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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한부 폐태자비는 살아있다-51화 (51/136)

51화. 훔쳐간 자리(1)

티룸 앞에는 누가 봐도 황실의 것으로 보이는, 새하얀 바탕에 온 장식이 금으로 된 마차가 서 있었다.

황제가 왔다는 걸 광고라도 하는 듯한 작태에 오벨리아는 기가 막혔다.

이토록 요란하게 찾아오다니.

굳이 과시하려는 모양새가 우스웠다.

“황제 폐하를 뵙습니다.”

어쨌든 그래도 알렉산드로는 황제였다.

그 자리의 모두가 그렇듯이 오벨리아 또한 허리를 숙여 인사했다.

“대공비가 직접 운영하는 티룸을 열었다고 해서 와 봤네만, 괜찮군.”

알렉산드로는 고개를 들라는 말도 없이 다짜고짜 가게를 품평했다.

괜찮다.

눈이 부시도록 장관인 곳을 표현하기에는 지나치게 가벼운 말이었다.

그러나 오벨리아는 숙인 자세를 흐트러트리지도, 표정을 일그러트리지도 않았다.

그녀는 그저 담담히 우아한 자태를 유지하고 있을 뿐이었다.

알렉산드로의 입매가 비틀렸다.

하여간, 오벨리아는 흐트러지는 법이 없었다.

그와 함께했던 8년간에도, 단 한 번도.

그래서 알렉산드로는 아그네스가 좋았다.

아그네스는 완벽하지 않았으니까.

“…모두 일어나게.”

알렉산드로가 마침내 몸을 일으켜도 좋다는 허락의 말을 내뱉었다.

오벨리아의 얼굴에는 굴욕감 따위 전혀 없었다.

그녀는 그런 사람이었다.

이깟 인사치레, 필요하다면 수십 수백 번도 할 수 있었다.

“그대와 할 이야기가 있어서 왔는데.”

알렉산드로가 오벨리아에게 다가가 말했다.

그가 안내하라는 듯 뻔뻔하게 티룸에 시선을 두었다.

“폐하, 송구하지만 이미 티룸에 약속된 인원이 전부 찬지라 모실 수 없을 것 같습니다.”

오벨리아가 단번에 그것을 잘라냈다.

그녀는 분명 오픈 첫날에 힐켄테데 연회에 온 자들에게만 티룸의 초대장을 주겠노라 말했다.

신뢰를 가게가 연 첫날부터 깨트릴 수는 없는 법이었다.

“감히, 황제인 나를 내쫓겠다?”

알렉산드로가 오벨리아를 내려다보며 위협적으로 말했다.

그러나 그녀는 여전히 차분했다.

“폐하께서 굳이 억지로 문을 열고 들어가시겠다면, 그건 제가 어떻게 할 수 없겠지요.”

네가 무뢰배처럼 구는 것까지 내가 책임질 일은 아니다.

오벨리아는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알렉산드로가 그녀를 노려봤다.

오벨리아의 시선은 철저히 예법대로 황제보다 아래쪽을 향해 있었다.

한때는 서로 사랑을 속삭이는 잉꼬부부였던 두 사람 사이에 말없이도 칼날처럼 첨예한 분위기가 흘렀다.

“날 들여보내야 할 거야.”

알렉산드로가 갑작스레 오벨리아에게 훌쩍 다가서서 속닥였다.

“라이너스가 누구와 함께 있는지를 기억한다면.”

마침내 오벨리아의 표정이 굳었다.

알렉산드로의 입가에 비열한 미소가 떠올랐다.

라이너스가 현재 감시하고 있는 사람은 하나였다.

카테리안느 공작 부인.

알렉산드로는 현재 오벨리아의 어머니를 두고 협박하는 중이었다.

“미친놈.”

입술을 질끈 깨문 오벨리아의 입술 새에서 작게 욕설이 튀어나갔다.

그러자 알렉산드로가 더욱 환히 웃었다.

“너도 언제까지고 우아하기만 하진 않군.”

알렉산드로의 목소리는 노골적으로 즐거워 보였다.

늘 예법의 교과서 같은 우아한 말투만 쓰던 오벨리아가 거친 말을 쓴 것이 흡족한 모양이었다.

오벨리아가 미간을 찡그러트렸다.

