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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한부 폐태자비는 살아있다-52화 (52/136)

52화. 훔쳐간 자리(2)

카테리안느에는 현재 공작도 그 후계도 부재 상태였다.

게다가 빈자리를 채울 수 있는 공작 부인마저 구금 상태였으니 사실 카테리안느가 제대로 돌아가는 게 말이 되지 않았다.

사실 황실 2기사단만 없었다면, 라이너스를 따르는 카테리안느의 기사들만으로는 저택을 삼엄하게 경비하기도 어려웠을 터였다.

황실 2기사단과 라이너스의 기사들이 협력을 하고 있는 탓에 당장 카테리안느 저택을 탈환하는 것은 무리였지만, 이미 그 내부가 한 번 흐트러진 터였다.

그리하여 오벨리아가 필요한 정보를 알아내는 것쯤은 에크하르트에게 어렵지 않은 일이었다.

“에스더 백작이 라이너스의 편을 들고 있다고?”

그리고 며칠 뒤, 에크하르트에게서 라이너스를 지지하는 가신들의 목록을 받아 본 오벨리아는 두 눈을 의심했다.

“에스더 백작은 철저한 실리주의자야. 라이너스가 혈통주의에 빠진 것을 경멸하던 사람이기도 해.”

다만 에스더 백작은 똑똑한 사람이라, 단 한 번도 라이너스의 앞에서 그런 감정을 티 낸 적이 없었지만.

“그런 것치고는 현재 라이너스 카테리안느의 측근이 되어 있던데.”

오벨리아의 입이 굳게 다물렸다.

알렉산드로와 아그네스에게 배신 당한 이후로, 그녀는 자신이 생각하고 판단한 사람들의 모습을 믿을 수 없어졌다.

어쩌면 자신이 틀렸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오벨리아의 안색이 흐려졌다.

자신의 판단력을 의심하게 된다는 것은 참으로 끔찍한 기분이었다.

“라이너스의 측근들에게 사람을 붙여 뒀다. 뭐라도 무조건 찾아낼 거야.”

오벨리아가 멈칫했다.

에크하르트의 어조가 마치 자신을 달래는 것만 같았기 때문이다.

그녀가 잠시 그를 빤히 쳐다봤다.

요즈음 들어 에크하르트는 오벨리아에게 상당히 유해졌다.

꼬집어 말하라면 딱 뭐가 그렇다고 할 수는 없었지만, 말투나 일상적인 행동들이 그랬다.

그리고 그녀는 단언컨대 그게 좋지 않았다.

왜냐하면, 아마도 그가 유해지기 시작한 시점이 함께 술을 마셨던 그 날 밤 같았기 때문이다.

예상치 못하게 약해진 주량 덕에 자신도 모르게 취해 지나가 버린 밤의 일을 기억하지 못하는 오벨리아로서는 불안할 수밖에 없었다.

에크하르트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말로 그 밤의 일을 그저 넘어가 버릴 뿐이니 더더욱 그랬다.

비어 버린 기억은 무한한 상상을 만들어냈다.

혹시라도, 혹시라도… 제가 그들 사이의 선을 밟아 버렸을까 봐.

오벨리아는 그게 가장 두려웠다.

“모든 사람이 널 배신하진 않을 거다. 이프넌트 후작이 그랬듯이.”

에크하르트는 오벨리아가 침묵을 유지하는 것이 불안함 때문이라고 여긴 모양이었다.

그가 또 다시 그녀를 위로하는 듯한 말을 꺼냈다.

오벨리아는 정말이지, 이런 걸 원하지 않았다.

곤란했다.

그런 그녀를 이 상황에서 벗어나게 해 준 것은 의외의 방문객이었다.

“대공비 전하, 황제 폐하께서 만나기를 원하신다며 찾아오셨습니다.”

아니, 불청객이었다.

***

알렉산드로는 밖에서 오벨리아를 만나지 않는 게 좋겠다고 판단했다.

그녀는 그가 얼마나 타인의 시선을 신경 쓰는지 지나치게 잘 알았다.

그리고 오벨리아는 무엇이든 잘 이용할 줄 아는 사람이었다.

그리하여 자꾸만 그녀의 페이스에 휘말리게 되는 것이 알렉산드로는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게 그가 오벨리아를 단둘이 만나겠다며 대뜸 연락도 없이 찾아온 까닭이었다.

