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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한부 폐태자비는 살아있다-53화 (53/136)

53화. 훔쳐간 자리(3)

알렉산드로는 이를 갈며 돌아갔다.

그는 오벨리아에게 아그네스의 임신 사실을 말한 적이 없었고, 그 사실은 현재 비밀로 해 둔 상태였다.

오벨리아가 황궁을 빠져나가기 전 마지막으로 마주한 것이 아그네스였으니 임신에 관한 사실이 어디서 새어나갔을지는 뻔한 일이었다.

오벨리아의 앞에서 알렉산드로의 아이를 가졌다며 자랑스레 말하던 아그네스가 제 발등을 찍게 된 셈이었다.

***

“저자는 날이 갈수록 최악이 되어가는군.”

알렉산드로가 돌아가자마자, 에크하르트가 내뱉은 말이었다.

그의 어조에 혐오와 경멸이 가득 담겨 있었다.

“……문밖을 지키고 있기라도 했던 거야?”

단둘만 남자, 오벨리아는 아까부터 묻고 싶었던 것을 입 밖으로 꺼냈다.

에크하르트가 알렉산드로의 망언들을 막아선 타이밍이 너무 절묘했기 때문이다.

“……그자가 무슨 짓을 할지 모르니까.”

에크하르트가 어쩐지 오벨리아와 시선을 마주치지 못한 채 말했다.

그럴 만도 했다.

결국 그 말은 그가 그녀를 걱정했다는 말이었으니까.

오벨리아가 질끈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자연스레 그녀의 미간 사이가 찡그려졌다.

아, 당신의 걱정은 내게 너무 무거웠다.

“그런데 너…… 상태가 안 좋은 것 같은데.”

오벨리아의 속이 어떤지도 모르는지, 에크하르트가 훌쩍 그녀에게로 다가왔다.

그가 손을 들어 올려 오벨리아의 이마를 짚었다.

“열이 나는군. 당장 의원을 불러야겠어.”

오벨리아가 응접실 안의 거울을 바라봤다.

그녀의 얼굴은 평소보다 조금 더 혈색이 있어 보일 뿐, 크게 다를 게 없었다.

그런데 오벨리아가 스스로 눈치채지 못한 몸 상태를 에크하르트가 알아차린 것이다.

“우선, 방에 가서…….”

“에크하르트, 당신 설마 날…… 마음에 뒀어?”

좋아한다, 사랑한다.

차마 그런 단어들은 입 밖으로 내뱉지도 못했다.

절대 아니길 바랐으니까.

마음에 뒀다.

그건 오벨리아가 직접적인 언급을 피하려고 최대한 돌려 말한 것이었다.

혹시나 그 말을 입에 담았다가 현실이 될까 봐 두려웠기 때문이다.

“그럴 리가 없지.”

그리고 에크하르트가 어떤 대답을 내놓기 전에 오벨리아가 먼저 말을 이었다.

“그거 이상한 거잖아. 그거 안 되는 일이잖아.”

그건 오벨리아가 자기 자신에게 하는 말이었다.

에크하르트의 다정함에 흔들리는 자신을 볼 때마다, 그녀는 정말이지 끔찍했다.

인간이 염치가 있어야 할 게 아닌가.

그러나 오벨리아의 말은 의도치 않게 그를 찔렀다.

에크하르트가 자신도 모르게 대답하려던 것을 멈추고 입을 다물었다.

이상하다.

안 된다.

오벨리아의 말이 모두 맞았다.

힐켄테데의 사람들을 생각하면, 에크하르트가 그녀를 긍정적인 마음으로 생각하는 것은 말도 안 될 일이었다.

“그럴 일 없다.”

그래서 에크하르트는 단호하게 내뱉었다.

“그냥 네가 곧 죽어가니까- 동정해서 그럴 뿐이야.”

그렇게 하면 자신이 오벨리아에게 쓰고 있는 마음들을 정당화할 수 있을 거 같았기 때문이다.

동정.

그 단어에 오벨리아가 아까와는 다른 의미로 멈칫했다.

그녀는 순간 쓰게 올라오는 웃음을 내리눌렀다.

당연한 게 아니던가.

에크하르트는 올곧은 사람이라, 그녀를 가엾게 여길 뿐이다.

뭘 기대했길래 이런 기분이 드는지, 오벨리아는 스스로가 너무 싫었다.