어떻게든 그녀를 망가트리고자 하는 알렉산드로의 저열한 악의가 정말이지 기분 더러웠다.

“내가 아무리 엉망이어 봤자, 너보다 더하겠어.”

오벨리아가 돌연 허리를 반듯하게 세우며 생긋 웃었다.

“해 봐.”

“뭐?”

알렉산드로가 잘못 들었다는 듯이 두 눈을 깜박 깜박였다.

그러나 오벨리아는 그가 자신을 붙잡을 틈을 주지 않고 뒤로 물러섰다.

대공비와 황제가 굳이 붙어 오랫동안 속닥거리면 사교계에 안 좋은 소문이 날 것은 뻔한 일이니까.

설령 오벨리아와 알렉산드로가 황실 연회에서 어떤 식으로 대치했든 상관없었다.

사람들은 소문을 만들 기회를 놓치지 않을 터였다.

“그럼 안녕히 가십시오, 폐하.”

오벨리아가 치맛자락을 잡고 가볍게 무릎을 굽혔다.

“잠깐…!”

오벨리아가 뒤돌아서자, 알렉산드로가 그녀의 손목을 낚아챘다.

그녀가 이렇게 단호하게 나올 줄 몰랐기 때문에 당황하여 나온 무의식적인 행동이었다.

그리고 곧 오벨리아도 알렉산드로도 동시에 굳어 버렸다.

모두의 시선이 황제가 갑자기 대공비의 손목을 잡은 것에 쏠려 있었기 때문이다.

알렉산드로 또한 이런 식으로 주목받으려던 것은 아니었기 때문에, 이 상황이 당황스럽기 그지없었다.

상황 판단은 언제나 그랬듯 오벨리아가 더 빨랐다.

그녀가 매정하리만치 칼 같은 태도로 제 손목을 빼냈다.

“아무리 제게 화가 나셨다고 한들… 이런 식으로 화풀이를 하시면 곤란합니다, 폐하.”

오벨리아가 눈을 가늘게 뜨며 말했다,

그 냉담한 태도가 사람들의 머릿속에 모락모락 피어오르던 불순한 생각들을 얼어붙게 했다.

“…뭐?”

알렉산드로는 당황하여 좀 전과 똑같은 말을 내뱉었다.

오벨리아가 그를 티룸에 못 들어가게 했다고 화풀이나 한 치졸하고 무례한 자로 만들었기 때문이다.

“티룸에는 다른 날, 공식적으로 폐하를 모실 수 있도록 하죠.”

알렉산드로의 반응이 어떻든 간, 오벨리아는 신경 쓰지 않았다.

그녀의 말은 마치 그가 절실하게 티룸에 관심이 있는 것처럼 들렸다.

“하, 지금 무슨….”

“폐하.”

오벨리아가 따지고 들려는 알렉산드로의 말을 막았다.

그는 선택해야만 했다.

이대로 자꾸만 말을 더해 추문을 만들든, 혹은 무례한 이로 남든.

어느 쪽이든 탐탁지 않기는 매한가지였다.

그러나 더 치명적인 쪽을 고르자면, 추문이었다.

알렉산드로는 황태자비가 죽고 곧바로 아그네스를 황후로 올리려 했다.

그것만으로도 황제와 그 정부에 대한 소문이 가득했다.

그런 와중에 또 다른 여인에게 관심을 두었다고 오해를 사는 것보다는 차라리 잠깐 무례한 쪽이 되는 게 훨씬 나았다.

“…그대 말대로 다음에 오지.”

결국, 알렉산드로는 아무 해명도 하지 않고 휙 마차에 올랐다.

그가 아득 이를 갈았다.

황제도 오고 싶어 하는 티룸.

오벨리아를 협박하려 들렸다가 괜스레 그런 날개만 달아 준 셈이었다.

“살펴 가십시오, 폐하.”

오벨리아가 무릎을 굽혀 다시 정중히 인사했다.

그 태도가 정말로 둘 사이에는 아무것도 없는 듯 깔끔하기 그지없었다.

***

알렉산드로를 그런 식으로 보내고 난 뒤, 오벨리아는 안도의 한숨을 홀로 삼켰다.

그의 앞에서는 대범한 척했으나,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남은 유일한 존재가 어머니였다.