“이젠 별짓을 다 하는구나, 너.”

오벨리아는 알렉산드로가 있는 응접실로 들어오며 노골적인 혐오를 드러냈다.

상대가 황제라는 것은 이럴 때만큼은 불편했다.

황제가 불쑥 찾아오더라도, 어쨌든 결국 신하가 된 입장으로써 황제를 내칠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그나마 미리 방문을 허가받지 않은 알렉산드로의 호위들은 모조리 대문 밖에 남아 있게 했는데, 그것은 전적으로 힐켄테데이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오벨리아, 나와 끝나지 않은 이야기가 있지 않나?”

오벨리아가 자리에 앉기도 전에, 알렉산드로가 다시 카테리안느 공작 부인을 들먹였다.

그녀가 자리에 우아하게 앉으며 다리를 꼬고 그를 쳐다봤다.

“무슨 말.”

지긋지긋한 인간.

오벨리아는 정말이지, 알렉산드로라면 치가 떨렸다.

그러나 그녀의 어조는 마치 그가 할 말이 전혀 궁금하지도 않고 일말의 관심조차 없는 것만 같았다.

툭.

알렉산드로가 오벨리아의 앞에 작은 주머니 하나를 던져 놓았다.

“가져가.”

오벨리아는 그 주머니에 손도 대지 않았다.

저 안에 무엇이 들어있든, 그녀는 괜찮아야만 했다.

그렇다면 애초에 보지 않는 것이 나았다.

“보는 게 좋을 텐데.”

알렉산드로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그가 원했던 오벨리아의 반응이 아닌 모양이었다.

“필요 없어.”

오벨리아는 단호하게 다시 한 번 거절했다.

그러자 이제는 완전히 얼굴을 일그러트린 알렉산드로가 돌연 주머니를 홱 집어 들더니 뒤집어 안의 것을 쏟아냈다.

주머니 안에서 금빛 머리칼이 후두두 떨어졌다.

“보라고 했는데, 왜 말을 안 들을까.”

알렉산드로가 빈정거렸다.

그러나 오벨리아는 그의 말 따위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그녀의 시선은 머리칼에 박혀 있었다.

바실리스크의 독을 마시기 전, 그녀의 머리칼 색과 똑같은… 아마도, 어머니의 것이 분명할 머리칼에.

“하… 하하… 하하하…!”

오벨리아가 돌연 한 손으로 제 얼굴을 가리며 웃음을 터트렸다.

아직도 나이 든 귀부인들은 긴 머리칼을 소중히 여겼다.

그분들의 세대에는 그것이 당연했다.

그녀의 어머니도 마찬가지였다.

아, 네놈은 어찌 이리도 내 속을 뒤집어놓는지.

정말이지 널 죽이고 싶다.

찻잔이라도 손에 쥐고 있었다면 그것을 알렉산드로에게 집어던졌을 텐데.

오벨리아는 그에게 아무것도 내주고 싶지 않아 말끔하게 둔 테이블이 처음으로 아쉬워졌다.

그녀의 눈에 안광이 번뜩였다.

붉은 눈이 막 뽑아낸 피처럼 맑고 섬뜩하게 빛났다.

순간 오벨리아와 시선을 마주친 알렉산드로가 자신도 모르게 움찔했다.

그리고 곧 그 사실이 자존심이 상했던지, 그가 이전보다 목소리를 높였다.

“이번에는 내 말을 제대로 들어야 할 거야. 그렇지 않으면 다음에는….”

쿵.

그 순간 검이 오벨리아와 알렉산드로 사이의 테이블을 두 동강 내놓았다.

정확히는, 칼날도 아닌 칼집이.

알렉산드로가 순간 등골이 섬뜩해져 제게 드리운 그림자의 주인을 올려다봤다.

아직 뽑히지도 않은 칼날로 원목 테이블을 반으로 갈라놓은 에크하르트가 서늘한 시선으로 알렉산드로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폐하, 내 집에서 이러시면 내가 곤란하지요.”

에크하르트가 조곤조곤한 말투로 알렉산드로를 위협했다.

그래, 그건 위협이었다.

존대이되 존대가 아닌.

“간이 부으신 건지… 주제를 모르시는 건지.”

“뭐, 너 감히…!”

