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9화. 되돌아온 폐태자비(5)
연회가 끝난 후, 오벨리아는 결혼식 날 아그네스가 들이닥쳤던 게 어쩌면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이미 한 번 겪었기 때문에 드디어 알렉산드로를 다시 마주했음에도 당장에 그를 죽이려 달려들지 않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다행이라고 생각했던 것이 무색하게, 새까만 밤중에 홀로 남자 오벨리아를 찾아든 것은 잘 다스린 줄 알았던 증오였다.
‘아… 드디어, 여기까지 돌아왔어.’
오벨리아는 덜덜 떨리는 손끝을 꽉 말아 쥐었다.
그녀는 지금 당장이라도 황궁으로 달려가 알렉산드로의 목을 조르고 싶었다.
이성은 가장 처절하고 완벽한 복수를 추구하지만, 마음은 미친 짐승처럼 알렉산드로의 피를 갈구했다.
오벨리아가 눈을 꾹 내리감고 애써 숨을 골랐다.
제 안에 존재하는 줄도 몰랐던 날 것 그대로의 잔인함이 그녀의 안에서 날뛰었다.
아, 정말이지… 오벨리아는 알렉산드로를 죽이고 싶었다.
똑똑똑.
갑자기 들려온 노크 소리에 오벨리아가 몸을 들썩이며 화들짝 놀랐다.
증오에 사로잡힌 상념 속에 빠져 있다가 현실로 끌려 나온 탓이었다.
“오벨리아, 잠들었나?”
밤중의 손님은 에크하르트였다.
오벨리아가 자리에서 일어나 문으로 다가갔다.
“…무슨 일이야?”
오벨리아가 한 박자 늦게 문을 열었다.
증오로 들썩이느라 엉망이 되었을 표정을 갈무리해야만 했기 때문이다.
“…이게 필요할 것 같아서.”
에크하르트가 잠시 망설이다가 무언가를 내밀었다.
오벨리아의 두 눈에 놀라움이 퍼졌다.
그의 손에 들린 것은 와인 잔 두 개와 와인이었다.
오벨리아는 연회 동안 단 한 번도 술을 입에 대지 않았다.
그녀의 건강 상태가 좋지 않으니 몸이 술을 견디지 못할 것 같아서였다.
그런데 에크하르트가 술을 들고 방을 찾아올 줄이야.
“의원에게 물어봤는데 제일 도수가 낮은 것이라면 두세 잔 정도는 괜찮다더군.”
테이블 앞에 앉은 에크하르트가 잔에 와인을 따르며 말했다.
그가 잔을 건네주자, 오벨리아는 얼떨떨한 기분이 되어 잔을 받아들었다.
뭐랄까, 언제부턴가 그녀의 건강 문제에 관하여 엄격하게 굴던 에크하르트가 술을 권하니 조금 기분이 이상했다.
“…오늘은 너한테 필요할 것 같아서.”
오벨리아가 무의식적으로 에크하르트를 빤히 쳐다본 모양이었다.
그가 멋쩍은 얼굴로 변명하듯 말했다.
“알렉산드로 론체스터와 만났잖나.”
“…아.”
오벨리아는 자신이 방금 내뱉은 소리가 참 멍청한 것 같다고 생각했다.
그건 말이 아니라 그저 소리였으니까.
그러나 아마 그것은 그 순간 오벨리아의 심정을 가장 잘 표현한 것이었을 터였다.
어떤 단어로도 지금 그녀가 느끼는 감정을 표현할 수 없었으니까.
오벨리아는 끝내 일리어스에게 자신이 죽는다고 말하지 못했다.
8년을 헌신한 남편이 제게 그 대가로 건넨 것이 맹독이라고.
그 남편에게 복수하기 위해 스스로 맹독을 집어 마셨다고.
차마, 저를 사랑하는 가족에게 말할 수 없었던 탓이었다.
정말이지, 그 비참함과 처절함을 오빠에게 드러내고 싶지 않았다.
그리하여 결국 또 다시 오벨리아가 무슨 일을 겪었는지 전부 아는 것은 오직 에크하르트가 되었다.
만약 그가 찾아오지 않았더라면, 그녀는 이 밤 내내 잠들지 못하고 증오만을 곱씹었을 것이다.
에크하르트는 오벨리아의 증오를 이해했다.
이해.