그런 어머니를 인질로 내세우는데, 아무리 오벨리아라고 해도 동요하지 않을 턱이 없었다.

그저 태연한 척을 했을 뿐이었다.

그래야만 알렉산드로가 카테리안느 공작 부인을 무기 삼아 오벨리아를 휘두를 생각을 쉬이 하지 못 할 테니까.

“알렉산드로가 어머니로 나를 협박했어.”

그러나 힐켄테데의 타운하우스로 돌아온 뒤, 오벨리아는 곧바로 에크하르트를 찾았다.

“협박이 안 통하는 척, 무시하는 척해서 돌려보냈지만- 아마 다음에도 똑같은 방식으로 나에게 무언가를 요구하려 들겠지.”

오늘이야 알렉산드로가 오벨리아의 너무나 담대하고 덤덤한 반응에 당황하여 넘어갔다지만, 그는 쉽게 포기하지 않을 터였다.

오벨리아에게서 동요를 읽어낼 때까지 집요하게 카테리안느 공작 부인으로 그녀를 뒤흔들려 들 것이 뻔했다.

“지금에야 라이너스의 계승 문제도 있고 해서 어머니에게 별다른 위협을 가하지 않는다지만, 내가 계속 뜻대로 안 따라 주면 돌변할지도 몰라.”

오벨리아는 에크하르트의 대답을 듣기도 전에 끊임없이 말을 늘어놓았다.

더불어 이리저리 왔다 갔다 하며 방 안을 헤매는 발이 그녀가 초조하다는 증거였다.

오벨리아도 지금 당장은 객기를 부릴 수 있었다.

한두 번 그런다고 하여 그녀의 어머니가 목숨을 잃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것도 한두 번일 뿐이었다.

“어머니라면 본인의 목숨을 걸고서라도 알렉산드로와 타협하지 말라고 하시겠지만….”

가만히 말을 듣고만 있던 그가 그녀의 어깨를 붙잡았다.

“알겠으니 우선 진정해라. 네 어머니를 지키려거든 이성적으로 판단해야 하지 않나.”

오벨리아는 에크하르트에 의해 강제로 제자리에 세워진 채 말을 몰아 하느라 찼던 숨을 들이쉬고 내쉬었다.

그녀가 어느 정도 진정한 듯이 보이자, 그가 말을 이었다.

“일리어스 카테리안느의 복권은 당장 무리일지라도, 공작 부인부터 카테리안느 저택에서 구출해내는 게 좋을 거 같군.”

에크하르트의 말이야말로 오벨리아가 하고 싶었던 이야기였다.

지금 당장은 카테리안느의 기사들이 라이너스의 손아귀에 있었고, 제 2기사단을 다스리는 알렉산드로 또한 그의 편이었다.

일리어스가 대책 없이 모습을 드러내면 괜한 목숨만 잃게 될 위험만 커지는 셈이었다.

그래서 사실, 일리어스가 카테리안느의 후계자로 복권될 때까지는 공작 부인이 저택에서 버티고 있는 것이 좋았다.

카테리안느 공작이 없는 저택에 공작 부인마저 없으면 정말로 라이너스의 세상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알렉산드로가 이미 카테리안느 공작 부인으로 협박을 했으니, 오벨리아가 어머니를 구하려 드는 것쯤은 충분히 짐작할 터였다.

어려운 일이 될 게 예정된 셈이었다.

즉, 에크하르트로서는 카테리안느 공작 부인을 구하자고 할 필요가 없었다는 의미다.

그저 오벨리아가 현 상황을 방관하지 못할 뿐이었다.

제 어머니가 위협당하게 생겼다는데 그냥 두고 볼 수 있는 자식이 어디 있겠는가.

그런데 구하자는 말을 에크하르트가 먼저 해 주었으니 고맙지 않을 수 없었다.

“카테리안느의 가신 중에 라이너스의 편을 드는 사람이 몇인지, 누가 라이너스의 편에 붙었는지 알아 볼 수 있을까?”

오벨리아가 생각해 두었던 바를 에크하르트에게 꺼내 물었다.

그녀는 더 이상 라이너스를 오빠라고 부르지 않았다.

혈육의 정을 먼저 저버린 것은 라이너스였으니, 오벨리아 또한 더는 그 정을 지키지 않을 예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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