에크하르트의 노골적인 무시에 알렉산드로가 순간 분노하여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러나 어느 순간 칼집에서 벗어나 섬뜩하게 빛나는 날이 제 목에 닿아 있자, 알렉산드로는 그대로 굳어 버렸다.

“이곳에서는 네 말대로, 내가 감히 이렇게 너한테 말을 편하게 해도, 심지어는 칼날을 들이밀어도- 이 사실을 증명해 줄 이 하나 없는데 도대체 무엇을 믿고 이리 까부는지.”

알렉산드로가 자신도 모르게 침을 꿀꺽 삼켰다.

에크하르트가 검을 뽑는 것조차 워낙 찰나에 이루어져서, 알렉산드로는 그 모습을 눈에 담지조차 못했다.

에크하르트와 알렉산드로 사이 무위 차이가 너무나 명확했다.

오벨리아는 그 모습을 고스란히 눈에 담고 있었다.

제 앞에서는 기세등등하게 굴더니, 결국 황제라는 지위가 쓸모없어지면 저보다 강한 무력 앞에서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알렉산드로를.

더없이 한심하고 그토록 경멸스러울 수가 없었다.

사랑이라는 가장 튼튼하고 얄팍한 베일이 벗겨지면 그 자리에 남는 것은 대개 이런 것이었다.

“내 어머니가 긴 머리칼을 상당히 아끼셔.”

오벨리아는 머릿속에 누가 얼음물을 들이부은 것처럼 빠르게 진정을 되찾았다.

상대가 비열하게 나올수록, 그녀는 냉정해져야만 했다.

“너 때문에 속이 많이 상하셨을 거라는 이야기야.”

오벨리아가 에크하르트가 잡은 칼 손잡이 위로 손을 얹었다.

에크하르트가 들고 있는 것에 손을 얹었을 뿐인데도 검의 무게가 묵직했다.

순간 그녀가 검을 홱 움직였다.

“악…!”

알렉산드로가 놀라 주저앉았다.

그의 검은 머리칼이 가닥가닥 잘려나가 팔랑팔랑 바닥 아래로 떨어졌다.

“그러니까 너도 똑같이 잘려야지.”

오벨리아가 무릎을 굽혀 알렉산드로와 시선을 맞췄다.

“다음에는 뭐? 더한 짓도 하겠다고? 내 어머니의 손가락이라도 자르게?”

오벨리아가 손끝으로 알렉산드로의 손목을 톡톡 건드렸다.

그녀가 해사하게 웃었다.

“해 봐. 그러면 넌 손가락이 아니라, 손목이 잘릴 테니까.”

오벨리아가 손톱을 뾰족하게 세워 알렉산드로의 손목을 그었다.

꽤 세게 긁은 탓에 손톱이 지나간 자리의 피부가 붉었다.

탁!

“…내가 못 할 거 같아?!”

알렉산드로가 거칠게 오벨리아의 손을 쳐내며 소리쳤다.

그의 얼굴이 그녀의 앞에서 주저앉았다는 사실에 대하여 수치심으로 물들어 있었다.

“나는 못 할 거 같고?”

오벨리아가 조곤히 말했다.

그러자 알렉산드로가 두 입술을 꾹 눌러 다물었다.

8년이었다.

그녀는 그를 황위에 올리기 위해서 8년 동안 모든 수를 다 썼다.

그래, 알렉산드로만큼 오벨리아가 무엇을 할 수 있는지 잘 알고 있는 사람도 없었다.

그러니 그는 감히 그녀가 하지 못할 것이라고 장담할 수 없었다.

알렉산드로가 아는 오벨리아는 대체로 남들이 절대 못 하리라고 여겼던 일도 해내는 사람이었으므로.

“그래도 허튼 수작이 부리고 싶어지거든, 잘 생각해 봐.”

오벨리아가 알렉산드로의 어깨를 툭, 툭 털어 주었다.

처음 알렉산드로가 자신을 협박했을 때야 속으로 당황했다지만, 그 후에 생각해 둔 게 있었다.

에크하르트가 도움이 된 것은 사실이지만, 그가 돕지 않았더라도 오벨리아는 이 상황을 타개했을 것이다.

“네 자식이 사생아로 낙인찍히는 꼴을 보고 싶지 않다면 말이야.”

왜냐하면, 오벨리아는 알렉산드로와 아그네스 사이의 가장 큰 비밀을 알고 있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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