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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한부 폐태자비는 살아있다-47화 (47/136)

47화. 되돌아온 폐태자비(3)

“…정말, 전 황태자비 전하와 똑같이 생기셨군요.”

누군가 중얼거린 말에 에크하르트와 오벨리아를 제외한 연회장의 모두가 공감했다.

수도의 귀족 중 황태자비였던 오벨리아 카테리안느의 생김새를 모르는 사람은 없었다.

그러나 그들 사이에 옛 드레스를 입고 온 오벨리아 힐켄테데에 대한 경시 따위는 없었다.

왜냐하면, 오늘따라 고위 귀족가의 귀부인들이 모조리 제 가문의 드레스를 꺼내 입었기 때문이다.

한 명만 유행에서 뒤처졌다면 표적이 될 수 있었을 터다.

혹은 유행에 뒤떨어진 자들이 조금만 신분이 낮았다면 이 역시 사교계의 웃음거리가 되었을지도 몰랐다.

그러나 사교계와 정계의 내로라하는 인사들이 유행을 버리고 다른 것을 택했다는데, 그들을 한데 묶어 비웃을 만큼 간이 큰 자는 이 자리에 없었다.

가문의 드레스를 입은 귀부인들 또한 별다른 부담은 가지지 않을 수 있었다.

이 역시 저 혼자가 아니라, 저와 비슷한 자들이 모두 그렇게 입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오벨리아와 에크하르트가 들어오자마자, 마치 그들에게 갈 관심을 앗아 오려는 것처럼 연이어 시종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황제 폐하와 파트너 이멜리언 백작 영애께서 드십니다!”

문이 열리고 아까처럼 연회장 안 귀족들의 주목을 받으며 알렉산드로와 아그네스가 들어섰다.

그리고 아그네스가 입은 드레스를 확인하는 순간, 일부 귀부인들의 표정이 서늘하게 굳었다.

정확히는, 가문의 드레스를 입고 온 귀부인들이 그랬다.

아그네스는 그들이 그럴 줄 알았던 것처럼 황실에서 내려오는 드레스와 그에 어울리는 장신구들을 하고 있었다.

그 순간, 오벨리아는 환히 미소했다.

오늘 귀부인들이 가문의 드레스를 입고 오기로 한 사실을 대화로 나눈 장소는 딱 두 군데였다.

오벨리아가 초대한 저택과 메이트리스.

그 순간 메이트리스의 손님이었을 귀족들은 같은 생각을 했다.

힐켄테데는 황제가 선물한 나무를 모조리 베어 버렸고, 대공비는 추측하자면 아마도 황제에 의해 수도의 모든 의상실에서 거부당했다.

그런 상황에 이야기가 어디서 황제에게로 흘러 들어갔을지는 뻔한 일이었다.

오벨리아가 알려 준 대로라면, 메이트리스의 종업원들은 귀가 안 들리고 말을 못 하는 대신 독순술을 할 줄 알았으니까.

물론, 그것은 귀족들의 오해였다.

아그네스가 정보를 얻은 것은 그녀가 가던 티룸의 종업원으로부터였다.

그러나 아무리 고위 귀족들이라고 한들 수도 전역의 티룸을 힐켄테데가 사들였으리라고는 생각할 수 없는 법이었다.

왜냐하면 티룸이란 대체로 귀족들의 전유물이었고, 그리하여 수도의 티룸은 그 가격이 저택 하나 값 이상을 호가하기도 했기 때문이다.

황제의 자리로 가던 알렉산드로 또한 연회장에 들어서자마자 무언가 이상한 분위기를 감지했다.

고위 귀족들의 그를 향한 눈초리가 지나치게 싸늘했다.

알렉산드로가 상황을 파악하려 주변을 둘러봤다.

그리고 곧 그의 시선이 아그네스에게로 닿았다.

“아그네스, 너… 설마 이 상황을 의도한 건가?”

알렉산드로가 치미는 분노를 꾹 참으며 물었다.

그는 이 사태의 원인으로 가장 만만한 아그네스부터 의심했다.

어쩐지 황실의 드레스를 내어달라 하더라니.

고위 귀족가의 부인들과 아그네스.

오직 그들만이 가문이나 황실에서 대대로 내려오는 드레스를 입고 있었다.

