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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한부 폐태자비는 살아있다-48화 (48/136)

48화. 되돌아온 폐태자비(4)

모두가 숨을 들이켰다.

황제가 연 연회는 오후부터 시작하여 늦은 밤까지 이어진다.

그런데 세상 어떤 귀족이 황제와 같은 날에 연회를 연단 말인가!

그것은 황실과 힐켄테데를 두고 양자택일하라는 것과 다름없었다.

심지어 아직 황제가 연회의 시작을 알리고 축사를 하기도 전 아니던가!

정말이지, 이렇게 되면 그냥 초대장이 굳이 왔으니 얼굴만 비추고 가겠다는 의미와 별반 다르지 않았다.

최소한의 예의랄 것도 없었다.

귀족들은 그것이 감히 힐켄테데와 드레스 하나로 자존심 싸움을 하려고 했던 황제에 대한 보복임을 눈치챘다.

으득.

알렉산드로가 이를 악물었다.

그래 봤자, 귀족들이 가지 않으면 그만이었다.

“오늘 연회에 오는 사람들에게는 특별히.”

그러나 오벨리아는 귀족들을 가만히 두지 않았다.

“앞으로 내가 열 티룸의 초대장을 나눠 주겠어.”

오벨리아가 몸을 돌려 정확히 알렉산드로와 마주했다.

그녀가 의뭉스러운 미소를 입에 머금었다.

“메이트리스와는 달리, 아주 철저히 비밀이 보장되는 곳일 거야.”

오벨리아의 말이 떨어지자마자 알렉산드로의 얼굴이 굳었다.

그제야 그는 고위 귀족들이 자신에게 싸늘했던 이유를 알아차렸다.

오벨리아가 메이트리스에 대하여 발설한 것이다!

그리고 귀족들이 그녀의 말을 믿게 된 이유에는 오늘 귀부인들과 아그네스가 입고 온 드레스에 있을 터였다.

그러나 지금 당장은 알렉산드로가 알 수 있는 게 없었다.

그는 메이트리스로부터 이에 관한 정보를 보고 받지 못했기 때문이다.

알렉산드로는 이 또한 오벨리아의 책략임을 눈치챘다.

짙은 패배감이 그를 짓눌렀다.

오벨리아가 여유로운 미소를 띤 채 에크하르트의 팔짱을 끼고 연회장을 나섰다.

‘오벨리아 카테리안느가… 진짜로 돌아왔어.’

그것이 알렉산드로에게 처절하게 와닿는 순간이었다.

오벨리아 힐켄테데가 오벨리아 카테리안느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을 떄,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메이트리스를 걱정하지 않았다.

그곳은 이미 자신의 손아귀에 있다고 자신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알렉산드로의 판단은 정확한 오판이자 자만이었고 그 결과는 처참했다.

오벨리아가 메이트리스의 주인이 누구인지 증명하는 동안, 그는 아무것도 모르고 있었으니까.

권력 투쟁이란 그런 것이었다.

방심하면 귀가, 코가, 그리고 어느 날엔가는 목이 베이는.

“죄송하지만 폐하, 제가 아무래도 갑자기 충격을 받아 상태가 좋지 않은 것 같습니다. 송구하지만, 이만 물러나겠습니다.”

그리고 오늘, 알렉산드로가 연회의 시작을 알리고 첫 춤이 끝나자마자 첫 이탈자가 생겨났다.

베일란스 후작 부인이었다.

갑작스러운 충격.

그게 무엇인지는 명확했다.

오벨리아가 메이트리스의 일을 굳이 굳이 짚고 가 버린 이후, 고위 귀족들뿐 아니라 전체적으로 다들 싸늘해졌다.

그 말은 연회의 대다수 귀족이 메이트리스의 주인을 안다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알렉산드로의 얼굴은 오벨리아가 연회장을 나간 후 낭패감을 숨기기 위하여 시종일관 굳어 있었다.

아마 그가 뻔뻔하게 나갔다면, 고위 귀족들을 제외한 다른 이들은 오벨리아가 티룸의 종업원을 통해 심어놓은 의심에 대하여 끝까지 긴가민가했을지도 몰랐다.

