그래서 오벨리아는 에크하르트가 차명으로 마련해 준 저택에 메이트리스의 손님들을 불러 모았다.
“…도대체 어떻게 우리를 모두 안 거죠?”
그렇게 도착한 손님들은 매우 떠들썩했다.
메이트리스의 손님 목록은 고위 귀족들이라는 사실만 알려져 있을 뿐, 그 이름 등은 철저히 비밀에 붙여졌다.
그런데 정확히 메이트리스의 모든 손님 이름 앞으로 초대장이 도착한 것이다.
그러니 귀족들이 오벨리아의 초대를 무시하고 오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그녀가 기억하고 있던 것과 에크하르트가 수하를 부려 알아낸 목록을 대조해 만들어낸 완벽한 결과였다.
그리하여 오벨리아와 에크하르트가 그들의 앞에 모습을 드러냈을 때, 그 자리에 있던 모두는 또 한 번 놀랐다.
첫째는, 이 자리의 귀족들이야 힐켄테데의 대공비가 전 황태자비를 닮았다는 것쯤 알아낼 수 있는 자들이었으나, 그렇다고는 해도 이토록 닮았을 줄은 몰랐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둘째는 황실의 비밀을 폭로하고 메이트리스 손님들의 명단까지 손쉽게 손에 넣은 게 바로 힐켄테데였다는 것이다!
“저렇게까지 똑같이 생겼을 줄이야….”
“힐켄테데가 아무리 북부의 주인이라 불린다지만….”
각자의 충격으로 귀족들 사이 수군거림이 퍼졌다.
오벨리아와 에크하르트는 일부러 그 충격이 충분히 그들 사이로 전염되도록 내버려 두었다.
그리고 그 수군거림이 최고조에 도달했을 때, 오벨리아가 마침내 입을 열었다.
“자, 그럼 우리 이제부터 이야기를 나눠야 할 거 같은데.”
오벨리아가 대중 앞에 손가락 두 개를 펴 손을 내밀었다.
그녀가 중지를 접으며 말했다.
“우선은, 현 황제가 벌인 귀족 사찰 건에 대해서 말을 나누어 볼까?”
“그것에 대해 증명하실 수 있으십니까?”
베일란스 후작이 앞으로 나서 물었다.
다들 후작의 말에 동의하듯 오벨리아를 쳐다봤다.
여기 있는 자들은 단순히 힐켄테데라고 하여 두려워할 귀족들이 아니었다.
다들 내로라하는 이라는 게 여기서 증명되는 셈이었다.
“그대들의 눈으로 직접 확인하게 해 줄 테니 걱정하지 마.”
오벨리아가 의뭉스러운 미소를 머금었다.
이 순간을 위하여, 이 많은 귀족을 이곳에 불러드린 것이었으니까.
***
황실 연회 당일이 되었다.
오벨리아는 일전에 시녀에게 명령해 뒀던 대로 힐켄테데 가문에 대대로 내려오는 드레스를 수선하여 입었다.
에크하르트 또한 그에 맞춰 가문의 보고에서 드레스와 세트인 연미복을 골랐다.
기본적인 디자인의 틀이 오래된 것이었기 때문에 옛 것의 느낌이 나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그러나 둘 다 천이나 장식 하나하나 모두 최상급의 것들이며 엄격하게 관리된 옷인지라 매우 고풍스러웠기에 오벨리아의 안목에도 퍽 만족스러웠다.
“…정말로 괜찮으시겠어요?”
하지만 오벨리아를 모시는 시녀는 걱정이 이만저만 아니었다.
아무리 가장 좋은 것들로만 만든 드레스와 연미복이라고 할지라도, 현재 수도의 유행과는 동떨어진 것들이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오벨리아를 모시기 위하여 황궁에 따라온 뒤에도 시녀는 좀처럼 안심하질 못했다.
“괜찮아.”
그와 상반되게, 오벨리아는 자신만만했다.
황궁 연회장에서 미리 대기하던 에크하르트의 수하가 때마침 그에게 다가와 말을 전했다.
“오벨리아, 네가 원하던 대로 모두 준비됐다는군.”
수하에게 고개를 끄덕여 준 에크하르트가 오벨리아에게 작게 속닥였다.
그 말은 그녀에게 한층 더 자신감을 불어 넣어 주었다.
“외치게.”
에크하르트가 연회장의 문 앞에 서서 시종에게 명령했다.
황궁임에도 불구하고 그 태도가 오만하기 그지없었다.
물론, 그조차 그에게 대단히 잘 어울렸지만.
“힐켄테데 대공 전하와 힐켄테데 대공비 전하 드십니다.”
에크하르트의 위압감에 압도된 시종이 빳빳하게 들고 있던 고개를 절로 숙였다.
시종의 외침에 따라 문이 열리고, 두 사람이 안으로 들어섰다.
어느 날 불쑥 등장한 힐켄테데의 친딸.
그리고 단번에 그 콧대 높은 북부의 장로들을 짓누르고 힐켄테데 대공비의 자리를 차지했다는 여자.
모두의 관심사에서 뜨거운 존재인 오벨리아 힐켄테데의 입장에 귀족들의 시선이 한군데로 쏠렸다.
순간 떠들썩하던 연회장에 누구라도 알 법한 침묵이 맴돌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