아무리 고위 귀족들이 난다긴다해도 카테리안느나 힐켄테데 정도 되는 가문이 아니고서야, 황실보다 나은 물건을 가지고 있을 리 없었다.

그래서 황실의 드레스를 입은 아그네스는 마치 고위 귀족가 귀부인들의 위에 있는 것처럼 보였다.

특히나 아그네스가 화려한 드레스를 고른 덕에 귀부인들은 그녀와 더욱 대조되어 보였다.

그러니까… 황제의 정부 따위가 그들보다 우위에 있는 모양새가 귀부인들의 기분을 상하게 하기에 충분했다는 말이다.

물론, 귀족들이 알렉산드로를 적대하는 것은 그보다 훨씬 큰일이었지만.

“그게….”

그러나 찔리는 것이 있는 아그네스는 알렉산드로의 말에 쉽게 반박하지 못했다.

고위 귀족들은 특히나 오벨리아의 은혜로 제국의 귀족가에 들어와 그 남편인 알렉산드로와 붙어먹은 아그네스를 경시했다.

아그네스는 그런 고위 귀족가의 귀부인들 콧대를 눌러 주고 싶었다.

“넌 정말…!”

알렉산드로가 목소리를 높이려다 말고 급하게 입을 다물었다.

그는 황제다.

다른 이들이 앞에서 쉽게 이성을 잃은 모습을 보일 순 없었다.

오벨리아는 뭣도 모르고 아그네스만 잡는 알렉산드로를 비웃었다.

메이트리스가 제 역할을 다했더라면, 알렉산드로가 황실의 드레스를 쉽게 아그네스에게 내주었을 리 없었다.

그러니까 이번에 이런 상황에 쉬이 놓이게 된 것은 메이트리스로부터 알렉산드로에게 정보가 전달되지 않은 탓이었다.

당연했다.

메이트리스는 오벨리아가 키워낸 곳이었으니까.

그곳 전부를 그녀의 편으로 삼을 수는 없어도, 한둘쯤 몰래 오벨리아가 원하는 대로 행동하게 하는 것은 일도 아니었다.

즉, 고위 귀족가의 귀부인들이 이야기할 때 들어간 종업원들은 모조리 오벨리아의 사람이었다.

물론, 알렉산드로가 나중에 진실을 알고 뒤늦게 그 종업원들을 찾아 봤자, 그들은 다 흩어진 뒤일 것이었다.

황제가 정부에게 화를 내고 사교계를 주름잡는 귀부인들은 말 한마디 않고 입을 다물고 있었다.

기껏 황제가 다시 연 자신의 즉위 축하연은 점차 그렇게 식어가고 있었다.

그리고 그 가운데로 인파에 숨어 있던 오벨리아가 나섰다.

“제국의 태양, 황제 폐하를 뵙습니다.”

익숙한 목소리, 우아한 어조.

그 순간 알렉산드로의 고개가 휙 오벨리아의 쪽으로 돌아갔다.

“…오벨리아.”

“오벨리아!”

알렉산드로의 두 눈이 믿을 수 없다는 듯 커졌다.

그리고 그 뒤를 이어 오벨리아를 발견한 아그네스가 히스테릭하게 소리쳤다.

둘 다 오벨리아 힐켄테데가 오벨리아 카테리안느라고 의심하여 그들의 의심이 사실임을 증명하기 위해 별짓 다 한 것치고는 유별난 반응이었다.

“네가 어떻게, 여기… 역시, 살아 있었던….”

알렉산드로가 자신도 모르게 횡설수설 중얼거렸다.

하긴, 누구라도 자신이 죽이려고 했던 사람이 살아 돌아온다면 기함할 수밖에 없으리라.

아마도 알렉산드로는 에크하르트가 나무들을 모조리 베어 버렸다는 이야기를 들으면서도, 오벨리아 힐켄테데가 오벨리아 카테리안느는 아니길 바랐을지도 몰랐다.

“제 아내에게 예의를 갖춰 주십시오.”

오벨리아의 옆으로 에크하르트가 나란히 섰다.

그가 가만히 아그네스를 내려다봤다.

“‘너’라든가, 이름을 부르는 것은 아무리 황제폐하이시라고 해도 부적절한 행동입니다.”