그러나 평소보다 훨씬 콧대 높은 고위 귀족들의 태도와 어딘가 불안해 보이는 황제의 모습은 그 의심에 날개를 달아 주었다.

하지만 이 역시 알렉산드로가 알 수 있을 리는 없었다.

“…그래, 몸이 안 좋다면 어쩔 수 없지.”

베일란스 후작 부인은 충격이라는 단어로 알렉산드로가 귀족들을 사찰했다는 사실을 기어코 꼬집었다.

한마디로 네가 한 짓을 알고 있다면 얌전히 물러가도록 허락하라는 의미였다.

알렉산드로는 애써 말을 내뱉은 후, 두 입을 굳게 다문 채 으득 이를 갈았다.

솔직히 말하자면, 황실과 귀족들은 어떤 방법으로든 서로를 감시한다.

그런 주제에 귀족들은 당당하고 알렉산드로는 그럴 수 없는 것은 그저 그가 감시한다는 사실을 먼저 들켰기 때문이었다.

물론, 알렉산드로가 이 사실을 들켰다고 할지라도 그는 황제였고 황제를 처벌할 수는 없었다.

그리하여 귀족들도 증거를 들이밀며 크게 들고 일어나지 않는 것이었다.

그저 이렇게, 은연중에 알렉산드로를 지탄할 뿐.

그리고 그는 오늘만큼은 그 지탄을 얌전히 받아야만 했다.

그나마 황제와 완전히 척질 생각은 없다는 뜻으로, 알렉산드로가 자신들을 사찰한 사실을 귀족들은 입 밖에 내지 않고 있으니까.

괜히 입 다물고 있는 이들을 건드렸다가 누군가 터져 알렉산드로에게 직접적인 지탄이 돌아온다면 난감해지는 것은 당연히 그였다.

그렇기에 알렉산드로는 참는 수밖에 없었다.

더없이 굴욕스러웠다.

***

베일란스 후작 부인이 시작을 끊자 그 뒤로 황제의 연회를 빠져나온 사람은 약 절반가량이었다.

그렇지만 수는 중요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콧대 높은 고위 귀족들이 전부 힐켄테데의 연회를 찾아왔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황제의 연회에는 알렉산드로의 눈총을 사기에 두려운, 소위 말해 별 볼 일 없는 귀족들만이 남아 있다는 말이었다.

물론, 단순히 지위 때문에 남은 자들이 그렇다는 건 아니었다.

“초대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대공비 전하.”

“대공비 전하께서 직접 꾸리시는 티룸이라니, 기대가 큽니다.”

차례대로 베일란스 후작 부인과 시드론 백작 부인이 오벨리아에게 다가와 공손히 인사했다.

흔히 고위 귀족이라 불리며 귀족들에게도 떠받들어지는 이들이 이렇게 구는 이유가 있었다.

그들은 직감한 것이다.

앞으로 오벨리아의 티룸이 메이트리스의 역할을 빼앗으리라는 것을.

지금 사교계에는 구심점이라고 할 만한 사람이 없었다.

황실에 황태후가 있는 것도 아니었고, 전 황태자비처럼 가문이 독보적으로 잘나고 능력도 뛰어난 귀부인은 더더욱 찾아보기 힘들었다.

고위 귀족가의 여식들은 전 황태자비에 비하면 아무리 잘나도 부족해 보였다.

그렇다고 황제의 정부인 아그네스가 빈자리를 채울 수준이 되느냐고 한다면 그것도 아니었으니,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현재 사교계의 주인 자리가 공석인 셈이었다.

그 와중에 나타난 오벨리아 힐켄테데의 존재는 강렬했다.

보라, 첫 등장부터 황실의 연회를 깽판 놓지 않았는가.

어쩌면 오벨리아 힐켄테데가 새로운 사교계의 주인이 될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녀의 티룸은 그 일의 구심점이 될 터였다.

사교계에서 살아남으려면 필수적인 것이 사람을 보는 눈이었다.

힐켄테데의 연회에 온 자들은 최소한 그런 눈이 있거나, 그런 이들을 따라올 눈치라도 있는 사람이었다.