그 두 글자는 참으로 기묘한 울림을 주는 것이었다.
“…당신도, 알렉산드로를 만난 건 마찬가지잖아.”
오벨리아가 괜스레 목을 가다듬고 말을 꺼냈다.
그러고 보면 알렉산드로에 의해 많은 것을 잃은 건 에크하르트 또한 마찬가지였다.
그녀는 자신의 감정에 치우쳐져 그 점을 생각하지 못했는데, 그는 달랐다.
그게 오벨리아의 얼굴을 달아오르게 만들었다.
실수했다는 생각이 들어 창피했다.
사실 에크하르트가 그녀의 마음을 살필 것이 아니라, 오벨리아가 그를 걱정했어야 옳은 게 아니던가.
“그래서 같이 마시자고 가지고 왔지 않나.”
짠.
맑은 소리가 방 안을 울렸다.
에크하르트는 전혀 개의치 않는 얼굴로 오벨리아의 잔에 제 잔을 부딪쳤다.
그녀는 와인을 머금은 그의 목울대가 넘어가는 모습을 멍하니 바라봤다.
그러다가 눈이 마주치자, 오벨리아가 다급히 잔을 입가로 가져갔다.
오랜만에 혀를 적시는 와인은 도수가 낮은 탓인지, 아니면 일부러 이런 것을 골라 온 것인지 달달했다.
그녀는 그 달달함을 핑계 삼아 연달아 술만 홀짝였다.
사실은 시선을 들지 못했을 뿐이었다.
“천천히 마셔.”
에크하르트가 오벨리아의 손을 잡아 가볍게 제지했다.
겨우 한 잔을 비웠을까.
그녀의 얼굴이 옅게 붉어졌다.
오벨리아의 주량이 그렇게 약한 편도 아닌데 극도로 허약해진 몸은 이 조금의 술에조차 크게 영향을 받는 모양이었다.
“…아, 응.”
오벨리아가 느릿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도 술기운이 돌아서 그런가, 그녀의 마음이 조금 느슨해지며 어깨가 늘어졌다.
마음이 풀어지면 늘어지는 것은 마음뿐만이 아니었다.
“…에크하르트.”
오벨리아가 나지막하게 에크하르트를 불렀다.
그녀와 달리 처음 마신 이후 거의 술을 마시지 않았던지, 그의 잔에는 와인이 꽤 남아 있었다.
오벨리아의 시선은 자신의 잔에 박힌 채였고 목소리는 중얼거림에 가까웠다.
“…고마워.”
와인을 한 모금 더 홀짝인 뒤, 오벨리아가 입을 열었다.
“내가 복수하겠다고 날뛰는 게… 당신 입장에서는 한없이 뻔뻔하기 그지없는 일일 텐데도.”
오벨리아의 목소리가 기어가듯 희미하게 흘러나왔다.
자신이 지금 내뱉는 말조차 뻔뻔하게 들릴까 봐 저어된 탓이었다.
‘그런 네가, 제 소중한 사람들은 그 목숨이 안타까워 어쩔 줄 모르며 복수를 하겠다고 날뛰는 것부터가 참 뻔뻔한 일이지.’
에크하르트가 미미하게 움찔했다.
자신이 오벨리아를 찌를 의도로 쏟아낸 말이 생각났기 때문이다.
그때의 그는 고의적이었다.
그녀가 상처 입고, 지금과 같은 반응을 보이길 바라서 날 선 말들을 골라 입 밖으로 냈다.
그런데 그 결과물이 눈앞에 있으니 왜 이리 불편한 기분이 드는지 알 수 없었다.
“사실, 당신이 위로해 줄 줄은 몰랐어. 물론 감히 위로받을 자격이 있다고 생각한 적도 없지만.”
중얼중얼하는 음성은 혼잣말에 가까웠다.
감히.
그 단어는 숨 쉬듯 당연하게 언제나 남 위에 서 있을 거 같은 오벨리아와 전혀 어울리지 않았다.
“됐으니까, 그만….”
에크하르트는 자신도 모르게 오벨리아의 말을 끊고 싶었다.
그냥, 어쩐지 봐서는 안 될 모습을 본 기분이었다.
그러나 술을 계속해서 홀짝인 탓인지 오벨리아는 그의 말이 귀에 들어오지 않는 양 말을 이었다.
“그래서 당신이 가끔 이렇게 나올 때마다, 나는 무서워.”