“당신이 좋은 사람인 건 알아. 그래도 이런 식의 동정은 사양할게. 신경 써 주는 거… 불편해. 여기서 더 미안해하고 싶지 않아.”

오벨리아가 시선을 모로 돌린 채 말했다.

참, 우스웠다.

에크하르트가 자그마한 호의를 보일 때마다 그녀는 매번 안절부절못하고 한결 같이 이런 반응을 보이니까.

에크하르트에게는 그의 말대로 절대 그럴 일은 없으며 동정일 뿐일 텐데.

“내 방까지는 알아서 갈게. 의원 진찰도 받을 테니까…….”

오벨리아는 에크하르트의 쪽을 쳐다보지도 않고 그를 지나쳤다.

그러나 그 순간, 어느덧 아까보다 더 발갛게 얼굴에 열이 오른 그녀의 몸이 휘청거렸다.

“오벨리아……!”

에크하르트가 재빠르게 오벨리아를 부축했다.

그녀가 그 손을 밀어냈다.

“알아서 갈게. 시녀를 부르면 되니까….”

에크하르트가 미간을 찡그렸다.

‘그래서 당신이 가끔 이렇게 나올 때마다, 나는 무서워.’

에크하르트는 문득, 오벨리아의 그 말이 떠올랐다.

조금 전에도 오벨리아는 그에게 선을 넘어오지 말 것을 경고했다.

그녀는 늘 그래 왔다.

잠시 복잡한 시선을 하던 에크하르트가 그녀의 무릎과 허리를 받쳐 안아 들었다.

“에크하르트!”

“소란 떨지 마, 오벨리아. 네가 아니었어도 누구라도 아팠다면 이렇게 했을 테니까.”

마음에 둔 것도 아니고, 특별히 대하는 것도 아니다.

에크하르트는 그렇게 못 박았다.

그러자 움찔했던 오벨리아가 순간 얌전해졌다.

그녀가 자신도 모르게 몸을 웅크렸다.

어쩐지 대단히 깊숙한 곳을 찔린 기분이었다.

그 사이를 틈타 그는 더욱 단단히 그녀를 안아 들었다.

“데려다 줄 테니 얌전히 의원한테 진찰받아.”

오벨리아는 대답이 없었다.

그대로 에크하르트에게 안겨 방을 도착할 때까지 내내.

***

오벨리아는 해열제와 수면제를 먹고 잠이 들었다.

“별다른 이상은 없으십니다. 그저 스트레스를 받아 그 여파가 나타나셨을 뿐이지요.”

셀리아는 에크하르트에게 차분히 오벨리아의 몸 상태를 설명했다.

그녀의 건강 상태는 극비였기 때문에 셀리아가 오벨리아의 전담 의원을 맡고 있었다.

“아시다시피, 날이 갈수록 몸이 약해지고 계십니다.”

고작 알렉산드로로 인해 화가 났고, 고작 그 화가 열이 나게 할 만큼 건강이 좋지 않다는 의미였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하지?”

에크하르트는 막막한 기분이 되어 셀리아에게 물었다.

바실리스크의 독은 정말로 이 대륙 위에 해독제가 없는 것인지, 사람을 보낸 게 언젠데 아직 실마리조차 잡지 못하고 있었다.

그리고 오벨리아의 몸은 날로 꺼져갔다.

이러다가는 그녀가 죽을 때까지 살릴 방법을 못 찾을까 봐 덜컥 무언가 내려앉는 느낌이 들었다.

“최대한 스트레스를 안 받으시고 충분한 숙면과 양질의 식사를 통해 요양하시는 수밖에는 없습니다.”

대답은 이미 이전에 했던 말의 반복이었다.

에크하르트가 오벨리아를 가만히 내려다보다가 다시 물었다.

“……오벨리아가, 얼마나 살 수 있지?”

셀리아의 침묵이 길어졌다.

그럴수록 분위기는 점차 무거워졌다.

“셀리아.”

에크하르트가 한 번 더 재촉하자, 마침내 셀리아가 입을 열었다.

“1년이 채 안 되실 겁니다.”

“……아.”

에크하르트는 순간 자신이 멍청한 소리를 냈다고 생각했다.

그렇지만…… 아무리 오벨리아가 시한부라고 했지만…….