그러니 황실 연회에 남은 자들이 쭉정이에 불과하다는 것이었다.

사교계에서 겨우 그 정도의 작은 감각도 없는 존재들이니까.

“다들 와 줘서 기쁘군. 그럼 연회를 즐겨 주게.”

오벨리아 고개를 끄덕이며 우아하게 말했다.

그 어조와 태도가 특별히 고개를 치켜들거나, 오만하게 굴지 않았음에도 그녀는 자연히 이곳의 누구보다 가장 윗사람처럼 보였다.

그런 식으로 그녀는 몇 번 더 귀부인들과 인사를 나눴다.

오벨리아와 인사를 나누고자 하는 이가 많아 연회의 시작이 조금 늦어졌으나, 그날 불평하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

힐켄테데의 타운하우스는 카테리안느 저택을 제외하고 수도에서 가장 크고 화려했다.

가만히만 있어도 예술품인 저택이거늘, 연회장은 눈이 부실 정도로 귀한 것들로 가득했다.

차라리 공예품이라고 불러야 할 법한 음식들.

서역 멀리에서 들여와 은은히 광택이 도는 귀한 비단.

샹들리에를 장식한 최상급의 모이사나이트.

1년에 딱 3장만 만든다는 장인의 테피스트리.

그 모든 것들이 힐켄테데가 어떤 가문인지를 나타냈다.

심지어 오케스트라는 뮤수스였다.

그들이 누구던가.

황실 연회에조차 1년에 몇 번 오지 않는 예술의 도시 리베라의 가장 큰 자랑이 아닌가!

연회에 들어간 돈이 얼마나 천문학적인지는 감히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신년회나 생일 연회도 아니고, 단순히 수도에 온 기념으로 벌인 연회치고는 대단히 호화스러웠다.

그러나 타운하우스의 고용인들조차 이런 호화스러움이 당연한 양 담담했으니 힐켄테데가 평소에 얼마나 엄청난 것들을 누리고 있는지 알만했다.

그리하여 연회는 당연히도 대성공이었다.

그 모든 실상을 전해들은 알렉산드로는 분노를 다스리지 못했다.

“아아아악! 너희들은 대체 이 지경이 날 때까지 뭘 했단 말이냐!”

알렉산드로의 손이 책상 위의 물건들을 모조리 쓸어 버렸다.

와장창, 쨍그랑, 쿵!

온갖 요란한 소리가 그의 집무실을 꽉 채웠다.

알렉산드로의 기사들과 보좌관, 서기관 등이 모조리 몸을 움츠리며 입을 굳게 다물었다.

이럴 때 그들의 주군은 아무리 변명을 해 봤자 그 어떤 소리도 듣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오늘은 그것조차 알렉산드로의 심기를 거스른 모양이었다.

“다들 입이 붙기라도 했나? 어떻게 한 놈도 대답을 하는 놈이 없어!”

알렉산드로에게서 다시 벼락같은 노후가 터져 나왔다.

퍽, 쨍그랑.

그의 손에서 날아간 유리잔이 기어코 기사 한 명의 머리를 맞추고 바닥에 떨어졌다.

기사의 머리에서 피가 흘러도 알렉산드로의 화는 멎지 않았다.

전에 없이 폭력적인 알렉산드로의 행동에 집무실 안 다른 이들의 표정이 아까보다 훨씬 더 굳었으나, 그에게 그런 것 따위가 보일 리 없었다.

그 후로 한참을 더 씨근덕거리던 알렉산드로가 사납게 소리쳤다.

“메이트리스로 가서 당장 오벨리아와 작당한 것들을 잡아들여!”

알렉산드로도 알고 있었다.

오벨리아의 성격에 이미 그들을 다 피신시켰으리라는 것을.

그럼에도 불구하고 명령하지 않고는 속에 천불이 나서 버티기 힘들었을 뿐이었다.

알렉산드로가 허공을 매섭게 노려봤다.

마치 그 자리에 오벨리아가 있기라도 한 것처럼.

“오벨리아, 무엇이든 네 뜻대로 안 될 거야.”

알렉산드로가 이를 악물며 짓씹듯 내뱉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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