그리고 그 말이 에크하르트의 모든 것을 멈추게 했다.
그가 무의식적으로 와인 잔을 꽉 잡아 쥐었다.
“나는….”
오벨리아는 잔을 둥글려 와인이 찰랑거리는 것을 바라보며 말끝을 늘어트렸다.
그러더니 돌연, 그녀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만 자야겠어. 나, 너무 쓸데없는 말을 많이 하는 거 같아.”
침대를 향해 걷는 오벨리아의 걸음걸이가 불안하게 휘청거렸다.
계속해서 술을 홀짝이고 답지 않게 말을 늘어놓더니, 역시나 벌써 취기가 돈 모양이었다.
정말이지 연약한 몸이었다.
그리하여 에크하르트가 그녀를 부축하기 위해 몸을 일으켰다.
저러다가 넘어질까, 불안했다.
“아니…!”
순간 오벨리아가 대뜸 목소리를 높였다.
에크하르트의 몸이 그대로 멈춰 섰다.
“거기, 그대로 있어.”
오벨리아가 손가락으로 척, 에크하르트를 가리켰다.
방이 넓기야 했으나, 테이블에서 침대까지 아주 길지도 않은 거리를 제대로 가지 못하고 휘청거리면서도 그녀의 음성은 제법 단호했다.
“오지 마.”
오벨리아가 쓰러졌던 이후, 그녀의 방에 깔린 카펫은 넘어져도 멍조차 하나 들지 않을 푹신한 것으로 바뀌었다.
그러니 그녀가 다칠 일은 없을 텐데도 어쩐지 오벨리아는 위태로워 보였다.
우스운 일이었다.
고작 그 짧은 거리를 걷는 것뿐일진대.
어찌 됐든 오벨리아는 계속 걸어갔다.
그녀가 마침내 넘어지지 않고 침대 위에 안착했을 때, 에크하르트는 자신이 어쩐지 숨을 참고 있었던 것을 깨달았다.
풀썩.
오벨리아의 상체가 뒤로 넘어갔다.
그녀는 천장을 보고 누운 채로 또 다시 중얼거리듯 말했다.
“당신이, 계속… 거기 있었으면 좋겠어….”
겁먹은 어린아이처럼 주저함이 가득하고 떨림으로 겨우 내뱉은 말이었다.
오벨리아의 두 눈이 내리 감겼다.
계속 거기 있으라는 말이 오지 말라는 건지, 가지 말라는 건지 분간조차 되지 않는 밤.
그런 밤이었고 그래서 에크하르트는 한참을 그녀의 말 그대로 그 자리에 있었다.
***
절반가량의 초대 인원이 연회장을 이탈한 탓에 알렉산드로가 연 황제 즉위 축하 연회는 완전히 엉망으로 끝나고 말았다.
오기로 억지로 연회를 밤늦게까지 끌고 가나, 일찍 접어 버리나, 모두 수치스럽기는 매한가지였다.
그러나 알렉산드로는 결국 둘 중 하나는 골라야만 했다.
끝내 그는 수치스러운 꼴을 더 길게 당하느니 피곤하다는 핑계로 일찍 연회를 끝내기를 선택했다.
그 후 알렉산드로는 분명 선황제가 자신을 찾을 것이리라고 생각했다.
당장에라도 그를 불러들여 또 다시 황실에 망신을 줬다면서 호되게 책망할 줄 알았다.
“폐하, 선황제 폐하께서 찾으십니다.”
그런데 의외로 선황제의 시종장은 망친 연회 이후 며칠 뒤에나 알렉산드로를 찾아왔다.
그는 의중을 알 수 없는 선황제의 행동에 불안함을 느끼며 부름에 응했다.
그러나 알렉산드로는 선황제를 만나는 순간, 제 아버지가 왜 며칠의 말미를 두고 자신을 불렀는지 곧바로 알게 되었다.
“네 놈, 바실리스크의 독을 사용했더냐?”
선황제가 고요하되 날 선 목소리로 물었다.
그의 뱀처럼 서늘하고 소름 끼치는 시선이 알렉산드로를 짓눌렀다.
“오벨리아 힐켄테데가 오벨리아 카테리안느냐, 이 말이다.”
이어 묻는 선황제의 목소리는 언제든 눈앞의 아들을 베어 버릴 것만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