남은 생이 이토록 짧으리라고는 짐작조차 하지 못했다.

뭐라고 해야 할지를 찾지 못한 에크하르트의 입이 다물렸다.

“……알겠네, 나가 봐.”

한참 뒤에야 에크하르트는 셀리아에게 축객령을 내렸다.

그러나 의원이 오벨리아의 방을 나간 뒤에도 그는 여전히 그녀의 곁에 남아 있었다.

혹시라도 오벨리아가 자다가 깨어날까 봐 불 하나 켜지 않아 깜깜한 방 안에서 한참을 그녀를 내려다보던 에크하르트가 손을 뻗었다.

그의 손이 열로 인해 뜨끈뜨끈한 오벨리아의 손끝에 닿았다.

오벨리아를 괴롭게 하는 열은 동시에 그녀가 아직 살아 있다는 것을 증명하듯이 생생했다.

언젠간 이 체온이 싸늘히 식는다는 게 믿기지 않을 정도로.

오직 오벨리아가 살아 있다는 사실을 확인한 것만이 중요한 듯, 에크하르트는 금세 손을 거두었다.

어쩐지 마음이 무거웠다.

그래서 그는 오래도록 그녀의 곁을 떠나지 못했다.

***

알렉산드로는 천불이 터질 지경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오벨리아가 돌아온 이후로 당하기만 했으니 화가 나지 않을 리 없었다.

심지어 회임 사실을 제멋대로 발설한 것에 대하여 아그네스와 다투기까지 했으니, 알렉산드로의 기분이 유쾌할 턱이 없었다.

그래서 그는 라이너스를 불러들였다.

“황제 폐하를 뵙습니…….”

알렉산드로는 라이너스의 인사를 덜컥 끊어 버렸다.

“오벨리아가 돌아온 것은 알고 있겠지.”

이어 말하는 알렉산드로의 어조는 대단히 날 서 있었다.

“그리고 오벨리아가 돌아오는 동안 너는 아직도 카테리안느 공작이 되지 못했고.”

알렉산드로와 라이너스의 거래는 처음부터 두 사람이 각각 황제와 카테리안느 공작의 자리에 있을 때 성립되는 것이었다.

그래서 알렉산드로는 라이너스가 카테리안느 공작의 마차 사고를 일으킬 수 있도록 도운 것이었다.

알렉산드로도 선황제의 말대로 자칫하여 카테리안느 공작의 죽음에 자신이 관련되었다는 사실이 밝혀지면 어떤 치명타를 입을지 모르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알렉산드로는 새로운 카테리안느 공작이 될 라이너스의 미래에 위험을 감수했다.

그런데 오벨리아가 돌아오도록 라이너스는 여전히 카테리안느 공작이 아니었다.

“그건…….”

라이너스가 반사적으로 변명을 위해 입을 열었다.

“입 닫아!”

알렉산드로가 신경질적으로 소리쳤다.

그는 요즘 들어 원성을 높이지 않는 날이 없다고 생각했다.

“네 쓸모가 대체 뭐야! 난 황제가 됐는데, 넌 왜 공작이 되지 못하냐고!”

알렉산드로에게서 일방적인 화풀이가 터져 나왔다.

모욕감과 그에 따라 치미는 분노를 참으려 꽉 말아 쥔 라이너스의 주먹이 부들부들 떨렸다.

“네가 이렇게 무능한 줄 알았더라면 내가 네놈을 믿고 일을 벌였겠어?!”

쾅!

“폐하! 지금 놈이라고 하신 겁니까?”

그러나 알렉산드로에게서 자신을 놈이라고 지칭하는 말이 터져 나오자, 라이너스도 더 이상은 참지 않았다.

라이너스가 황제의 책상을 내리치며 따지고 들었다.

“아무리 폐하라고 하실지라도 카테리안느인 저를 이렇게 모욕하실 수는 없습니다!”

“하! 지금 네가 카테리안느의 성을 달고 있는 것 빼고 할 수 있는 게 뭐가 있어서! 카테리안느가 아직도 카테리안느 공작이 죽기 전의 카테리안느인 줄 아나!”

그러나 알렉산드로는 오만하게도 라이너스의 분노를 비웃었다.

그의 빈정거림에 라이너스의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이를 악문 라이너스가 씹어뱉듯이 말했다.

“폐하, 제게 이러시면 후회하실 텐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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