딱히 위압적으로 굴려고 한 게 아닌데도, 훌쩍 높다란 키를 가진 에크하르트가 내려다보자 아그네스는 자신도 모르게 움찔하고 말았다.

“특히- 정부 따위가 감히, 내 아내의 이름을 부른 것은 더더욱.”

“힐켄테데 대공!”

오벨리아에게 시선이 콕 박혀 있던 알렉산드로가 에크하르트를 노려봤다.

황제의 정부.

모두가 아그네스를 두고 그렇게 속삭였으나, 황제의 앞에서조차 그 단어를 꺼내지는 않았다.

왜냐하면 아그네스는 어쨌든 알렉산드로가 황후로 삼고자 하는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언행을 조심하게!”

알렉산드로가 잔뜩 미간을 찌푸린 채 성나게 소리쳤다.

그러자 에크하르트가 이번에는 고요한 시선으로 알렉산드로를 내려다봤다.

“하긴, 법적인 사이가 아니니- 황제 폐하께서 저 영애의 정부라고 할 수도 있겠군요. 그렇다면 제가 실언했습니다.”

말과 달리 에크하르트의 표정은 조금도 변하지 않고 담담했다.

누구나 알 수 있었다.

그가 진짜로 황제에게 사과할 마음 따위는 없다는 것을.

“미친…!”

“언행을 자중하시라, 말씀드렸습니다.”

분노하여 욕설이라도 내뱉으려던 알렉산드로가 움찔했다.

에크하르트의 무거운 목소리가 그대로 알렉산드로를 짓눌렀기 때문이다.

자존심이 상하게도, 알렉산드로는 꼼짝도 할 수 없었다.

알렉산드로의 어깨가 씩씩거렸다.

황제로서 수많은 귀족 앞에 뭉개진 자존심이 그의 머리를 돌아 버리게 할 지경이었다.

그러나 에크하르트는 힐켄테데의 대공이었다.

황제조차 함부로 할 수 없는 북부의 주인.

물론, 힐켄테데라고 하여 황제를 단번에 끌어내리거나 죽일 수는 없었다.

그러나 그만큼 황제 또한 힐켄테데를 쉬이 건드릴 수 없는 쌍방 관계였다.

아니, 쌍방이 맞기는 하는가?

알렉산드로는 에크하르트에게 이렇게 모욕을 받아도 할 수 있는 게 없는데.

그 사실이 피부로 와 닿자, 알렉산드로가 성난 눈으로 에크하르트를 노려봤다.

카테리안느와 이프넌트를 동시에 잃은 것에 대한 손실이 너무 컸다.

심지어 알렉산드로는 선황과 대치 중이었고, 모든 귀족이 그것을 아는 탓에 지지 기반도 불안정했다.

그에 반해 에크하르트는 완벽히 힐켄테데를 손아귀에 쥐었으니, 냉정히 말하자면 알렉산드로가 밀리는 셈이었다.

사실을 인지한 알렉산드로의 자존심은 더욱 진탕에 처박혔다.

그 누구도 자신의 위에 두기 싫었기 때문에 카테리안느까지 처리했다.

그런데 그 카테리안느가 없어 힐켄테데의 앞에 별다른 말도 못 하다니.

이 무슨 꼴이란 말인가.

“에크하르트, 나 피곤한데.”

돌연 들려온 오벨리아의 목소리에 알렉산드로의 고개가 다시 홱 돌아갔다.

그녀가 제 옆에 있었다면 이런 꼴은 안 당했을 것이다.

그 생각이 순간 알렉산드로의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심지어, 저 여자는 본디 제 것이 아니었던가.

알렉산드로의 눈에 음험한 빛이 번뜩였다.

그것을 느낀 에크하르트가 오벨리아를 가리듯 제 몸으로 막아섰다.

알렉산드로의 미간이 대번에 찌푸려졌다.

“폐하, 저희는 이만 가 봐야 할 것 같습니다.”

에크하르트는 알렉산드로의 반응 따위 일절 신경 쓰지 않은 채 말했다.

“뭐?”

그 말과 행동이 어이가 없어, 알렉산드로는 자신도 모르게 반문했다.

그러나 오벨리아가 에크하르트의 말이 괜한 것이 아님을 증명하듯 이어 입을 열었다.

“저녁에 저희가 수도에 온 기념으로 연회를 열 예정이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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